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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일리천 전투의 고려 외국인 부대 철륵(鐵勒) 3 본문
고려사에서 철륵(鐵勒) 내지 철리(鐵利)로 표기된 세력은 각 국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거란족의 요나라에선 철려(鐵驪)내지 철리(鐵利)로 표기되어 있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선 철려(鐵驪)내지 철륵(鐵勒)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자 표기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중국 발음으론 철륵(鐵勒)은 Tiělè로 발음하고,
철려(鐵驪)와 철리(鐵利)는 모두 Tiěli로 발음된다.
또한 옛 철려(鐵驪)가 있던 지역은 현재 중국에선 철력시(鐵力市)로 표기하는데,
철력시(鐵力市)의 철력(鐵力) 역시 발음은 Tiěli이며 철려(鐵驪)나 철리(鐵利)와 발음이 같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를 할 때 당시 공식표기법에 따라 뻬이징이나 베이징, 블라디보스톡이나 블라지보스토크로 표기 하듯이 외국어의 한문 음차표기이고 모두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한문 음차표기이다.
다만 철리(鐵利)와 철려(鐵驪)는 원래 철륵(鐵勒)이었지만 주변 강대국의 종속관계에 따라,
철려(鐵驪)는 독립국이고 철리(鐵利)는 주변세력의 귀속국으로도 본다.
한국이나 중국에선 이들 철리(鐵利)를 여진(女眞)족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들은 여진(女眞)족이 아니다.
또한 근래 중국에서도 기존의 견해와 다른 견해들이 등장해서,
이들을 여진(女眞)족으로 보긴 하지만 기존에 생여진(生女眞)의 일파로 보던 견해와는 달리 생여진(生女眞)과는 분리된 세력으로 보는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다.
이들은 고려사와 금사엔 철륵(鐵勒)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 학자들은 금사에 기록된 철륵(鐵勒)을 철려(鐵驪)의 오서(誤書)로 본다.
하지만 고려사에서도 철륵(鐵勒)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금사에서 철륵(鐵勒)으로 표기한 것은 내 개인적인 견해론 오서(誤書)가 아니라고 본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들은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 때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 내 최강의 부대들인 철륵(鐵勒)인 부대와
관련이 있는 집단이라고 본다.
원래 철륵(鐵勒)은 투르크어로 Töläch라고 불리던 집단이다.
이들이 원래 거주하던 지역은 지금의 몽골공화국과 중국 일부였으며 이곳은 수나라와 당나라 땐 제1돌궐(突厥)제국의 영토였었다.
그리고 철륵(鐵勒)은 바로 제1돌궐(突厥)제국의 영토 안에 분포된 15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세력들이었다.
즉, 철륵(鐵勒)은 제1돌궐(突厥)제국에선 피지배 계층인 부속민들이었고 제1돌궐(突厥)제국의 전신인 흉노제국 때도 흉노의 피지배 계층인 부속민이었다.
제1돌궐제국의 지배층은 투르크인 인데 이들 철륵(鐵勒) 역시 투르크인이다.
따라서 이들은 지금의 동북3성에 거주했던 여진(女眞)족이 아니다.
철륵(鐵勒)은 투르크족이며 원래 지금의 몽골공화국 지역에 거주하던 세력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후 옛 부여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후에 최종적으로 옛 숙신 지역인 지금 중국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과 그 주변에 거주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고 나서 이주한 철륵(鐵勒)인들이 이 지역의 토착 세력 들인 여진(女眞)족, 흑수말갈(黑水靺鞨), 달고(達姑, 달로고[達魯古]), 발해(渤海 속말말갈[粟末靺鞨]) 등과도 인접하며 함께 거주하게 된 거라고 본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들 철륵(鐵勒)인들은 당나라 초기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과 매우 밀접한 세력이 되면서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과 함께 돌궐(突厥) 제1제국을 멸망시킨다.
또한 이러한 인연으로 철륵(鐵勒)의 15개 부족 중에 계필 부족과 회흘(위구르) 부족은 당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계필부족과 회흘부족은 당나라 황제의 부마(사위)에 오르게 되었다.
