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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3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3

박지원( baghatur khan) 2022. 12. 10. 17:01

 

아래는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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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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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의 내용 중 원문 일부를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
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위의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고)조선의 유민(朝鮮遺民)이라고 기재한 것을 볼 수 있다.

 

'유(遺)'자가 '남길 유' 내지는 '보낼 유'자인 것을 볼 때

그리고 고조선 내부에서 위만의 정변으로 인해 위만조선이 되었었고

이후엔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것을 볼 때,

 

이들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6촌은

고조선 정권 교체기나 한나라에 멸망한 이후에

진한(辰韓) 지역으로 이주한 옛 (고)조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위의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유사의 '진한'을 읽어 보면

삼국유사의 저자는 위만조선 멸망 후 진한(辰韓)으로 이주한

고조선인들이 진한 6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기재하는 것 같다.

 

결국, 삼국사기에선 신라의 전신인 서라벌은

진한(辰韓)에 거주하던 (고)조선 유민세력이 박혁거세를 지도자인

거서간으로 추대하여 세운 나라 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서라벌 그리고 신라로 이어지는 구도이며

신라는 고조선의 계승 국가이 된다.

 

 

아래는 다시 위의 삼국사기에 기재된 원문의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위에 보면 '박'과 '거서간'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고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기에

'박'이라는 성을 삼았다고 하는데 사람이 알에서 태어날 수 없으므로

이 말은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박혁거세는 외부에서 온 인물로 보이며

혁거세는 처음부터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진한 사람들이 그 '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몰라 표주박 닮았다고 표현했다 본다.

 

또한 '거서간'은 진한사람들의 말이라고 하니 '거서간'은 '박'과는 달리

혁거세 출신 지역의 언어가 아니라 진한의 언어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뜻 풀이는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 본기 제1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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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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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내용을 읽어 보면 고구려의 주몽에 대해 기재한다.

그런데 주몽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동부여의 해부루와 금와 그리고 북부여의 해모수가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주몽은 혈통적으론 북부여 해모수의 아들이지만

금와가 국왕으로 있던 동부여에서 태어나고 성장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선 북부여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북부여라는 단어가 부여가 여러 개가 있다는 늬앙스이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동부여를 불법정권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한 해부루의 동부여는 삼국사기에서

동해(東海) 물가의 땅이라고 하고 부여는 한반도 위 지역지만,

해모수에 밀린 해부루가 도피한 곳이 동해의 물가이고

해부루 사후 해부루의 기존 부여왕위를 계승한 금와의 영역은

동해의 물가가 아닌 북부여의 동부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북부여의 중심지가 지금의 송원시 일대라면

금와의 동부여는 지금의 길림시 일대라고 짐작된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기원전 1세기 당시 지금의 길림 일대를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에선 숙신의 영역으로 본다.

 

결국, 주몽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북부여의 혈통이

숙신 영역에서 성장하다가 비류수 부근의 졸본 지역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왕이 된 것이다

(또는 졸본부여를 물려받고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본다).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주몽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배경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선 평화적으로 북부여의 해부루가

동해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우고

그 비어있는 북부여는 해모수가 등장해서 지도자로 있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해모수 세력과 해부루 세력 간의 충돌이 있었고

그 과정에 해부루는 해모수 세력에 밀려 동쪽으로 이주하게 된 후

각자가 상대에 대해 불법정권이라고 부정하면서

자신이 부여의 정통정권이라고 주장하던 시대였다고 본다.

 

즉,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선 북부여와 동부여를 나누지만 실제 이 당시엔

북부여나 동부여 모두 부여국은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각각 자신만이 부여국의

정통성 있는 지도자이고 자신의 정권이 정통정권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주몽은 동부여의 금와가 확보하고 있던

북부여 지도자 해모수의 아들로서

동부여에서 유화부인과 주몽은 해모수의 아내이자 아들인

동부여의 인질 성격 아니었나 생각된다.

