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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하스모니아 왕조5 본문
앞의 하스모니아 왕조 4세에서는
안티오쿠스 3세와
안티오쿠스 3세 이후
셀류코스 왕국은 로마의
간섭을 받게 된다는 내용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의 등장과
야손이 대제사장이 되는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내용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설명드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야손은 셀류코스 왕국이
로마에 바치는 조공으로 인한
재정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기원전 175년에 대제사장이 된 후
에루살렘을 그리스화 된
도시로 개조합니다.
당시 야손은
예루살렘을 그리스화 시키려는
개혁파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요.
다시 3년 후인 기원전 172년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메넬라우스라는 인물도
야손과 같은 방식으로
셀류코스 왕에게 뇌물을 바쳐
야손을 제치고 대제사장이 됩니다.
메넬라우스 역시
개혁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메넬라우스는 뇌물을 주기 위해
성전창고를 약탈해야 했으며
이로인해 예루살렘 주민들에 의한
폭력저항이 발생합니다.
(메넬라우스가 안디옥에 있을 때
그의 대리인인 리시마코스가 예루살렘에서 살해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유대에서는 하시딤이라는
정치운동이 형성됩니다.
이 폭력사태는
어렵게 진압되었습니다.
다시 3년 후인 기원전 169년에서 168년
안티우쿠스 4세는 이집트를 두차레 원정하는데
첫번째 원정에서 돌아올 때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 및 일부 파괴합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가
다시 이집트 원정할 때는
예루살렘에선 야손이
다시 예루살렘을 장악하려다
실패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아마도 개혁파 내부의 다툼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기회에 보수파는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메넬라우스를 포위합니다.
이집트 원정에서 로마에 의해
굴복을 당하고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예루살렘을 진압하고
약탈과 대학살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1년 후인 기원전 167년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예루살렘의 종교적 관습이나
종교적 행사등을 불법화 시킵니다.
이러한 칙령에 대해 예루살렘 주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순교하거나,
무기력하게 침묵하거나
세속적인 저항을 떠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메시아의 등장을 열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 들과는 달리
유대의 모디인이라는 지역에서는
맛다디아스라는 제사장과
그의 다섯 아들인
유다 마카비, 시몬, 요하난,
엘르아살
그리고 요나단에 의해
셀류코스 왕조에 대한
무력투쟁이 발생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드리고
다음 주 수요일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도서: 고대 이스라엘 (출판사: 한국신학 연구소
저 자: 리 아이 르바인
역 자: 김유기)
신약성서 배경 연구(출판사: 은성
저 자: 헬무트 쾨스터
역 자: 이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