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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인들이 생각한 고구려의 평양 위치 (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궁예(弓裔)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궁예(弓裔)에 대한 내용이다.
分定浿西十三鎮. 平壌城主将軍黔用降, 甑城赤衣·黄衣賊明貴䓁歸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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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 2년 을축(905)〕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分定]. 평양의 성주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황의(黃衣)〔를 입는〕 도적 명귀(明貴) 등이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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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918년 9월 26일, 양력 918년 11월 2일)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 태조 원년(太祖 元年)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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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고려태조 왕건이 직접 밝힌 내용으로 고구려 평양을 지칭한다)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堂弟]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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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 태조 원년(918년)의 내용에선 태조 왕건이 이미 905년 궁예대왕 때 확보한 옛 고구려 평양(平壤)에 대해서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마진(摩震)의 궁예대왕 때나 고려태조 왕건 당시 마진(摩震)과 고려에선 옛 고구려의 평양(平壤)이라고 인식하던 지역이 있었다.
궁예 대왕 때인 905년에 옛 고구려 평양(平壤)을 확보했고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으니 237년 만에 고구려 평양(平壤)이 다시 이전의 위용을 되찾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궁예대왕이 확보하고 태조 왕건이 개척한 고구려의 평양(平壤)은 마진과 고려에서 옛 고구려의 평양(平壤)이라고 인식한 지역이다.
237년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평양(平壤)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2023년으로 비유하면 237년 전은 조선 정조 때의 일이다.
조선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만들었고 화성의 위치가 어딘지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 고 있다. 수원엔 화성의 모습이 있다. 당시 마진과 고려에서도 고구려 평양(平壤)의 위치는 알았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列傳) 서희(徐熙)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列傳) 서희(徐熙)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遜寧語熙曰, “汝國興新羅地, 高勾麗之地, 我所有也, 而汝侵蝕之. 又與我連壤, 而越海事宋, 故有今日之師. 若割地以獻, 而修朝聘, 可無事矣.” 熙曰, “非也. 我國卽高勾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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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에 힘쓴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만일 국경 문제를 논한다면, 요(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해 왔다고 말하는가? (이 문장을 보면 동경요양부가 고려의 평양은 아니다. 동경요양부는 이미 거란의 소유였다. 따라서 고려의 서경도 아니다. 동경요양부와 별개로 마진과 고려는 궁예대왕 때부터 평양을 확보했었고, 태조왕건 때부턴 평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려의 평양을 찾으려면 동경요양부는 제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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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 서희와 요나라의 소손녕의 대화를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평양(平壤)이 도읍이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두 인물의 대화 내용을 보면,
당시 요나라는 요양현(遼陽縣)을 동경(東京)에 속한 지역으로 확보하고 있었고 고려(高麗)는 옛 고구려(高勾麗)의 평양(平壤)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고려의 평양(平壤)은 중국 요양(遼陽)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이 내용을 보면 요양(遼陽)은 고려의 평양도 아니고 고려의 서경(西京)도 아니다.
따라서 고려의 평양(平壤)을 찾으려면 요양(遼陽)은 제외해야 한다.
또한 마진의 궁예나 고려의 왕건 역시 요양(遼陽)을 옛 고구려의 평양(平壤)으로 인식하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4 인종 4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1126년 12월 12일, 양력 1127년 1월 26일)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4 인종 4년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逮我祖宗, 値北國之兼幷, 侵三韓之分野, 雖講隣好, 未歸故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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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勾麗]의 본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였는데 ('압록에 의지해 제한되었다'나 '압록강에 의존해 한정되었다'가 맞는 번역이라고 본다) ,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고려국왕 인종의 고구려 평양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고구려 평양에 대한 인식이라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 사학계가 주장하듯 북한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라고 인식하진 않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소수 학자들이 주장하듯 중국의 요양이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인식하지도 않았다. 고려인들은 고구려의 평양이 압록강 주변에 있으면서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압록강 주변을 벗어나진 않았다고 인식했다) 그러다가 우리 선조(祖宗) 때에 북쪽으로 요(遼)가 겸병(兼幷)하고 삼한(三韓)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와서, 비록 수호를 강구하기는 하였지만 옛 땅은 돌려받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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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양력 1127년 고려 인종이 금나라 황제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여기서 고려 인종은 금나라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밝힌다.