 

결국 주몽은 동부여에서 차별과 목숨의 위협을 받다가 탈출해서

졸본부여를 세웠으니 주몽은 동부여가 아닌 북부여를 계승한 인물이고

고구려 역시 이를 따르던 북부여의 계승 국가이다.

 

즉, 옛 고조선 영토를 근거지로 하나 주몽의 고구려는 북부여의 계승 국가이다.

또한 고구려 입장에선 동부여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불법정권이며

부여국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기재하는 북부여만 존재한 것이 된다.

 

그리고 동부여가 가섭원이라는 동해(東海) 물가의 땅에 있었다는 것은

부여가 북부여와 동부여로 서로 내부적으론 정권 다툼을 하던 국가였지만

 

부여국은 외부에서 볼 때 그 영토가

지금의 송원시 일대부터 길림시 일대까지인 국가였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변한과 백제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 고대 사료 DB

卷 第一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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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삼국유사에 기재된 원문의 번역 내용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이 바로 백제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함부로 구룡산(九龍山)을 변나산(卞那山)이라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를 변한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잘못된 것 같다. 당연히 옛날 현인(최치원)의 말이 옳을 것이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고 말한 것이다.

위의 내용을 읽어 보면 통일신라의 최치원은 변한(卞韓)이 백제라고 한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통설과 다르다. 우리나라 통설은 변한이 가야가 된다.

 

통일신라의 최치원은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 용건과 같은 시대 때의 인물이다.

최치원의 변한 백제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기재되어 있고

삼국유사에선 이 최치원의 변한 백제설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고려세조 용건이 최치원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고

이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의 설을 소개하고

삼국유사에선 최치원의 설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고려세조 용건이 삼한의 하나로 밝힌 변한은 바로 백제를 뜻한다고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에 기재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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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제왕운기는 고려 후기 때 기록이다. 따라서 고구려 당시의 일을 정확히 기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제왕운기를 통해 당시 고려인들 내지는 고려 왕실의 역사관을 알 수 있다.

 

마한(馬韓) 지역에서 주몽이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고

제왕운기에서 기술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선 최치원의 마한 고구려설을 따르고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에 기재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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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백제의 시조의 이름은 온조(溫祚)이니, 동명성제(東明聖帝)가 그 아버지였으며,
그 형 유리(類利)가 와서 왕위를 이으니,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아 남쪽으로 건너갔도다.
(동모(同母) 형 은조(殷祚)와 함께 남쪽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웠는데,
은조는 왕위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죽었다)
.

한(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18) 계묘년
(신라(新羅)가 건국한지 40년이 되며, 고구려(高句麗)가 건국한지 19년이다)에, 
변한(弁韓)에서 개국하니 들이 비옥하였으며,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를 얻을 만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린지 얼마되지 않아 천관(千官)이 갖추어졌도다.

제왕운기에선 '고구려가 마한 땅 왕검성에서 건국했다'

(開國馬韓王儉城)고 기재한 후

'백제는 변한에서 개국했다'(開國弁韓)고 기재하고 있다.

 

즉, 고려 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에선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의 변한 백제설'을 따르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최치원의 변한 백제설'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 제왕운기가 고려 왕의 허락된 내심이라면

고구려를 삼한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 고려세조 용건의 견해와는

어떻게 두 견해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해야 할까?

 

물론 고려세조 용건은 고구려가 마한이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삼한의 구성원에 고구려를 포함하지 않았고,

엄격히 이야기 하면 마한, 진한이나 신라라는 용어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고려왕은 정치적으로 고려의 임금이고

고려는 정치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다.

 

그와는 별개로 고려세조 용건은 사사로이 혈통적으로 고려 왕의 조상이다.

 

즉, 개인적으로 세조 용건의 역사관은 고려왕 조상의 역사관이라면

고려왕이라는 직분은 고려태조 왕건 때부터 고구려 유민의 추대에 의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고 그 대표로서 본분을 충실히 해야 하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