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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왕건의 역성혁명과 역사적 배경 (수정된 내용) 본문
KBS Drama Classic에서 올린 드라마 '태조 왕건' 신이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복지겸 그리고 신숭겸의 추대를 받고 거사를 일으킨다.
‘고려사’를 보면 왕건의 조상은 5대째 송악(松嶽, 개성)에서
터를 일구다가 궁예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살아남는다.
왕건의 아버지 왕융(용건)은 궁예대왕을 만나 조선, 변한, 숙신
즉, 왕륭(용건)의 기준에 따른 '삼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대왕께서 조선, 변한, 숙신의 왕이 되려면
즉, '삼한'의 임금이 되려면 이 송악(松嶽,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내 아들을 태수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궁예대왕은 송악(松嶽, 개성)에 도읍을 정한 후
왕융(용건)의 청을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도 원래 왕융(용건)의 청에
다른 내용을 첨가해서 다른 형태로 왕융(용건)의 청을 들어준다.
왕융(용건)은 연고도 없는 강원도의 금성(錦城)태수로 보내지며,
왕건은 송악(松嶽, 개성) 태수가 되지만
궁예대왕은 왕건에게 정기대감이라는 벼슬을 내린 후
정기대감 왕건을 최전방 전쟁터로 보내 버린다.
왕융(용건)은 자신의 영역이며 경제적 근거지인 송악(松嶽, 개성)을 잃고
자신의 아들 왕건과 헤어지게 된 것이며
왕건은 하루아침에 대기업 2세에서 아버지 왕융(용건)의 영향력을 잃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의 지휘관이 된 것이다.
전쟁에 패하고 살아와도 책임을 물어 처형을 당할 수 있으며
전쟁터에서 전사의 위험을 항상 안고 사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 왕융(용건)은 강원도 금성(錦城) 태수로 부임한지 일 년 만에 돌아가시고 만다.
당시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은
궁예의 힘에 굴복하면서도 궁예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재건을 생각했었다.
이들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각자의 지역과 재정을 바쳤으며 각각 벼슬과 관할권을 인정받았다.
그에 반해 송악(松嶽, 개성) 출신인 왕건의 아버지 왕융(용건) 집안은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인
고구려 유민 세력들과는 입장이 달랐다고 본다.
나는 왕건의 후손이지만 왕건 집안은 고구려 유민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인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들과는
서로 출신배경이나 정체성에 따른 지향점과 역사관이 달랐다고 본다.
즉,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들과
왕융(용건)은 서로 다른 정체성과 서로 다른 역사관을 가지고 궁예대왕에게 합병된 것이다.
궁예대왕이 후에 약속과 다르게 고구려 재건을 포기하고 고려(후고구려) 국호를 버린 후
마진(摩震, 단순한 불교용어가 아니며 고구려유민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국호라고 본다),
태봉(泰封, 고구려유민의 정서를 염두에 두고 궁예가 후퇴한 국호라고 본다)으로 국호를 바꾸며
청주 출신들을 내세워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을 견제하자
패서(浿西, 고구려 때의 명칭인 패수의 서쪽을 지칭한다)세력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재산과 지역을 기반으로 대왕이 된 궁예가 처음 병합될 때 약속과 달리
고려(후고구려)라는 국호도 버리고 자신들도 버린다고 생각해서
당시 시중이었던 왕건을 황제로 추대 한 것이라고 본다.
원래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서 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신라 내 반란세력이었지
처음부터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내세웠거나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하진 않던 세력으로 보인다.
궁예의 신라 내 반란세력과 패서(浿西)세력들인 고구려 유민세력
그리고 당시 송악(松嶽, 개성)의 세력인 왕융이 정치적으로 합해지면서
그때부터 고려(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궁예가 고려(후고구려)의 대왕이 되었다고 본다.
궁예 대왕이 국호를 고려(사서에선 명확히 국호가 고려라고 기재되어 있진 않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보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정한 것은
패서(浿西)세력인 고구려 유민세력을 반영한 행동이었고,
수도를 송악(松嶽, 개성)으로 정한 것은 용건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 본다.
즉, 신라 내 반란세력인 궁예와 패서(浿西)세력인 고구려 유민들은
서로 군사적 충돌을 하지 않고 국호를 고려(후고구려)로 정하고
각자의 세력을 인정하고 궁예가 대왕이 되는 조건에서 합의를 봤다고 보며
그에 반해 송악(松嶽, 개성)세력인 왕건 집안은
이들 고구려유민세력이나 궁예세력과는 출신이나 목적이 달랐다고 본다.
다시 이야기를 위의 왕건의 혁명 당시로 돌아가서 역사적인 전후사정을 보면,
궁예 내지는 궁예의 추종세력과 갈등을 빚은 고구려 유민출신 패서(浿西)세력들이
궁예에게 등을 돌린 궁예휘하의 세력들과 미리 궁예를 폐위시키기로 합의를 보고
고구려유민인 패서(浿西)세력이나 궁예휘하의 세력 모두
자신들 세력에선 황제를 내세우지 않기로 약속한 후
대신 이들 양쪽에 속하지 않은 제3세력이며
세력이 미약한 송악(松嶽, 개성)출신 왕건을 황제로 추대한 것으로 본다.
만일 여기서 왕건이 이들의 청을 계속 거절한다면 왕건은 죽었을 거라고 본다.
이미 이들의 혁명계획이 왕건에게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신숭겸은 왕건의 측근으로 보이고 복지겸, 홍유, 배현경은 왕건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지만
그 배후인 패서(浿西)세력이나 궁예에게 등을 돌린 궁예휘하의 세력은
정치적인 역학관계에 따라 왕건을 추대하려고 한 세력들이지
서로 안면이 있다고 해서 살려줄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통찰한 '제1황후'의 용기와 현명함으로
왕건은 거사를 일으키고 고려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 장면에서 '제1황후'의 존재감을 잘 생각하지 않는데
'제1황후'의 후손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려 현종 이후 황실은 '제5황후'의 후손들이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왕건을 출세시키고 다시 황제에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은
'제1황후'와 그의 집안 덕이었다.
모든 '고려 왕씨'와 '개성 왕씨'는 사실 '제1황후'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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