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야율유가(耶律留哥)와 포선만노(蒲鮮萬奴) 본문
아래는 야율유가(耶律留哥)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설명이다.
耶律留哥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耶律留哥(1165年—1220年),金朝末年人物,原来是生活在金朝东北地区的契丹人,後來起兵叛金,依附大蒙古国,並建立政權。 耶律留哥早期在金國任北邊千戶。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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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留哥(1165年—1220年),金朝末年人物,原来是生活在金朝东北地区的契丹人,後來起兵叛金,依附大蒙古国,並建立政權。
耶律留哥早期在金國任北邊千戶。成吉思汗在漠北興起時,金人疑遼遺民有異志,下令遼民一戶以二女真戶夾居防之,耶律留哥對此不滿。
1212年耶律留哥在隆安(今吉林农安)、韓州(今吉林梨树)一帶招集壯士剽掠其地,地方政府發兵追捕,全部被留哥擊退。
耶律留哥與耶律的合勢募兵,數月之間發展至十餘萬人,眾人推留哥為都元帥,耶律的為副帥,營帳百里,威震遼東。蒙古軍在此時進入遼地,遇到耶律留哥。留哥以契丹軍之名依附大蒙古国。
金國派完顏胡沙、蒲鮮萬奴領軍六十萬人討伐耶律留哥,號稱百萬。耶律留哥向蒙古求援。
在少量蒙古軍支援下,留哥在迪吉腦兒(今辽宁昌图附近)迎戰金兵。
留哥以侄兒耶律安奴為先鋒,橫衝完顏胡沙的軍队,大敗金兵。
1213年三月,耶律留哥稱王,定國號为“遼”,改元天统,史稱“东辽”,以姚里氏為皇后,弟耶律廝不為郡王,坡沙、僧家奴、耶律的、李家奴等為丞相、元帥、尚書,統古與、著拔行元帥府事。
1214年金國再派蒲鮮萬奴領軍四十餘萬進攻耶律留哥,留哥在歸仁縣(今遼寧昌图內)北河上大破金兵,乘勢佔領遼東州郡,定都咸平,號為“中京”。
耶律留哥在1215年春攻佔了金東京(今辽阳)。不久眾人勸留哥稱帝,留哥一直拒絕。1215年十一月,耶律留哥秘密與其子薛闍帶備厚禮到漠北晉見成吉思汗,成吉思汗大悦,并賜了金虎符給他,仍封為遼王。
成吉思汗不滿耶律留哥的副手可特哥娶了蒲鮮萬奴之妻李仙娥,打算向可特哥問罪。可特哥懼怕,與耶律廝不等人宣佈耶律留哥已死,舉兵背叛。
1216年耶律廝不稱帝,國號遼,史称后辽。後來耶律廝不為其下所殺,耶律金山、耶律统古与及耶律喊舍先後自立。
1218年耶律留哥「引蒙古、契丹軍及东夏國元帥胡士兵十萬」進圍耶律喊捨,並得到高麗發兵支援。
到了1219年春,耶律喊捨兵敗自殺,耶律留哥收復了舊地。
元太祖十五年(1220年),耶律留哥去世,成吉思汗以其妻姚里氏「佩虎符,權領其眾者七年」。
東遼政权一直到1233年,由于蒲鮮万奴的东夏灭亡,才被蒙古取消。不过,耶律留哥的后代依然是大蒙古国(蒙古帝国)经略东北的世袭地方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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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유가(1165-1220)는 금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원래는 금나라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거란인으로, 이후 금나라에 반기를 들고, 몽골 제국에 의존하고 귀부하여 자신의 정권을 수립했다.
야율유가는 처음에는 금나라의 북쪽 변방에서 천호로 있었다. 칭기즈칸이 고비사막 북부(지금의 몽골공화국)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금나라 사람들은 요나라 출신 유민들의 반역 의도를 의심하여 요나라 출신의 일호(一戶)를 여진족 이호(二戶)에 들어가 거주하게 명령하였다. 야율유가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212년, 야율유가는 융안(현 지린성 농안)과 한주(현 지린성 리수) 일대에서 그 땅을 약탈하고 탈취하기 위해 장사들을 모집했다. 지방정부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야율유가에게 격퇴되었다.