마치 후에 고려왕이 몽골 원나라 황제나 왕족의 사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 철륵(鐵勒) 부족들은 돌궐(突厥)과 당나라에서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당나라와 함께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西突厥)을 멸망시키는 데도 능력을 보였고 후에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 때도 당나라 군대 소속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철륵(鐵勒)인 부대는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때 당나라 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였지만 이들 철륵(鐵勒) 부대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할 때 본토에 남아 있는 철륵(鐵勒)인들이 당나라에 봉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 전쟁에 파병된 철륵(鐵勒) 부대 일부가 이들 철륵(鐵勒)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본토로 회군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철륵(鐵勒)인 봉기를 진압하러간 철륵(鐵勒)인 병력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은 진압을 하러 회군한 것이 아니라 같은 철륵(鐵勒)인 입장에서 봉기한 철륵(鐵勒)인들을 설득하고 협상하려 회군한 것이라고 내 개인적으로 보고 있다.
이 고구려 전쟁에 파병된 철륵(鐵勒)인 부대들 중 회흘(위구르) 부대는 고구려 내의 옛 부여지역을 공격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다시 여기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바로 이 당나라 군대의 철륵(鐵勒)인 부대 중 옛 부여 지역을 공격한 회흘(위구르) 부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좀 더 세밀하게 말씀드리면,
이 철륵(鐵勒)인들은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을 도와 그들을 지배하던 동돌궐(東突厥)을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과 함께 멸망시켰지만 동돌궐(東突厥) 멸망 후엔 당나라에도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철륵(鐵勒)인들이 흉노제국, 제1돌궐(突厥)제국 때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못하고 당나라에 지배를 받게 되자 당나라에 봉기를 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결국 봉기에 따른 당나라와의 합의 하에 고구려 전쟁 참전과 고구려 멸망 이후 멸망한 고구려 내 옛 부여 땅으로 당나라에서 독립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고구려와 전쟁 때 철륵(鐵勒)인 부대 중 회흘(위구르) 부대가 옛 부여 지역을 공격하고 점령한 전력이 있었고
당나라 입장에서는 그 곳에서 철륵(鐵勒)인들 일부가 이주하여 당나라에서 독립한 독자적인 세력이 된다고 해도
옛 부여국 영역과 그 주변의 기존 세력들 때문에 그 곳에서 당나라와 단절된 강력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긴 힘들다는 것을 당나라도 인지 했었다고 본다.
철륵(鐵勒)인들이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옛 부여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가정해도 실제 역사는 710년 이후부터 발해가 이 지역의 패권자로 등장하게 되었고
철리말갈(鐵利靺鞨, 당나라에서 철륵을 칭하는 명칭이라고 추정된다)은 흑수부(黑水部)와 함께 당나라에 의해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에 소속되어 친 당나라 세력이 되었다.
결국,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일부 철륵(鐵勒)인 세력들은 당나라에서 독립한 세력이 되었지만 일부의 철륵(鐵勒)인이 외지에 왔다는 한계 때문에 당나라와는 계속 같은 지향점을 두고 서로 이익의 합치를 두어야 하는 구조였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옛 고구려 지역은 발해가 등장하기 전까지 주인없는 지역이 된 것처럼 설명하지만
당나라 입장에선 그 많은 전력과 군비를 지출하고도 신라나 발해에 밀려 자신들이 멸망시킨 지역을 타국의 소유가 되도록 그대로 방치했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다.
사실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와 청황실이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이라는 것은 내 개인적으로 입증하기 어렵지 않다.
비교적 근래의 역사이고 공적으로도 문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말씀드린 내 개인적인 견해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 보단 어렵다.
그러나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 우리집안의 내력(내가 직접 족보를 본 적은 없기 때문에 내력이라고 말씀드린다)과 조상의 행적 그리고 청나라 황제나 청나라 황실이 보인 태도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글에서 올려드린 내 견해들과 연결해야 고려와 청나라가 행한 정책이나 입장에 대해 이해가 되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내 견해에 대한
즉, 내가 이렇게 생각한 근거에 대한 내용들은 앞으로 내가 올려드리는 글에서 계속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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