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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 5'의 문장을 일부 다듬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본문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 5'의 문장을 일부 다듬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박지원( baghatur khan) 2024. 6. 16. 12:04이전에 올린 글에서 말갈과 숙신은 기원 전후로 서로 별개의 세력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당시 말갈은 지금의 중국 승덕시에서 중국 적봉시 부근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숙신은 지금의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서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말갈은 시간이 지나 중국 수나라 때 이후로는 예전에 숙신과 읍루가 활동했던 흑룡강 주변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위만조선 멸망 후 동쪽으로 이주해 지금의 요령성 동쪽(요하 동쪽, 요동)과 길림성, 한반도에서 삼한을 형성했던 것처럼,
말갈과 진번(개인적으로 여진의 선조라고 추정한다) 역시 후한과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흑룡강 주변과 러시아 연해주 주변으로 이주해 수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요나라 때엔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엔 옛 부여와 숙신 지역에 철륵인들 일부도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이 지역에서 철륵 내지는 철리(철리말갈), 철려로 불리며 활동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철리말갈로도 불리게 되었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이들을 흑수말갈의 분파라고 인식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말갈계통이 아닌 투르크 계이며 이들 철륵인들 중엔 왕건의 조상이 있었고 왕건의 조상은 선비족과 투르크족의 혼혈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철륵(철리, 철려, 철리말갈), 흑수말갈, 여진은 서로 계통이 다른 별개의 세력입니다.
진번의 후예가 여진이라는 제 주장이 맞다고 가정하면,
진번은 위만조선 전후로 조선과 말갈 사이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고 금사(金史)에선 여진의 선조는 말갈이라고 기재되었으니 진번과 말갈은 서로 같은 계통으로도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진번은 혈통적으로 말갈인들이지만 조선(위만조선과 그 이전의 조선이다. 내 개인적으론 그 이전의 조선은 기자조선이라고 본다)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의존하던 말갈의 이탈민들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진번은 지역적으로도 말갈과 조선(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중간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혈통적으로도 말갈인들이 주류이지만 일부는 조선인(기자조선, 위만조선)들과 혼혈화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종합하면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철륵은 원래 몽골지역에 거주하던 세력이었고, 말갈은 중국 승덕시에서 중국 내몽골 적봉시에 걸쳐 거주하던 세력이었으며, 여진(여진의 선조가 진번이라고 한다면)은 말갈과 위만조선 사이인 중국 승덕시 아래에 거주하며 중국으로부터 진번이라고 불리던 세력이었지만,
말갈은 수나라 때부터, 여진은 당나라 때부터 그리고 철륵은 고구려 멸망 이후 고려 때까지 이들은 지금의 흑룡강성, 길림성,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며 활동하던 것으로 사서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철륵과 흑수말갈은 당나라 때엔 당나라에 협조하여 함께 흑수도독부를 형성하던 연합세력이었고,
고려와 후백제의 일리천 전투 때엔 고려군 소속으로 역시 철륵과 흑수말갈은 전투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라의 전성기엔 철륵과 흑수말갈은 오국부를 이루며 느슨한 연맹체 국가가 됩니다.
이를 볼 때 철륵과 흑수말갈은 비교적 친밀한 세력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철륵과 여진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흑수말갈 세력들 중에서도 오국부를 형성한 흑룡강 주변의 흑수말갈 역시 여진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흑수말갈 중에 러시아 연해주 남쪽 해안가에 거주하던 흑수말갈은 함께 거주하던 여진인들인 야라(耶懒, 여진의 3대 세력이고 실제 여진의 본거지라고 본다)와 좋은 사이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제 개인적인 견해론,
원래 흑수말갈은 고구려 때엔 흑룡강 주변과 흑룡강 주변의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세력이었지만 고구려 멸망 후 흑수말갈은 러시아 남쪽 연해주까지 확장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야라(耶懒, 여진의 3대 세력이고 실제 여진의 본거지라고 본다) 주변에서 야라(耶懒)와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는 오국부에 대한 중국 백도백과의 내용입니다. 오국부는 철륵과 흑수말갈의 연합세력이며 오국부라는 느슨한 연맹체 국가입니다. 이 중에 월리길(越裏吉)은 철륵(철리말갈)에 해당되며 나머지 오리미(奧裏米), 분노리(盆奴裏), 부아리(剖阿里). 월리독(越裏篤)은 흑수말갈에 해당됩니다.
아래는 월리길(越裏吉)이 있었던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 구글지도입니다.
아래는 오리미(奧裏米)가 있었던 지금의 흑룡강성 수빈현 구글지도입니다.
아래는 오국부 중에 분노리(盆奴裏)가 있었던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현의 구글지도입니다.
아래는 월리독(越裏篤)이 있었던 지금의 흑룡강성 화천현 구글지도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론 완안부 시조의 세 형제는 야라(耶懒)에 거주하다가 시조의 세 형제는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고려의 대방(帶方, 고려황제가 고려왕씨 제후에게 봉해준 봉토이다)으로 이주했었고,
다시 시조와 동생은 야라(耶懒)로 돌아온 후 시조는 동생과 헤어져 지금의 납림하(拉林河) 상류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보입니다.
그런 후 세월이 지나 시조의 후손 때에 지금의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区)로 이주해서 그 곳을 기반으로 금나라를 세웠다고 봅니다.
이렇게 추리하면 만주원류고의 편찬자들이 기록한 것처럼 완안부는 시조로부터 네번에 걸쳐 이동한 것이 됩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예종 4년의 내용입니다. (음력 1109년 06월 27일)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예종 4년의 본문과 번역입니다.
庚子 御宣政殿南門, 引見褭弗·史顯等六人, 宣問來由, 褭弗等奏曰,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在甲申年閒, 弓漢村人不順太師指諭者, 擧兵懲之, 國朝以我爲犯境, 出兵征之, 復許修好. 故我信之, 朝貢不絶, 不謂去年, 大擧而入, 殺我耄倪, 置九城, 使流亡靡所止歸. 故太師使我來請舊地. 若還許九城, 使安生業,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 投於境上.” 王慰諭, 賜酒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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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 〈왕이〉 선정전(宣政殿) 남문에 거둥하여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요불 등이 아뢰기를, “옛날 우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가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조상도 대국[大邦, 고려](고려사 원문엔 대방[大邦]이라고 기재했다)으로부터 나왔으니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국(고려사 원문엔 대방[大邦]이라고 기재했다)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신(甲申, 1104) 연간에 궁한촌(弓漢村) 사람들 중 태사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군사를 일으켜 응징하자, 고려[國朝]에서는 우리들이 국경을 침범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를 내어 정벌하였지만 다시 수호(修好)를 허락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지난해에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우리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9성을 설치하여 유랑민들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에 태사가 우리로 보내어 옛 땅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9성을 되돌려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시면, 우리는 하늘에 맹세하여 자손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잘 타이르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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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완안부 여진의 최종 거주지인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区) 구글지도입니다.
아래는 이전에 올려드린 글 중에 일부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한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 5'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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