야율유가와 야율적과 뜻을 같이한 모병은, 몇 달 만에 10만 명이 넘는 군대로 세가 증가했다. 군중들은 야율유가를 도원수로, 야율적을 부장으로 선출했다. 그들의 진영은 100리에 뻗어 있어 요동 전역에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 몽골군이 요의 영토(야율유가의 영역인 요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에 진입하여 야율유가와 조우했다. 야율유가는 거란군의 직함(야율유가는 옛 요나라의 직함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으로 몽골 제국에 귀부했다.
금나라는 완안호사와 포선만노에게 명하여 6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율유가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들을 100만명으로 칭했다(실제로는 60만명이지만 100만대군으로 칭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몽골군의 지원이 미약한 가운데, 야율유가는 적길뇌아(현재 요녕성 창도 부근)에서 금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다.
야율유가는 조카 야율안노를 선봉으로 삼았고, 완안호사의 군대의 측면을 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1213년 3월, 야율유가는 왕을 칭하며 국호를 "요(遼)"로 정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동요(東遼)"로 알려져 있는 나라이다.
그는 요리씨(姚里氏)를 황후로, 동생 야율시를 군왕으로 삼고, 파사, 승가노, 야율적, 이가노를 승상, 원수, 상서로 삼았고 통고여와 저발은 행원수부사로 삼았다.
1214년, 금나라는 다시 포선만노를 파병하여 40만 명이 넘는 군대로 야율유가를 공격하게 했다. 야율유가는 귀인현(현재 요녕성 창도) 북하 위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그 기세로 요동주군(遼東州郡)을 점령한 후, 함평(지금의 개원시이다)에 도읍을 정하고는, 이름을 중경(中京)이라고 하였다.
1215년 봄 야율유가는 금나라 동경(현재 요양)을 함락시켰다.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야율유가에게 황제를 칭하라고 권했으나, 야율유가는 계속 거절했다.
1215년 11월, 야율유가는 비밀리에 아들 설도(薛闍)와 함께 호화로운 선물을 챙겨 고비사막 이북(지금의 몽골공화국)에서 징기스칸을 만나러 갔다. 징기스칸은 기뻐하며 금호부(金虎符, 아마도 군사를 부리를 수 있는 권한을 상징한 징표인 것 같다)를 하사했고, 따라서 그대로 요왕(遼王)위를 유지했다.
징기스칸은 야율유가의 부관 가특가(可特哥)가 포선만노(蒲鮮萬奴)의 아내 이선아(李仙娥)를 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가특가(可特哥)에게 징벌하기로 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특가(可特哥)는 야율시 등과 함께 기다리지 않고('아직 실제 사건은 일어나지도 안았는데'라는 뜻인 것 같다) 야율유가의 죽음을 먼저 선포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
1216년 야율시는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고, 나라 이름을 요(遼)로 정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후요(後遼)로 불린다. 이후 야율시는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야율금산, 야율통고여, 야율함사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1218년, 야율유가는 '몽골, 거란군, 동하국의 원수 호토 병사 10만을 이끌고' 야율함사를 포위 공격했고, 고려가 파병한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1219년 봄, 야율함사는 패배하고 자결했고, 야율유가는 옛 영토를 탈환했다.
원태조 15년(1220년)에, 야율유가는 사망했다. 칭기즈칸은 그의 처 요리씨(姚里氏)에게 '호부(虎符, 병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를 하사하여 7년간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게 했다.'
동요정권(東遼政权)은 1233년, 포선만노의 동하(东夏)가 멸망하면서 몽골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야율유가의 후손들은 몽골 제국 북동부 지역에서 세습 지방 관리로 계속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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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유가(耶律留哥)는 금나라 말기의 인물이다.