옛 고구려는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옛 고구려의 평양(平壤)은 여러번 장소가 바뀌었지만
압록강(鴨綠江)에 의지해 제한되어 이동했다고 밝히고 있다(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즉, 지금의 서울이 있으면 서울로 출퇴근하는 분들을 위한 서울과 가까운 주변의 위성도시가 있듯이(위성도시는 서울이나 대도시에 의존된 성격의 도시이다),
옛 고구려의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을 의존하고 있었기에 이동하고 바뀌어도 압록강(鴨綠江) 주변으로 제한되어 있었다고 밝힌다.
따라서 고려 인종의 이러한 고구려 평양(平壤)에 대한 인식을 볼 때,
고려의 평양(平壤)은 지금의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고구려의 평양(平壤)이 있었다는 인식은 마진의 궁예대왕이나 고려태조 왕건 역시 같았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열전 최영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俄而後軍都督府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衛. 瑩告禑, 令殺遼東旗軍持榜文至兩界者二十一人, 只留思敬等五人, 令所在羈管.
禑托以西獵, 遂與寧妃及瑩往西海道, 次鳳州, 召瑩及我太祖曰, “欲攻遼陽, 卿等宜盡力.”
太祖反覆極陳其不可, 禑頗然之, 夜瑩復入曰, “願毋納他言.”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
船運林·廉等家財于西京, 以備軍賞, 又發中外僧徒爲兵. 於是, 加瑩八道都統使, 敏修爲左軍都統使, 太祖右軍都統使.
與諸將發平壤, 瑩曰, “今大軍在途, 若淹旬月, 大事不成, 臣請往督.” 禑曰, “卿行則誰與爲政?” 瑩固請, 禑曰, “卿往, 寡人亦往矣.”
有人自泥城來告, “遼東兵悉赴征胡, 城中但有一指揮耳, 若大軍至, 不戰而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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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웠다고 알렸다. 최영이 신우(고려 우왕)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軍) 21명을 죽이게 하였으며, 다만 이사경 등 5명은 머무르게 하고 그곳을 감시하게 하였다.
신우(고려 우왕)가 서쪽으로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마침내 영비 및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봉주(鳳州)에 행차하여 최영과 우리 태조(太祖)(이성계)를 불러 말하기를, “요양(遼陽)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이 고려사 열전 최영을 보면 요양과 평양, 서경이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요양이 고려 서경이거나 고려 평양은 아니다. 요양이 고구려 평양일지는 별개이고 고려 평양은 아니다)
태조(이성계)가 반복해서 불가함을 힘써 아뢰어 신우가 자못 옳다고 여기자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말하기를, “원컨대 다른 말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고려 우왕)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요양을 공격하는 데 고려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갔다는 것은 평양이 요양에서 멀지 않다는 뜻이다. 고려 우왕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직접 압록강에 임시 다리를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것은 평양이 임시 다리를 만드는 압록강에서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양에 거주하며 압록강의 상황을 직접 지휘한 것이다. 즉, 고려 평양과 압록강은 멀지가 않다)
배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가재(家財)를 서경(西京)으로 운반하여 군수 물자를 준비하게 하였고 또 온 나라의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군사로 삼았다. 이에 최영에게 8도도통사(八道都統使)를 더하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태조(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평양을 출발하면서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랐는데 만약 한 달을 끌게 되면 대사(大事)를 성공할 수 없으니 신이 가서 독려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고려 우왕)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굳게 청하자 신우(고려 우왕)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과인 역시 가겠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니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요동의 병사들은 모두 오랑캐[胡](몽골세력을 지칭한다고 본다)를 정벌하러 나갔고 성 안에는 단지 지휘(指揮) 한 사람만 있으니, 만약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함락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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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려사 열전 최영을 보면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이 공격하려는 곳은 요양(遼陽)이다.
