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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5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5

박지원( baghatur khan) 2022. 12. 15. 15:18

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서 소개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내용이다.

 

肃慎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zh.wikipedia.org

의 유기백과에 기재된 아래 왼쪽에 보면

예맥(濊貊)과 숙신(肅愼)을 나타낸 지도를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예맥(濊貊)을 우리민족으로 인정하며,

말갈(靺鞨) 계열은 발해 외에는 우리민족으로 인정하진 않는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말갈(靺鞨)은 숙신(肅愼)의 혈통적인 후예가 아닌

외부에 거주하던 말갈(靺鞨)이 옛 숙신(肅愼)이 거주하던 땅에 이주한 것으로 보지만

만주원류고의 내용과 현재의 학설은 말갈(靺鞨)을 숙신의 후예로 본다.

 

만주원류고에서 숙신(肅愼)을 물길(勿吉), 말갈(靺鞨), 발해(渤海)와 연계하는 것은

지금의 동북3성에서 거주하던 세력들의 지역적 계보를 나타낸 것이지

혈통적인 계보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동북3성에 거주했던 지역적 계보이기 때문에 숙신(肅愼)과는 혈통적으로 다른

예맥(濊貊) 계인 부여(夫餘)와 백제(百濟), 위만조선(衛滿朝鮮)

중국 진나라(秦) 유민 계통인 신라(新羅)

만주원류고에서 만주(滿洲)의 계보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 예(濊)가 부여(夫餘)를 이루게 되니

부여(夫餘) 옆의 동북에 숙신(肅愼)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이후

옛 부여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철륵인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철리 내지는 철리말갈로 불리게 되었고

 

최종적으론 옛 숙신지역인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그들의 세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지도를 기준으로 보면

(濊)로 표기된 지역에서 숙신(肅慎)으로 표기된 지역으로

철륵 내지 철리말갈은 활동영역과 거주지를 이동했다고 본다.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 용건은

궁예대왕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 변한, 숙신을 언급한다.

 

고려사에서 편년통록을 인용한 내용을 보면

고려세조 용건은 항상 삼한의 병탄을 생각했었고

궁예대왕을 만난 자리에서

이 숙신을 조선, 변한과 함께 언급했다.

 

즉, 고려세조 용건은 숙신을 삼한의 하나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그 당시 통일신라 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관이다.

 

고려세조 용건이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게 된 이유는

자신의 조상이 이 숙신 지역에서 철리말갈(철륵, 철리)을 이루며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내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당나라 장수 이다조에 대한 백도백과 설명이다.

 

李多祚_百度百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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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ike.baidu.com

아래는 중국 백도백과에서 '이다조'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李多祚(654年—707年),盖川(今辽宁盖州市)人。靺鞨族,唐朝名将。
李多祚世为靺鞨酋长...................................................................................
...........................................................................................
唐睿宗李旦:以忠报国,典册所称;感义捐躯,名节斯在。
故右羽林大将军、上柱国、辽阳郡王李多祚,三韩贵种,百战余雄

'말갈(靺鞨)족'이라는 설명과 三韩贵种(삼한귀종)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즉, 말갈족 출신의 이다조를 삼한의 귀한 종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구당서'에 기재된 내용이라고 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구당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李多祚) 李多祚, 代爲靺鞨酋長. 多祚驍勇善射, 意氣感激. 少以軍功歷位右羽林軍大將軍, 前後掌禁兵, 北門宿衛二十餘年. …… 遂與柬之等定謀誅易之兄弟, 以功進封遼陽郡王, 食實封八百戶,

db.history.go.kr

아래는 구당서에 기재된 이다조에 대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李多祚) 李多祚, 代爲靺鞨酋長. 多祚驍勇善射, 意氣感激.
少以軍功歷位右羽林軍大將軍, 前後掌禁兵, 北門宿衛二十餘年. ……
 
遂與柬之等定謀誅易之兄弟, 以功進封遼陽郡王,
食實封八百戶, 仍拜其子承訓爲衛尉少卿. ……
睿宗卽位, 下制曰: 「以忠報國, 典册所稱, 感義捐軀,
名節斯在. 故右羽林大將軍·上柱國·遼陽郡王李多祚, 三韓貴種,

 
이다조가 생전에 활동한 내용과 평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다조의 선조를 말갈의 추장(代爲靺鞨酋長)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요양군왕 이다조를 삼한의 귀종(三韓貴種)이라고 칭하고 있다.

