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마태복음
- 미종권
- 이소룡
- 유운초
- 나광옥
- 칠성당랑권
- 담퇴
- 곽전각
- 알프레도 크라우스
- 정무체육회
- 팔괘장
- 태극당랑권
- 카를로 베르곤치
- 사권
- 장권당랑권
- 쥬세페 디 스테파노
- 이서문
- 북소림권
- 중앙국술관
- 마영도
- 당수도
- 누가복음
- 소호연
- 대한쿵후협회
- 연청권
- 마스다 류지
- 루치아노 파바로티
- 벽괘장
- 황위철
- 팔극권
- Today
- Total
濟世安民 bagtur khan
홍타이지, 훙타이지(콩타이지), 지농 2 본문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제국과 쿠빌라이(칭기즈칸의 손자이다)의 원나라(大元國 대원국), 다얀칸(大元汗 대원가한 大元可汗)이 통치한 이후의 북원(北元) 그리고 청나라 때 몽골에는 지농(吉囊, jínáng)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즉,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기 이전인 칭기즈칸 때에도, 몽골이 중국을 지배한 대원국(大元國 원나라) 때에도, 몽골이 중국 영토에서 쫓겨나서 다시 몽골로 돌아와 여전히 대원국(大元國)이라는 자의식으로 활동하던 북원(北元) 때에도,
그리고 북원(北元)이 청나라 홍타이지(Hong Taiji 皇太極)에게 병합되었지만 청나라의 중요한 협조자로 활동하던 때에도 지농(吉囊, jínáng)이라는 직분은 있었다.
원나라가 세워지기 전인 칭기즈칸이 활동하던 당시엔
칭기즈칸의 측근인 무칼리(무칼리는 칭기즈칸 집안이 아니다)가
지농(吉囊, jínáng)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송나라를 멸하고
원나라(大元國 카안 울루스)를 세운 후엔
지농(吉囊, jínáng)이라는 관직은 원나라 태조인 칭기즈칸의 후손들에게서 배출된다.
(원나라 시기 초대 지농은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진김의 아들인 감말라가 역임하지만
북원 때에는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인 쿠빌라이의 후손들이 지농을 역임한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는 지는 아직은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원나라 때 지농(吉囊, jínáng)이 될 수 있는 신분상의 요건은 타이지(台吉 Tayiji)나 콩타이지(渾台吉 Qong Tayiji)처럼 칭기즈칸의 후손이어야 된다.
하지만 타이지(Tayiji)나 콩타이지(Qong Tayiji)가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나타내는 호칭인 데에 반해,
지농(吉囊, jínáng)은 혈통적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은 아니지만 혈통적 신분이어야 가능한 원나라의 관직이라는 것에서 타이지(Tayiji)나 콩타이지(Qong Tayiji)와 구분된다.
아래는 지농(吉囊, jínáng)에 대한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위키백과 내용 중 일부이다. 그대로 올린다.
조논, 조농(ᠵᠢᠨᠦᠩ, 키릴 문자 :Жонон) 또는 지농(Жинон), 제농은 몽골제국 원나라, 북원과 청나라 시대에 존재했던 몽골의 관직, 직책이다.
원래 중국의 친왕(親王)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중국의 진왕(晉王) 작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몽골어로는 저군(儲君) 혹은 부칸(副汗, Вице-хан 또는 Вице-хаан)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중국 한자로 번역될 때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제농(濟農), 길능(吉能), 제낭(濟囊), 길낭(吉囊) 등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몽골에서는 카안, 칸의 가까운 친족 남성이 임명되었으며, 청나라 때는 오르도스의 조논은 익자오맹(ᠶᠡᠬᠡ ᠵᠣᠣ ᠶ᠋ᠢᠨ ᠴᠢᠭᠤᠯᠭᠠᠨ,Их Зуугийн чуулган)(盟)의 장이 청나라 황제로부터 임명되기도 했다.
개요[편집]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립할 때 무칼리를 전군 조농으로 임명한 바 있다.
원나라의 조농은 조정의 대신직을 겸임,담임하는 직위였고, 원나라의 문헌에 등장하는 첫 조농은 쿠빌라이 카안의 아들 노무간이었고, 그 뒤는 친킴의 아들이자 노무간의 조카 카말라가 이었다.
그는 1292년 팔백궁의 능묘를 지키는 일을 겸임하였다.
북원 시대의 조농은 카간의 관원이었다.
황금 가족 중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 임명되어 담당하였다.
나중에는 카안의 가까운 남자 친족이 임명되었다.
점차 조농은 카안 다음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오르도스의 족장이 조농직에 임명되었다.
1433년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이 자신의 동생 아그바르진 지농을 조농으로 임명했다.
