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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2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고려세조 용건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삼한 2

박지원( baghatur khan) 2022. 12. 8. 12:30

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고려세계에 기록된 태조 왕건의 아버지 용건(왕융)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元昌生四男, 長曰龍建, 後改隆, 字文明, 是爲世祖. 貌魁偉美鬚髥, 器度宏大, 有幷呑三韓之志. 嘗夢見一美人, 約爲室家. 後自松嶽, 往永安城, 道遇一女惟肖, 遂與爲婚. 不知所從來, 故世號夢夫人.

db.history.go.kr

위의 내용은 고려사의 고려세계에 기재된 내용이다.

고려세계는 편년통록과 편년강목을 인용해서 이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그런데 태조 왕건의 후손들 중에 이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내용과 일치하는 행동과 견해를 가지는 집안은 고려세계에 기재된 이제현의 글과 우리집안 조상의 행적 그리고 우리집안 조상 내력을 볼 때,

고려의 국왕, 우리 집안 그리고 청나라 황실은 고려세계에 기재된 편년통록과 편년강목의 내용과

일치된 견해나 행동을 보이고 있고,

고려 말기에도 다른 고려 왕건 후손은 왕씨종족기나 성원록을 따르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의 고려세계 자체에서도 이러한 내용에 대해 지적하면서,

편년통록이나 편년강목의 내용이 왕씨종족기나 성원록과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며 이 편년통록 내지 편년강목의 내용은 신뢰할 수 없다고 고려 말 유학자 이제현은 논평한다.

하지만 고려세계를 읽어 보면,

충선왕은 편년통록 내지 편년강목의 내용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며,

우리집안의 조상은 적극적으로 편년통록 내지 편년강목의 내용과 일치된 행동 및 기록을 보인다.

또한 청나라 황실 역시 편년통록 내지 편년강목에 기재된 내용과 같은 행동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대해선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위의 고려사 고려세계의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한 내용 그대로 올려드린다.

元昌生四男, 長曰龍建, 後改隆, 字文明, 是爲世祖. 貌魁偉美鬚髥, 器度宏大, 有幷呑三韓之志. 嘗夢見一美人, 約爲室家. 後自松嶽, 往永安城, 道遇一女惟肖, 遂與爲婚. 不知所從來, 故世號夢夫人. 或云, ‘以其爲三韓之母, 遂姓韓氏.’ 是爲威肅王后.
원창왕후(元昌王后)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부르길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문명(文明)이니 이 사람이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우뚝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꿈에서 한 미인을 보고 부인[室家]으로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매우 닮아 드디어 〈그녀와〉 더불어 혼인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드디어 성을 한씨(韓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용건(왕융)은 삼한(三韓)을 삼키려고(幷呑) 하였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이자 용건(왕융)의 부인은 삼한(三韓)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성을 한씨(韓氏)라고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용건(왕융)의 관심사는 항상 삼한의 병탄(삼한의 병합)인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세조 용건(왕융)은 통일신라의 최치원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리고 용건이 결혼하기 전 당시는 아직 궁예나 견훤이 등장하기 전이니

후삼국시대가 되기 이전이고 아직은 나라가 갈라지기 전인 통일신라 때이다.

그런데 용건은 삼한을 병탄(幷呑) 하려는 의지를 지녔다고 한다.

즉, 통일신라 입장에서 보면 '용건은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가 된다.

또한 이는 '용건은 신라를 인정하지 않았다'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용건은 신라의 통일을 완전한 삼한 통일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었다'가 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세가 태조총서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世祖時爲松嶽郡沙粲, 乾寧三年丙辰, 以郡歸于裔, 裔大喜, 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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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고려사 세가 태조총서에 대한 원문해석이다.

世祖時爲松嶽郡沙粲, 乾寧三年丙辰, 以郡歸于裔, 裔大喜, 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
세조(世祖)는 그 때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粲)이 되었는데, 건녕(乾寧) 3년(896) 병진에 송악군을 가지고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의 땅에서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그 성주로 삼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

항상 삼한의 병탄(병합)을 생각한 왕건의 아버지 용건은,

궁예 대왕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 숙신, 변한에 대한 자신의 설(說)을 이른다(曰).

그런데 이 나라들은 용건이 생존하던 당시엔 존재하지 않던 나라들이다.

따라서 용건 생존 당시 이 나라들의 계승국이 이 나라를 뜻한다고 해석된다.

삼국사기엔 신라는 조선(위만조선으로 해석된다) 유민이 세운 나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를 세운 고조선 유민은 遺(남길 유, 보낼 유)자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고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진한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보인다.

삼국사기에선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6부를 조선(위만조선으로 해석된다)의 유민 세력으로 기재하고,

고구려는 북부여의 해모수에서 졸본부여의 주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기재한다.