고려사 열전 최영에선 요양(遼陽), 고려 평양(平壤), 고려 서경(西京)이 각각 등장하며 서로 별개의 지역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요양(遼陽)은 고려의 공격 목표였고 우왕과 최영은 고려 평양(平壤)에서 요양(遼陽) 공격을 준비하면서 군사들에게 필요한 군수물자를 선박을 이용해 고려 서경(西京)으로 운반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따라서 지금의 중국 요양(遼陽)은 고려의 서경(西京)이었거나 고려의 평양(平壤)은 아니다.
요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平壤)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고려 평양(平壤)이 아닌 것은 이 내용을 볼 때 분명하다.
요양(遼陽)에 대해 공격하기 위해 고려 우왕이 직접 평양(平壤)까지 갔다는 것은 평양(平壤)이 요양(遼陽)에서 멀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 북한의 평양(平壤)이 이 당시 고려의 평양(平壤)이라면,
개성에서 고려 우왕이 지휘하나 북한 평양(平壤)에서 지휘하나 두 지역 모두 압록강(鴨綠江)이나 요양(遼陽)에서 먼 것은 마찬가지이다.
굳이 북한 평양(平壤)으로 가서 압록강(鴨綠江) 상황을 지시할 필요는 없다.
고려 우왕이 직접 평양(平壤)으로 와서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 배나 뗏목을 이은 후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다리)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는 것은 고려 평양(平壤)과 압록강(鴨綠江)은 멀지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고려 인종이 금나라 황제에게 전한 서신에서도,
고구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 주변에 있었음을 밝혔었고 이는 바로 고려의 평양(平壤)이기도 했다.
따라서 고려 우왕과 최영은 직접 압록강(鴨綠江) 근처의 평양(平壤)으로 와서 요양(遼陽) 공격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즉,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고려의 평양(平壤)이 아니며,
지금 북한의 평양(平壤)이 고려의 평양(平壤)이라고 하면 위의 내용과 지역 연계는 부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이해된다.
아래는 내가 송양의 비류국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중국의 부이강(富爾江) 구글지도이다.
고려 서경(西京)으로 추정되는 오녀산 아래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다.
나는 이 지역이 고려 평양(平壤)으로 추정했었는데 고려사 전체를 읽어 볼 때,
이 지역은 고려인들이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다고 생각하던 성주(成州)이며,
고려 평양(平壤)은 이 지역보다 약간 남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과 접한 지역이라고 본다.
아래는 고려 평양(平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길림성 집안시(集安市) 구글지도이다.
고려 평양(平壤)은 고려 서경(西京)과는 별개의 도시라고 말씀드렸다.
아래는 고려 서경(西京)이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환인 만족자치현 오녀산성(五女山城) 구글지도다.
제왕운기에 보면,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한 곳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여러 수도 중에 하나인 고구려 평양(平壤)과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은 그 상징성에서 엄격히 차이가 난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고려는 서경(西京)과 평양(平壤)을 서로 인접한 지역이었지만 차이를 두고 구분했다고 본다.
지도를 보면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과 연결된 지금의 혼강(渾江)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禮曹判書申商啓曰: "三國始祖立廟, 須於其所都。 新羅則慶州, 百濟則全州, 高句麗則未知其所都也。" 上曰: "考之則不難知也。 雖不立於所都, 各於其國則可也。" 吏曹判書許稠啓曰: "祭者, 報功也。 我朝典章文物, 增損新羅之制, 只祀新羅始祖, 何如?" 上曰: "三國鼎峙, 不相上下, 不可捨此而取彼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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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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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조선 세종 때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신하들이 세종에게 삼국의 도읍에 시조의 묘를 세우자고 건의하면서 신라는 경주(慶州)이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의 도읍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이 내용을 복기대 고고학 박사께서 강의하시는 유튜브 방송을 보고 알았다.
그런데 조선 세종과 신하들이 대화 내용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대화 내용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시조가 세운 도읍을 이야기 하는데 내용은 삼국시대의 첫 도읍들이 아니며 내용엔 후삼국시대까지 포함되어 있다.