청나라 때에는 오르도스의 익자오맹의 맹장이 조농직을 겸직, 임명되었다.
조선에는 지농이 직책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오해되어 알려졌다.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는 오르도스의 콩타이지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인 군빌리크 메르겐을 길낭(吉囊)으로 소개하여 길낭, 지농이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
위의 위키백과 설명 중에 '황금가족 중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 임명되어 담당하였다.'는 설명이 보인다.
황금가족(황금씨족)은 광의와 협의로 나뉜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처음부터 광의와 협의로 나누진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시대에 따라 황금가족(황금씨족)의 범위와 의미가 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황금가족(황금씨족)을 광의로 정의해도 두 가지 견해가 있는 데,
하나는 칭기즈 칸과 그의 친형제들의 후손들로 한정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칭기즈 칸의 조상 중 특정 인물의 후손으로 한정하는 견해도 있다.
위의 설명 중에 '황금가족 중 칭기즈 칸의 후손 중에'라는 표현은
황금가족을 광의로 정의한 후 구성된 문장으로 해석된다.
광의 중에서도 아마 칭기즈 칸과 그의 친형제들의 후손을 뜻하는 것 아닐까 추측된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원나라 초대 지농(吉囊, jínáng)인 감말라(甘麻剌)는 칭기즈칸의 아들 중 진김(真金)의 아들이니 학자들이 분류하는 협의의 황금씨족은 아니지만 광의의 황금씨족엔 포함된다.
하지만 북원시대 때와 청나라 초기 때 몽골에선
쿠빌라이 후손(학자들은 협의의 황금씨족으로 분류한다)이 조논(청나라에서 칭하는 몽골의 지농이다)을 역임했다. (북원시기와 청나라 때 몽골에서 쿠빌라이의 후손이 아닌 다른 칭기즈칸 아들의 후손이 조논[지농]을 역임했는지는 내가 모두 확인한 것은 아니어서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청태종 홍타이지(Hong Taiji 皇太極)를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가 아닌 청태종의 이름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농(吉囊, jínáng)이라는 단어도 한때 조선에선 사람의 이름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아래는 위의 백과사전 내용 중 한 문장이다.
'명나라의 일부 사서에는 오르도스의 콩타이지(渾台吉 Qong Tayiji)이며 우익 3만호의 지농(晉王, jínong)인 군빌리크 메르겐(Гүнбилэг Мерген 袞必里克 墨爾根)을 길낭(吉囊)으로 소개하여 길낭(吉囊), 지농(Жинон)이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문 吉囊(길낭)을 중국어로 발음하면 jínáng으로 발음한다.
즉, 한문표기인 吉囊(길낭)은 몽골어 지농(jínong, jínáng)의 음차표기이며 이 음차표기 吉囊(길낭)을 조선에선 관직의 명칭이 아닌 사람의 이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 위키백과 설명을 보면
'오르도스의 콩타이지(渾台吉 Qong Tayiji)이자 우익 3만호의 지농(晉王, jínong)인 군빌리크 메르겐(Гүнбилэг Мерген 袞必里克 墨爾根)을 길낭(吉囊)으로 소개하여'라는 문장을 볼 수 있다.
이 문장을 보면,
북원 시대에 현재 내몽골인 오르도스 지역의 인물인 군빌리크 메르겐(Гүнбилэг Мерген 袞必里克 墨爾根)이라는 인물은,
오르도스를 포함한 북원(北元) 우익의 3만호(30,000개의 호를 다스리는 관리를 뜻한다)라는 직분이었고,
이 3만호 직분을 지닌 인물이 지농(晉王, jínong 吉囊)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잠깐 설명을 하면,
북원 시대 때 쿠빌라이의 후손인 댜얀 칸(大元汗 大元可汗 대원가한)이 서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동몽골을 통일한 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좌익엔 3개의 만호(Tümen)를 편성했으며, 우익에도 3개의 만호(Tümen)를 편성했다.
그리고 좌익은 자신이 대칸(大可汗)이 되어 직접 다스렸고,
우익은 자신의 아들 중에 한 명을 지농(晉王, jínong 吉囊)이라는 직분으로 파견해서 우익(우익엔 세 개의 부가 있고 하나의 부엔 만호[10,000개의 호를 다스리는 관리]가 있다. 따라서 우익에 포함된 세 개의 부를 합하면 3개의 만호가 되고 이를 다스리는 지농은 3만호[30,000개의 호를 다스리는 관리]라는 관리도 되는 것이다)을 다스리게 했다.