즉,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라고 보며, 신라는 조선(위만조선으로 해석된다)을 계승한 국가로 본다.

용건(왕륭)과 동시대 사람인 최치원과 고려 때 삼국유사의 기록에선

변한은 백제가 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는 남부여라는 국호를 지니고 있어서 부여의 계승국이기도 하다.

숙신은 이후 읍루, 물길, 흑수말갈과 다른 말갈 부족으로 이어진다.

정리하면, 용건(왕융)이 언급한 조선, 숙신, 변한은 용건(왕융)이 평소 병탄하려고 한 삼한(三韓)의 구성원이며

용건이 생존해 있을 당시 이 용건의 삼한(三韓)에 부합하는 나라들은

고조선 유민이 세운 신라,

숙신의 계승국이며 옛 철리말갈을 포함한 흑수말갈의 후예인 흑수와 철륵 그리고 여러 말갈족으로 구성된 발해(사실 철리말갈은 철륵으로서 말갈계열이 아닌 투르크 계열이지만 당나라에선 철리말갈로 칭하며 흑수말갈에 포함시킨다. 따라서 편제상 철리말갈도 숙신의 후예로 포함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당시 통일신라에 귀속된 국가였지만 변한의 계승국인 백제가 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용건(왕융)이 언급한 나라(용건이 정한 삼한이라고 해석된다)엔 고구려가 포함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도 그렇고 문자의 의미를 해석해 봐도 고구려가 포함되진 않는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구려는 이미 용건의 조상인 철륵이 당나라 철륵인 부대의 구성원으로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옛 부여 땅에 이주한 후 옛 숙신 지역에서 철륵(철리) 내지 철리말갈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철리(철리말갈)와 흑수부는 흑수말갈을 이루며 흑수말갈의 전신이 숙신이고,

철리말갈(철륵, 철리)은 옛 숙신(말갈)에 포함되는 지역이므로,

고려세조 용건은 고구려가 아닌 숙신이 삼한에 포함 된다고 본 것이다.

또한 속말말갈도 흑수말갈처럼 옛 숙신의 후예로 포함되는 세력들이며 발해의 주 구성원이다.

현재 우리나라 통설은 고구려는 물론이고 숙신 역시 삼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그에 반해 숙신은 삼한으로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관은,

내가 고려왕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가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도 매우 유사한 역사관을 보인다.

즉, 청나라 만주원류고는 고려세조 용건의 역사관을 따른다.

만주원류고에선 청나라의 조상과 연관된 나라와 세력 들을 열거한다.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청나라의 조상과 연관된 내용을 보면,

부여, 백제, 신라, 숙신, 말갈, 발해, 삼한이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구성된 나라들이 용건(왕융)이 나열한 나라들(용건이 주장하는 삼한의 구성원이라고 본다)과 거의 같고 고구려가 포함되지 않는 것도 같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청나라는 정치적으론 몽골의 원나라를 계승한 국가이지 위에서 나열한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계승한 국가는 아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기재된 만주원류고에 대한 설명이다.

 

만주원류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만주어: ᡝᡥᠰᡝᡳᡨ᠋ᠣᡴ᠋ᡨ᠋ᠣᠪᡠᡥ᠊ᠠᠮᠠᠨᠵᡠᠰᠠᡳᡩᠠᠰᡝᡴᡳᠶᡝᠨ  ᡳᡴᡳᠮᠴᡳᠨᠪᡳᡨᡥᡝ Hes

ko.wikipedia.org

키백과 내용에 보면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목차를 설명하는 내용이 보인다. 그대로 올린다.

1. 부족(部族) : 권 1부터 권 7까지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등 여러 부와 이웃에 있던 소론, 퍄카등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기록하고,

용건의 삼한론에 등장하는 숙신이 등장하면서 변한의 후예인 백제와 조선의 후예인 신라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 지역에서 당시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한 국가였는 데도 기재하질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세조 용건의 조상인 철륵이 당나라의 철륵인 부대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그 과정에서 철륵인 들은 옛 부여국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엔 옛 부여국 지역과 숙신 지역에서 철리말갈(철륵)로 활동했기에 그들이 이 지역에 대한 전통성을 옛 부여국과 고대의 숙신에 두는 것이라고 본다.

즉, 고려세조 용건이 지금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여기지 않는 숙신을 통일신라의 신문왕이나 용건과 동시대 인물인 최치원과 달리 삼한을 구성하는 하나로 언급한 것만 보아도,

고려세조 용건은 숙신의 후예인 흑수말갈(흑수부와 철리말갈을 포함한 개념이다)과 관련된,

당시 통일신라나 고구려 유민 입장에선 외국인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