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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1 (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며 후삼국시대의 일리천 전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고려군 소속의 외국인 부대 흑수(黑水), 달고(達姑), 철륵(鐵勒)이 등장한다.
이 고려사 내용 중에 철륵이 등장하는 부분에 대한 원문해석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 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의 정예 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
이 중에 달고(達姑)에 대한 글은 이전에 이미 올려드렸었다.
오늘은 철륵(鐵勒)에 대해서 올려드리겠다.
고려사에선 이 외국인 부대를 제번(諸蕃)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고려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元尹官茂·官憲等, 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 |
아래는 다음 한자사전에 기재된 諸蕃(제번)의 한자 각각의 풀이이다.
'諸(제)'의 뜻에 '여러' 내지 '모든'이라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蕃(번)'의 뜻엔 '부속', '울타리'의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이들은 고려태조왕건 당시 고려의 국경 밖에서 고려의 울타리 역할을 한 부속국 내지는 부속민인 외국인 이었다는 뜻이며 고려태조 왕건 당시 고려가 이 지역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려태조 왕건 이후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성장하면서 고려는 이들에 대한 간접지배가 느슨해지거나 위의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조 왕건 당시는 고려가 이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 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내용 중 철리(鐵利)에 대한 내용이다. (936년 9월 8일)
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원문과 번역이다.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陳. 太祖與尚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竒彦等, 領歩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鐡·洪儒·守郷·將軍王順·俊良等, 領歩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鐡騎二萬·歩卒三千及黒水·鐡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皷行而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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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맞서 진을 쳤다. 태조는 상보(尙父) 견훤과 함께 열병하였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좌익(左翼)으로 삼았다. 대상 김철(金鐵), 홍유(洪儒), 수경(守卿), 장군 왕순(王順), 준량(俊良) 등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우익(右翼)으로 삼았다. 대광(大匡) 순식(順式), 대상 긍준(兢俊), 왕겸(王謙), 왕예(王乂), 금필(黔弼), 장군 정순(貞順), 종희(宗熙) 등으로 하여금 철기(鐵騎) 20,000, 보병 3,000 및 흑수(黑水), 철리(鐵利) 등 여러 도(道)의 날랜 기병 9,5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중군으로 삼았다. 대장군 공훤(公萱), 장군 왕함윤(王含允)으로 하여금 군사 15,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선봉으로 삼았다.註 028〔군사들은〕 북을 치며 행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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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기재된 일리천 전투 외에 삼국사기에서도 일리천 전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선 고려사에 기재된 철륵(鐵勒)을 철리(鐵利)로 표기하고 있다.
즉, 고려사에 기재된 철륵(鐵勒)은 바로 철리(鐵利)인 것이다.
또한 고려사에선 철륵(鐵勒)을 고려의 울타리 내지 부속이라는 뜻의 번(蕃)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철리(鐵利)를 도(道)라고 기재하고 있다.
역시 고려의 부속이라는 뜻이며 고려에 종속된 지역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 중 철리국(鐵利國)의 귀부에 대한 내용이다.
위 내용의 원문 일부와 번역을 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鐵利國遣使, 表請歸附如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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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리국(鐵利國)에서 사신을 보내 예전처럼 귀부할 것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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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철리국(鐵利國)이란 고려태조 왕건 당시에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 철륵(鐵勒)을 뜻한다.
고려와 거란 전쟁 이후 철리국(鐵利國)이 다시 이전처럼 고려에 귀부할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그동안 거란에 종속되었던 철륵(鐵勒 철리[鐵利])이 다시 태조 왕건 당시의 일리천 전투 때처럼 고려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표한 것으로 본다.
고려사에서도 철륵(鐵勒)을 부속 내지 울타리라는 뜻의 번(蕃)으로 기재했고 삼국사기에선 철리(鐵利)를 고려에 귀속된 도(道)로 표기했으니 철리국(鐵利國)이 예전처럼(如舊)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이라는 의사표시는 고려사나 삼국사기에 기재된 일리천 전투 때의 예전 역사와 부합된다.
그러면 당시 태조 왕건은 어떻게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있었을까?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나는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이지만, 현재 국내의 개성 왕씨들과는 견해가 다르다.
우리 집안의 내력(내가 직접 족보를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력이라고 표기한다)에 기록된 내용이나 조상의 행적을 보면 우리 집안은 고려사'에 기록된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편년강목(編年綱目)의 내용을 보인다.
그런데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려시대 때 이제현이 활동하던 시기에 우리 집안과 고려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들은
고려사에 기재된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편년강목(編年綱目)의 내용과는 다른 성원록(聖源錄)이나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를 인정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사의 고려세계에서 이제현이 주장한 내용을 보면,
고려 말 충선왕 때 우리 집안과 고려왕을 제외한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들은 고려사에 기재된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편년강목(編年綱目)과는 다른 집안내력에 대한 기록을 지니고 있었고 그 기록이 왕씨종족기나 성원록의 내용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집안 조상의 내력과 행동은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편년강목(編年綱目)의 내용을 보이기 때문에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당나라(唐) 황제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즉, 고려태조 왕건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편년통록(編年通錄)이나 편년강목에 기재된 당나라(唐) 황제 숙종이나 선종이 고려태조 왕건의 직계 조상이라는 기록엔 동조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선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태조 왕건의 집안이 한반도에 오게 된 계기는 바로 이 철륵(鐵勒 철리말갈[鐵利靺鞨])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과 그 세력은 당나라에서 독립하여 바로 이들 철륵(鐵勒)인들과 함께 그 당시 옛 부여국의 영역에 거주하다가,
최종적으론 옛 숙신 지역인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과 그 부근에서 거주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이 옛 부여국 영역과 옛 숙신 지역에 거주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였으며,
그 곳에서 몇 대를 거주하다가 다시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이 통일신라 때 한반도로 이주 하게 된 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태조 왕건의 조상이 한반도 내 지금의 개성지역에 오게 된 계기는,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이 포함된 흑수말갈(黑水靺鞨)과 발해(渤海) 그리고 당나라(唐)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충돌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포함되어 당나라(唐) 등과 연합해서 발해(渤海)에 대항하다가,
결국, 발해(渤海)가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의 일부를 병합한 후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의 일부는 발해(渤海)의 일개 지방 부서인 철리부(鐵利府, 鐵裏府)가 된 역사가 있다.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의 북부 지역은 철려국(鐵驪國, 鐵離國)으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의 일부가 발해(渤海)에 귀속된 이후거나,
아니면 철리말갈([鐵利靺鞨], 철륵[鐵勒])이 발해(渤海)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내 개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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