따라서 이 백과사전 설명에서도 기재되어 있듯이
다얀 칸의(大元汗 大元可汗 대원가한) 손자인 군빌리크 메르겐(Гүнбилэг Мерген 袞必里克 墨爾根)은,
칭기즈칸, 툴루이, 쿠빌라이칸으로 이어지는 칭기즈칸의 후손이자 협의의 황금씨족이므로 혈통상의 호칭으로는 콩타이지(Qong Tayiji)가 되면서,
북원의 관직으로는 대칸(大可汗) 다음의 제2인자인 지농(晉王, jínong 吉囊)이 되는 것이다.
아래는 군빌리크 메르겐에 대한 위키백과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군빌리크 메르겐에 대한 설명이다. 그대로 올린다.
군빌리크 메르겐(Гүнбилэг Мерген 袞必里克 墨爾根) 또는 군빌리크 지농(Гүнбилэг жонон, 袞必里克 晉王,1506년 ~ 1542년 9월 혹은 1550년)은 몽골 우익 투메드부의 두번째 칸이자 오르도스부의 세번째 칸(재위:1531년~1542년 혹은 1533년~1542년), 몽골 우익의 지농(晉王, 재위:1531년~1542년 혹은 1533년~1542년)이다.
다른 이름은 군빌레그트(袞必里克圖, Гүнилигт)이다.
군빌리크는 몽골어로 깊다, 깊은이라는 뜻의 군과 재능, 예능을 말하는 빌릭의 합성어이다.
별칭인 메르겐은 몽골어로 총명함, 명사수를 뜻한다.
별칭은 메르겐 카르 지농(Мэргэн хар жонон, 현명한 검은 진왕)이다.
1531년 혹은 1533년부터 오르도스부와 투메드부의 칸이자 우익 지농이었다.
1542년까지 오르도스는 명목상 몽골 카안에게만 종속되고 독립적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룬 투멘(우익 투멘)의 세력은 점차 강력해졌다.
처음 이름은 고메리(庫蔑里, Гүмэли), 그의 칭호 발음이 중국에 와전되거나 잘못 들어, 명나라 사서에서는 맥력간 길낭(麥力艮吉囊), 기령(己寧) 등으로 부른다. 다얀 카안의 손자이다.
|
위키백과의 내용을 보면 군빌리크 지농(군빌리크 메르겐)은 다얀카안(大元可汗 대원가한 다얀칸)의 손자임을 볼 수 있다.
즉, 칭기즈칸의 후손이자 쿠빌라이칸의 후손임을 볼 수 있다.
아래는 다얀 칸에 대한 위키백과 설명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위키백과에 기재된 내용 중 일부이다. 그대로 올린다.
다얀 카안(몽골어: ᠳᠠᠶᠠᠨᠬᠠᠭᠠᠨ Dayan Qa'an, 한국 한자: 達延汗 달연한; Даян Хаан, 1464년 ~ 1517년 혹은 1519년, 1543년)은 북원의 대칸이었다.
휘는 보르지긴 바투 몽케(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ᠪᠠᠲᠤᠮᠥ᠋ᠩᠬᠡ Borǰigin Batumöngke, 한국 한자: 孛兒只斤 巴圖蒙克 패아지근 파도몽극 ᠪᠠᠲᠤᠮᠥ᠋ᠩᠬᠡ, Батмөнх)이다.
바투 몽케는 카안이 되어 38년 간 통치하였으며, 그가 만든 정치·사회적 구조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의 이름은 파도몽극(把秃蒙克), 파독맹가(把秃猛可)로도 번역된다.
탄언 칸(答言汗), 대원대카안(大元大可汗, Их-юань Их хаан, Их-юань Хаан)으로도 불린다.
별칭은 세첸 칸(ᠰᠡᠴᠡᠨᠬᠠᠭᠠᠨ, Сэцэн Хаан 車臣汗, 徹辰汗)으로 다얀 세첸 칸(ᠳᠠᠶᠠᠨᠰᠡᠴᠡᠨᠬᠠᠭᠠᠨ, Даян Сэцэн Хаан 達延 車臣汗, 達延 徹辰汗)으로도 부른다.
명나라에서는 그를 폄하하여 소왕자(小王子)라 불렀다.
만두울 칸 사후 혼란기가 지속되자, 만두카이 카툰이 칭기즈 칸의 후손인 그를 찾아 양육하여 몽골의 대칸으로 세웠다.
1487년부터 오이라트부를 원정하였으며, 이스마일, 후오시, 이부르 등을 정복하고 1510년 달란 데리군 전투에서 우익 3투멘을 격파하고 몽골 동부 지방을 통일하였다.
몽골의 재통일 후 몽골 6만호를 설치, 좌익으로 차하르, 할하부, 우량카이 3부와, 우익으로 오르도스부, 투메드부, 욘시예부 등의 3부로 개편하였다.