 

 

아래는 네이버 한자사전의 내용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hanja.dict.naver.com

의 사전 내용을 보면 '種(씨 종)'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사전에서 설명하는 첫번 째 뜻은 '씨'이며, 두번 째 뜻은 '종족'임을 알 수 있다.

즉, 혈통을 뜻하는 계념이다.

 

따라서 이다조에 대한 설명에서 선대에 말갈의 추장이었고

그 이다조를 삼한의 귀종(三韓貴種)

즉, '삼한 출신의 귀한 종족'이라고 구당서에서 표기한 것은

당나라 예종이 '말갈족을 삼한의 구성원으로 봤다'는 기록이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고려세조 용건의 '삼한관'인

숙신(말갈은 숙신의 지역적 후예이다)을 '삼한'의 하나라고 보는 견해는

기존 통일신라 때 신라 신문왕의 사관이나

고려세조 용건과 동시대의 인물인 최치원의 사관과는 다르다.

 

그런데 당나라 예종은 이다조를 삼한의 귀종으로 발언했다.

 

이다조의 조상 및 이다조의 활동 영역은 요령성이어서

이다조를 고구려 출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말갈족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삼한의 귀종'이라는 표현에서 '종(種)'이 '종족'이나 '씨'를 뜻하기 때문에

말갈족 출신의 이다조를 '삼한의 귀한 종자'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결국 이다조의 혈통을 뜻하는 용어이다.

 

이다조의 생전 활동을 평가한 당나라 예종의 표현이었다고 해석되는 데

고려세조 용건의 역사관처럼 숙신(말갈의 지역적 선조)을 삼한으로 보는 견해나 역사관이

고려세조 용건 이전 당나라 황제 예종의 역사관에서도 등장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말갈을 삼한의 구성원으로 보는 것은

고려세조 용건의 독창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물론 정확히는 용건은 말갈의 지역적 선조인 숙신을 언급했다.

하지만 용건이 이 발언을 할 당시엔 숙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기 662~716년에 활동한 당나라 예종 역시

말갈을 삼한에 포함시키는 발언을 했었다.

 

당나라 예종이 태어나고는 6년 후에 고구려가 멸망했다.

당나라가 발해를 인정한 것이 705년이며

당나라가 발해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713년도 이다.

 

그리고 당나라가 철리말갈의 수장에게

중랑장 작위를 수여한 것이은 716년 718년도이다.

 

당나라 예종은 710년에서 712년까지 즉위했다.

즉, 당나라와 말갈 사이에 이러한 외교관계가 있기 전에도

당나라에선 숙신의 지역적 후예인 말갈을 삼한의 하나로 본 것이다.

 

고려세조 용건의 역사관은 당나라 예종의 역사관을 이어간 것이다

 

당나라 예종은 662년에 태어나서 716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이

당나라에서 독립해 옛 부여지역과 옛 숙신지역으로 이주한 때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이 지역에 철리말갈이

기록되기 시작한 716년 사이로 본다.

즉, 당나라 예종의 즉위기간과는 별개로 예종이 생존한 시기이다.

 

당나라 예종의 발언과 고려세조 용건의 삼한론은

고려사에서 일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편년통록에 기재된

고려왕건 집안이 당나라 황제의 후손이라는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아래는 '중국역대인명사전'에 기재된 당예종(唐睿宗)에 대한 설명내용이다.

당예종(唐睿宗)의 즉위기간과 생존 년대가 기재되어 있다.

 

당예종

이단(李旦). 당나라의 황제(재위, 710-712). 고종(高宗)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초명은 욱륜(旭輪)인데, 윤(輪)으로 고쳤다가 다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훈고(訓詁)에 밝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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