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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 2 본문
아래는 유기백과에 등장하는철리말갈(鐵利靺鞨)에 대한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유기백과 내용 중 본문과 번역이다. (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 개인적인 해설이다.
唐朝时铁利靺鞨位于渤海国与黑水部之间 당나라 시대에 철리말갈은 발해국과 흑수부 사이에 있었다. |
고구려 멸망 이후 지금 중국의 흑룡강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선 철리말갈(鐵利靺鞨)과 월희말갈(越喜靺鞨)이라는 고구려 당시에 기록에 없던 말갈부족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들은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보다는 서남쪽과 남쪽에서 세력을 형성한다.
학자들은 A.D.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기존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멸망한 옛 고구려 지역으로 진출 및 확장하면서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분파인 철리말갈(鐵利靺鞨)과 월희말갈(越喜靺鞨)이 새롭게 형성된 거라고 본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월희말갈(越喜靺鞨)의 경우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확장에 따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분파라고 볼 수 있지만 철리말갈(鐵利靺鞨)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분파라고 보긴 힘들다.
즉,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주류는 흑수말갈(黑水靺鞨)과는 다른 집단이며 이들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 지역으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고구려에 병합되었던 옛 부여지역으로 이주한 세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철리말갈(鐵利靺鞨)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말갈(靺鞨)족은 아니다.
물론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주 세력인 철륵(鐵勒)이 옛 부여국 지역으로 이주한 후 당시 서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일부세력과 충돌내지는 타협을 보면서 이들이 서로 함께 합하여 철리말갈(鐵利靺鞨)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고는 볼 수 있다.
하지만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주 세력은 고려사에서 철륵(鐵勒)이라고 표기한 철륵(鐵勒)인이지 흑수말갈(黑水靺鞨) 이주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던 흑수말갈과(黑水靺鞨) 철리말갈(鐵利靺鞨) 그리고 월희말갈(越喜靺鞨)을 모두 통칭해서 흑수말갈(黑水靺鞨)로 칭하기도 한다.
아래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유기백과사전 내용 일부의 본문과 번역이다. (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 개인적인 해설이다.
668年,唐朝和新羅的聯軍滅亡高句麗後,黑水靺鞨開始沿松花江、牡丹江南下、西進, 並於691年末與唐朝(武周)發生軍事衝突,被武周靺鞨籍將領李多祚擊敗。 668년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이 후 흑수말갈이 송화강과 무단강을 향해 남하하고 서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691년 '무측천'의 '주나라(전,후 당나라)' '이다조' 장군과 군사충돌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이다조' 장군이 '흑수말갈'을 격퇴했다. |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말갈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전후 사정을 보면 철리말갈과 월희말갈을 제외한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던 흑수말갈이라고 해석된다.)이 송화강(松花江)유역과 무단강(牡丹江) 건너 서진과 남진을 하다가 무측천(武则天)의 주나라(무주[武周]로도 칭한다)에게 격퇴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주나라(무주[武周]로도 칭한다)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힘의 대치점이 되는 곳은 바로 송화강(松花江)과 무단강(牡丹江)이 만나는 지역이며 현재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이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은 철리말갈(鐵利靺鞨)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아래는 KBS의 역사프로그램에 등장한 내용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668년이다. 그리고 대조영에 의해 발해가 세워진 것은 698년이다.
즉, 30년 후 발해가 등장한 것이다.
당나라(唐)는 705년도에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도엔 발해와 외교관계를 맺는다.
철리말갈(鐵利靺鞨)도 비슷한 시기에 중국 기록에 등장한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이 722년에 당나라(唐)에 입조하기 전인 716년과 718년에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수장이 당나라(唐)로부터 중랑장 작위를 받는다.
724년에는 철리말갈(鐵利靺鞨)은 당나라(唐)로부터 장군 직위까지 받는다.
그리고 일 년 후인 725년 당나라(唐)는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한다(대략 지금의 흑룡강 하류지역에 거주하는 흑수말갈인들의 거주지로 추정된다).
다시 일 년 후인 726년 당나라(唐)는 철리말갈(鐵利靺鞨)을 흑수부(黑水部,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와 함께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 소속으로 배치한다.
즉, 대략 도식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흑수말갈={흑수부(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 철리말갈, 월희말갈(?)},
흑수말갈지역에 당나라의 기구인 흑수도독부 설치,
흑수부(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 철리말갈은 흑수도독부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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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생각엔 철리말갈(鐵利靺鞨)이 당나라(唐)에게 중랑장 직위를 받은 716년도부터 당나라(唐)는 발해를 포위하기 위한 군사적 압박을 시도했다고 본다.
그러한 이유로 발해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아래는 당나라(唐)에서 설치한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대한 유기백과 설명이다.
철리말갈(鐵利靺鞨)은 726년 당나라(唐)에 의해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편입되어 흑수부(黑水部,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와 함께 발해의 적대세력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철리말갈(鐵利靺鞨)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서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주 구성원인 철륵(鐵勒)인은 흑수말갈(黑水靺鞨)과는 다른 세력이었고 두 세력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서로 합의를 본 후
철륵(鐵勒)인들은 흑수말갈(黑水靺鞨) 출신 일부와 서로 연합해 철리말갈(鐵利靺鞨)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철리말갈(鐵利靺鞨)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부속세력은 아니었다고 본다.
당나라(唐)와의 외교관계에서 726년 전까진 서로 독립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발해가 710년 이후로 이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당나라(唐)에 의해 이들이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로 함께 배속되는 계기가 되었고,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소속된 철리말갈(鐵利靺鞨)과 흑수부(黑水部,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는 일반적으로 통칭해서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불리게 되었다고 본다.
즉, 당나라(唐), 철리말갈(鐵利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에게 부담스런 세력이 등장한 발해로 인해 철리말갈(鐵利靺鞨)과 흑룡강 하류에 거주하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당나라에 의해 흑수도독부를(黑水都督府) 형성하며 친 당나라(唐) 세력이 되었다고 본다.
아래는 미국 위키백과에서 소개하는 발해에 대한 내용이다.
발해의 지도와 발해의 15개부에 대한설명이 등장한다.
각 15개부의 설명을 보면 맨 왼쪽에 각부가 발해 이전에 어느 나라영토였는지 소개되어 있다.
숙신, 고구려, 부여 등 어느 한 영역이 일방적으로 많지 않고 고르게 나타나 있으며,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의 영역에 포함되어있지 않고 고구려 멸망 이후 등장한 철리말갈(鐵利靺鞨)과 월희말갈(越喜靺鞨)은 발해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위키백과사전에선,
철리말갈(鐵利靺鞨)이 발해에 의해 병합되어 철리부(鐵利府)를 형성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직접지배가 아니라 간접지배를 받았다는 만주원류고의 기록도 있다.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와 같은 발해, 당나라(唐), 철리말갈(鐵利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철륵(鐵勒 철리말갈[鐵利靺鞨])의 일원이었던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이 이 지역을 떠나 백두산을 거쳐 한반도 내 통일신라로 오게 되었고 지금의 개성에 거주하며 기반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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