다얀 칸의 다얀은 몽골어로 대원(大元)을 뜻한다.
다얀 칸은 몽골을 재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되며, 몽골의 군주 중 칭기스 칸(태조 테무진) , 세첸 카안 (세조 쿠빌라이)에 이은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
|
위키백과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
북원의 다얀 칸은 쿠빌라이 때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大元國 대원국)의 칸(汗 카간 可汗)이라는 의미에서 大元 可汗(대원 가한)이라고 칭한 이름이다.
즉, 쿠빌라이의 후손인 바투 뭉케가 북원(北元)에선 대원 가한(大元 可汗) 칭호로 대칸이 된 것이다.
이전에 중국을 정복했던 대원국(大元國)이 중국에서 쫓겨났음에도,
북원(北元) 자신들은 여전히 대원국(大元國)임을 공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때뿐만 아니라 이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1453년도에도,
에센 타이시(也先 太師 야선 태사)가 大元天盛 大可汗(대원천성 대가한)이라는 칭호로 스스로 대원국(大元國)의 대칸(大汗 大可汗)이 된 적이 있었다.
즉, 이때도 북원은 스스로 대원국(大元國)임을 공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센 타이시(也先 太師 야선 태사)는 칭기즈칸의 후손이 아닌 서몽골 오이라트부족 출신이기에 원칙적으로 대칸이 될 수 없었고,
결국, 대칸으로 등극한지 1년(or 2년) 후에 살해된다.
즉, 서몽골의 에센 타이시(也先 太師)나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에서 보듯 칭기즈칸의 계승국들에선 칭기즈칸의 후손이 아니면 대칸이나 칸이 될 수 없었다.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도 칭기즈칸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칸이 되지 못하고 군사지도자 호칭인 아미르라는 칭호로 불렸다.
다만 아미르 티무르는 칭기즈칸의 후손과 계속 결혼한 고려 왕조나,
칭기즈칸 동생인 주치 카사르 집안의 여성들과 계속 결혼한 청나라 황실처럼,
아미르나 아미르 후손들 역시 계속 칭기즈칸 집안의 여성들과 결혼했다.
그 칭기즈칸 집안의 여성들과 결혼한 티무르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바로 인도의 무굴제국이다. '무굴'은 '몽골'의 인도발음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지만,
마치 고려왕씨 출신인 청나라 황실이 계속 칭기즈칸의 후손과 그리고 누르하치 때부터는 칭기즈칸의 동생인 주치 카사르의 후손과 계속 결혼해서 청나라를 세운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시 스스로 대원국(大元國)의 대칸이 된 북원(北元)의 다얀칸(大元可汗)으로 돌아와서,
따라서 이 보다 거의 100년 전인 쿠빌라이의 후손 북원 황제 투구스 테무르(元 平皇帝 脫古思帖木兒)가 1388년 북원에서 피살되었다고 해서 그때에 북원(北元)이 멸망했다고 국내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본다.
1452년(or 1453년) 에센 타이시도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1487년에 북원(北元)에서 대원국(大元國)의 칸이라는 뜻의 다얀칸(大元汗 大元可汗 대원가한)이 즉위했기 때문에,
북원(北元)은 청나라 홍타이지(Hong Taiji 皇太極)에게 병합되기 전까진 존재하고 있었다고 본다.
현재 중국도 청나라의 홍타이지(Hong Taiji 皇太極)가 다얀 칸(大元可汗)의 후손인 릭단 칸(Ligden Qa'an 林丹汗)의 차하르(Čahar 察哈尔)부족을 병합하기 이전까지는 계속 북원(北元)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분위기다
다만, 옛 명나라의 시각으로 볼 땐,
명나라에선 옛 원나라(大元國 대원국)는 이미 사라진 나라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북원(北元)이나 대원국(大元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거나 기록하진 않는다.
(명나라가 대원국을 중국 영토에서 몰아낸 후 남쪽의 명나라 북쪽의 북원이 대치하던 초기에 명나라는 스스로 대원국의 계승자라고 여기면서 북원을 괴뢰국가로 보았고 그 반대로 북원은 명나라는 국가가 아닌 대원국의 남부를 불법점거한 반란단체로 규정했다)
따라서 명나라에선 대원국(大元國)의 다얀칸(大元汗)이라고 칭하지 않고,
중국어로 다얀 칸(大元可汗)을 음차표기해서 達延汗(dáyánhàn 달연한)이라고 부르고 표기한다.
'북원(명대 몽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타이지, 훙타이지(콩타이지), 지농 3 (0) | 2023.03.03 |
---|---|
홍타이지, 훙타이지(콩타이지), 지농 1 (0) | 2023.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