전주(全州)는 후백제(견훤백제)의 도읍이며,
삼국시대 백제의 첫 도읍은 하남 위례(河南慰禮)라고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다(温祚都河南慰禮城).
위의 대화내용은 고려가 아닌 고구려가 등장하기 때문에 전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모두를 포함한 내용이 아니지만 대화내용에 전주(全州)가 등장하므로서 후삼국시대까지 포함된 내용이 되었다.
그런데 전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모두를 포함한다고 해도 고려 때의 평양(平壤)은 고려인들이 생각한 고구려의 평양(平壤)이며,
고구려와 고려를 포함해서 도읍을 찾는다고 해도 고려는 개성이나 서경(西京), 평양(平壤) 등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내용을 보면 반드시 시조가 세운 도읍이 아니라고 해도 삼국이 도읍으로 정했던 장소 중 그에 해당되는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읍들 중 그 하나를 모르겠다고 조선 세종과 세종의 신하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올린 글에서,
조선 세종 때면 고려 서경(西京)이 있을 때에서 멀지 않을 때이기 때문에 조선 세종과 세종의 신하들이 몰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1388년도에도 고려 서경[西京]과 평양[平壤]이 존재했었고 이때는 1427년이다. 39년 전의 일이고 당시 조선에서 50대 초중반이면 대부분 기억할 수 있다),
이 당시는 조선이 지금의 평안북도와 함경북도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서,
조선 세종과 세종의 신하들이 의식적으로 고구려 평양(平壤)에 해당되는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평양(平壤)에 대한 언급을 피한 거라고 말씀드렸었다.
4군과 6진은 조선 세종이 여진어를 사용하는 부족과 알타리(斡朵里)와 오랑캐(兀良哈)의 영역을 장악한 것인데 모두 1430년 이후이다.
또한 조선은 고려 서경(西京)과 평양(平壤)으로 추정되는 압록강(鴨綠江) 북쪽을 조선 세종 때나 세종 이후에도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이 대화가 있기 2년 전인 1425년엔 건주위(후르카)의 이만주(李滿住)가 파저강(婆豬江) 유역에 거주했다.
파저강(婆豬江)은 지금의 혼강(渾江)인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 지역을 흐르던 비류수(沸流水)로 추정되며 내가 고려 서경(西京)으로 보는 환인만주족자치현을 흐르는 강이다.
1583년 이후 내가 고려 왕건의 후예로 보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고려 서경(西京) 주변이며 고려 성주(成州) 부근인 불아랍(퍼알라)과 혁도아랍(허투알라)을 기반으로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이라는 뜻이다,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으로 칭한다)를 세우고 후에 청나라(淸)의 태조가 되었다.
원래 고려 서경(西京)은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 왕식렴의 영역이었고 요령성 심양(瀋陽) 역시 고려의 충선왕과 충선왕 조카인 고려 왕씨가 심왕(심양왕)으로 제위하던 지역이었다.
결국, 고려 서경(西京)으로 추정되는 요령성 환인만주족자치현과 심왕(심양왕)의 영역인 지금의 요령성 심양(瀋陽)은 고려왕실이 아닌 고려 왕씨 중에 유력집안의 영역이었으니
태조 왕건의 후예로 보는 누르하치가 옛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성주(成州) 주변을 기반으로 만주구룬(만주국[滿洲國]이라는 뜻이다, 명나라에선 건주여진으로 칭한다)을 세우고 심양(瀋陽)으로 천도한 것은 왕식렴과 심양왕(瀋陽王)의 사례를 볼 때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으며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성주(成州) 주변인 퍼알라(불아랍)와 허투알라(혁도아랍), 심양왕(瀋陽王)의 영역인 심양(瀋陽)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나라(淸)가 누르하치의 후손인 순치제와 도르곤 때 산해관으로 들어왔으니
결국, 천명(天命)에 의해 누르하치의 후손들이 당나라(唐) 이후 올 자리에 온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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