야율씨(耶律氏)이며 금나라에게 반란을 일으킨 후 몽골제국에 귀부할 때
거란군(契丹軍)으로 귀부했고, 왕을 칭했으며(稱王), 요(遼, 동요[東遼])를 세운 것을 볼 때
옛 거란의 왕족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황제가 아닌 왕을 칭한 것을 볼 때 몽골제국 내에 속한 거란으로 위치를 정립했다고 본다.
야율유가가 처음 금나라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며 군사적으로 공격한 지역은 융안(隆安)과 한주(韓州) 일대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선 당시 융안(隆安)은 지금의 길림성 농안현(农安县)으로 보고 있고 한주(韓州)는 지금의 길림성 리수현(梨树县)으로 보고 있다.
아래는 길림성 농안현(农安县) 구글지도이다.
눙안 현 · 중국 지린 성 창춘 시
중국 지린 성 창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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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농안현(农安县)을 야율유가가 공격한 금나라 융안(隆安)으로 중국유기백과에선 보고 있다.
아래는 길림성 리수현(梨树县)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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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리수현(梨树县)을 야율유가가 공격한 금나라 한주(韓州)로 중국유기백과에선 보고 있다.
거란출신 야율유가가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금나라는 완안호사와 포선만노에게 6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율유가를 정벌하게 하였다고 한다.
야율유가는 이미 몽골에게 귀부했지만 몽골의 지원은 미비했다고 한다.
결국, 양율유가는 적길뇌아(迪吉腦兒, 현재 요녕성 창도 부근)에서 금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고 야율유가는 조카 야율안노를 선봉으로 삼아 완안호사의 군대를 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고 한다.
금나라는 포선만노와 40만 명이 넘는 군대로 다시 야율유가를 공격했고 야율유가는 귀인현(현재 요녕성 창도) 북하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는 그 기세를 이어 요동주군(遼東州郡)을 점령한 후, 1214년 함평(지금의 개원시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이름은 중경(中京)이라고 했다 한다.
이미 1213년에 야율유가는 요(遼, 동요[東遼])를 세웠으니 중경(中京)은 요(遼, 동요[東遼])의 정식 도읍이라고 본다.
아래는 요녕성 창도현(昌图县) 구글지도이다.
창투 현 · 중국 랴오닝 성 톄링 시
중국 랴오닝 성 톄링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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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기백과에는 지금의 요녕성 창도현(昌图县) 부근에서 야율유가가 포선만노를 첫번 째로 물리쳤고 두번 째로는 창도현(昌图县) 내에서 포선만노를 물리쳤다고 기재되어 있다.
아래는 함평부(咸平府)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설명이다.
咸平府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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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함평부(咸平府)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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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府,中国古代的府。
金朝天德二年(1150年)升咸州为咸平府,府治所在咸平县(大定七年改为平郭县,今辽宁省开原市),相当于今开原、铁岭、昌图等地。金朝末年,耶律留哥、蒲鲜万奴在此起兵。元朝为开元路的治所。元朝至正二年(1342年),降为咸平县,明朝改为开原城。
长官
咸平府尹兼本路兵马都总管
完顏晏(1150年)
李德固(1151年—115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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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颜承裕(1213年)
蒲鲜万奴(1214年—121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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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부는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이다.
금나라 천덕 2년(1150년)에 함주는 함평부로 승격되었고, 치소는 함평현에 있었고(대정 7년 평곽현으로 바뀌었고, 현재 요녕성 개원시에 해당된다), 지금의 개원, 철령, 창도 등이 이에 해당된다. 금나라 말기에 야율유가와 포선만노가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의 치소였다. 원나라 지정 2년(1342년)에 함평현으로 강등되었고, 명나라 때에는 개원성으로 개칭되었다.
