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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황제숭배 3 본문
앞에서는 줄리어스 시저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관념을
이용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줄리어스 시저 이후
로마의 정치권력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그리고 레피투스가 집정관이 되면서
제 2차 삼두정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권력은
위의 삼두정 과도기를 지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로
양분되어 재편되게 되며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제압한 이후엔 옥타비아누스의
독주체제가 됩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줄리어스 시저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도
그리스와 로마의 관념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고 합니다.
제국의 동방을 지배하던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당시 동방의 군주들같이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행동을 하다가
로마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분위기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이용했다고 하고요.
줄리어스 시저는 생전에
신적인 지위에 오르진 않았지만
그의 사후엔 원로원으로부터 신적인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양아버지인 줄리어스 시저의
신적지위까지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신적지위를 거부한다고 해도
이미 그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줄리어스 시저의 신적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신중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인들이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절대 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신적지위를 부여받은
시저의 양자라는 위치를
자연스럽게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신적인 추앙을 받던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리고
독주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외형상으론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면서
원로원의 위상을 유지시켜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외형상의 모습이고
그는 로마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로마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
프린켑스(제 1시민) 그리고
최고 군사지휘관이란 뜻의
임페라토르(개선장군) 등의
칭호를 받거나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나 임페라토르 등의 칭호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로마황제로
번역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중에 임페라토르 즉, 개선장군의 의미가
단지 군사적 의미로 제한되지 않고
정치권력인 황제(?)의 뉘앙스로 사용되는 것은
당시 공화정 말기와 시저 사후에
로마의 정치상황을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수요일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참고서적: 로마황제 (저자:크리스 스카레, 출판사: 갑인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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