장관
함평부윤겸 본로병마도총관
완완안(1150)
이덕고(1151-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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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승유(1213)
포선만노(12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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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년에 야율유가는 요(遼, 동요[東遼])를 세우고 1214년 함평(咸平, 지금의 개원시이다)에 도읍을 정하고는 이름은 중경(中京)이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야율유가에게 두 번이나 패한 포선만노가 1214년에서 1215년까지 금나라 함평부(咸平府)에서 지방장관으로 있었다고 한다.
위의 중국유기백과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1215년도는 이미 야율유가가 금나라 함평부(咸平府)를 점령해서 요(遼, 동요[東遼])의 중경(中京)으로 삼은 다음 해이다.
그런데 야율유가가 금나라 함평부(咸平府)를 장악한지 일년 후인 2015년도에 포선만노는 어떻게 함평부(咸平府)의 지방장관으로 재직할 수 있었을까?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함평부(咸平府)는 지금의 개원시(开原市)와 철령시(铁岭市) 그리고 창도현(昌图县)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야율유가와 포선만노가 이 지역을 양분하고 있었거나
포선만노는 이 시기 야율유가와 싸울 때 요동선무사(遼東宣撫使)였고 야율유가가 금나라 함평부(咸平府)를 점령한 것은 금나라의 입장에서는 반란군이 금나라 영토를 불법적으로 장악한 것이니
포선만노는 함평부(咸平府)의 지방장관이자 요동선무사(遼東宣撫使) 직위를 금나라에서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추정된다.
다만, 1215년 10월 포선만노는 대진국(大真國)을 세운 후 천왕(天王)을 칭한다.
즉, 포선만노도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포선만노의 금나라의 요동선무사(遼東宣撫使)라는 직책이나 함평부(咸平府) 장관은 1215년 10월 대진국(大真國)을 세우기 전까지였다고 본다.
아래는 개원시(开原市) 구글지도이다.
카이위안 시 · 중국 랴오닝 성 톄링 시
중국 랴오닝 성 톄링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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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개원시(开原市)가 야율유가가 세운 요(遼, 동요[東遼])의 중경(中京)이었다고 한다.
아래는 요양시(辽阳市) 구글지도이다.
랴오양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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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 봄 야율유가는 금나라 동경(현재 요양)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요나라와 금나라의 동경(東京)을 지금의 요양시(辽阳市)로 본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와 거란의 제 2차 전쟁 당시 거란의 동경(東京)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야율유가와 포선만노가 활동할 당시 금나라 동경(東京)은 어느 지역인지 잘 모르겠다.
즉, 야율유가가 1215년 함락한 금나라 동경(東京)은 지금의 요양시(辽阳市)일 수도 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 기재된 요하(遼河) 지도이다.
랴오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랴오허(중국어 간체자: 辽河, 정체자: 遼河, 병음: Liáo Hé)는 중국 동북부 남부의 주요 강이자 중국의 7대 주요 수계 중 하나이다. 그 이름은 남부 만주의 역사적 지명인 랴오 지역에서 유래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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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제 2차 전쟁 당시 거란의 동경(東京)은 이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금나라 말기 금나라 동경(東京)이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인 지금의 요양시(辽阳市)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래는 반금시(盘锦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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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와 거란이 제 2차전쟁을 벌이던 당시 거란의 동경(東京)은 지금의 반금시(盘锦市)에서 요하(遼河) 서쪽 지역과 금주시(锦州市) 안에서 동쪽 지역을 합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즉, 지금의 반금시(盘锦市)와 금주시(锦州市)의 경계를 중심으로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금주시(锦州市) 구글지도이다.
진저우 시 ·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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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와 거란이 제 2차전쟁을 벌이던 당시 거란의 동경(東京)은 지금의 반금시(盘锦市)에서 요하(遼河) 서쪽 지역과 금주시(锦州市) 안에서 동쪽 지역을 합한 지역이었다고 본다.
즉, 지금의 반금시(盘锦市)와 금주시(锦州市)의 경계를 중심으로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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