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왕순식(王順式)과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왕순식(王順式, 김순식)은 명주(溟州) 사람이다. 본주(本州, 명주)의 장군으로서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걱정하였다. 시랑(侍郞) 권열(權說)이 아뢰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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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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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順式, 溟州人. 爲本州將軍, 久不服, 太祖患之. 侍郞權說奏曰, “父而詔子, 兄而訓弟, 天理也. 順式父許越, 今爲僧在內院, 宜遣往諭之.” 太祖從之. 順式遂遣長子守元歸款, 賜姓王, 仍賜田宅. 又遣子長命, 以卒六百入宿衛, 後與子弟率其衆來朝, 賜姓王, 拜大匡. 長命, 賜名廉, 拜元甫, 小將官景, 亦賜姓王, 授大丞.
太祖討神劒, 順式自溟州, 率其兵會戰, 破之. 太祖謂順式曰, “朕夢見異僧, 領甲士三千而至, 翼日, 卿率兵來助, 是其應也.” 順式曰, “臣發溟州至大峴, 有異僧祠, 設祭以禱, 上所夢者, 必此也.” 太祖, 異之. 又有李悤言·堅金·尹瑄·興達·善弼·泰評等, 皆歸附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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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순식(王順式, 김순식)은 명주(溟州) 사람이다. 본주(本州, 명주)의 장군으로서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걱정하였다. 시랑(侍郞) 권열(權說)이 아뢰기를,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아우를 훈계하는 것은 천리(天理)입니다. 왕순식의 아버지 허월(許越)이 지금 승려가 되어 내원(內院)에 있습니다. 그를 보내어 가서 타이르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태조가 따랐다. 왕순식이 마침내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순 의사를 밝히니, 왕씨 성(姓)을 내렸고 토지와 집도 하사하였다. 또 아들 왕장명(王長命)에게 병사 600명을 거느리고 들어가서 숙위하게 하였다. 훗날 자제들과 함께 무리들을 인솔하여 내조(來朝)하자 왕씨 성을 내렸고, 대광(大匡)을 하사하였다. 왕장명에게는 렴(廉)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원보(元甫)에 임명하였다. 소장(小將) 관경(官景)에게도 왕씨 성을 하사하고, 대승(大丞)에 임명하였다.
태조가 신검(神劒)을 토벌할 적에 왕순식이 명주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에 합류하여 격파시켰다. 태조가 왕순식에게 말하기를, “짐이 꿈에서 갑사(甲士) 3,000명을 거느리고 온 이상한 승려를 만났다. 다음날 경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도와주었으니, 이는 그 감응이로다.”라고 하였다. 왕순식이 말하기를,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려의 사당이 있어 제사를 올리면서 기도드렸습니다. 주상께서 꿈을 꾸신 것은 반드시 이것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기이하게 여겼다. 또 이총언(李悤言)·견금(堅金)·윤선(尹瑄)·흥달(興達)·선필(善弼)·태평(泰評) 등도 모두 태조에게 귀부(歸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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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순식은 명주 사람이며 군사력을 가진 인물이고 고려에 귀부하지 않아 태조 왕건의 근심이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왕순식은 명주를 기반으로 한 군벌이라는 뜻이며, 고려에 귀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고려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또한
왕순식의 아버지는 고려의 내원(內院)에서 활동하는 승려(僧)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태조 왕건의 꿈과 왕순식이 승려를 만나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린 일화를 볼 때 왕건과 왕순식은 불교에 매우 심취한 인물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115년 01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이달에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은 흉노(匈奴)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고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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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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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其俗如匈奴, 諸部落無城郭, 分居山野. 無文字, 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 馬多駿, 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 及壯, 無不控弦走馬習戰, 爲勁兵. 諸部各相雄長, 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 南直我境, 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 以麩金·貂皮·良馬爲贄, 我朝亦厚遺銀幣, 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 烏雅束卒, 弟阿骨打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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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은 흉노(匈奴)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말[言語]과 노끈으로 매듭을 지은 것[結繩]으로 약속을 하였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이 풍부하고 준마(駿馬)가 많은데, 그 중에는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어려서는 활로 새나 쥐 등을 쏘아 잡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싸움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부락이 각자 우두머리라고 생각하는 탓에 〈부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지역은 서쪽으로는 거란(契丹)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우리 국경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내조(來朝)할 때마다 사금[麩金]·담비 가죽·좋은 말 등을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역시 은폐(銀幣)를 후하게 주었는데 해마다 항상 이렇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女眞)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平州)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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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高麗史)에는 고려 내에서 들리는 소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 출신이며 평주(平州) 승려 금준(今俊)이라는 소문이다.
그리고 금나라 시조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라는 인물의 후손이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라는 소문이다.
즉, 금준(今俊)은 금나라의 시조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김행(金幸)이나 김극수(金克守)는 금나라의 시조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금사(金史)에 기재된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에 해당되는 고려사(高麗史)의 인물은 금준(今俊)이다.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김극수(金克守)나 김행(金幸)이 아니다.
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왕순식, 금준, 김극수를 비교한 도표이다.
| 왕순식(王順式) | 금준(今俊) | 김극수(金克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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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주출신이다.
왕순식의 아버지는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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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주출신이다.
금준은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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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주출신이다.
김극수의 아버지는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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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금사(金史)에 기재된 금나라 황제 아골타의 조상과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김극수 집안의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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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 (고려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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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은 완안발해에 해당된다.
(완안발해의 할아버지는 완안함보[完顔函普]이고 아버지는 완안오로[完顔烏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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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수(김행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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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수는 완안수가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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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태사(김극수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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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태사는 완안석노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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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라태사(고을태사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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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라태사는 완안오고내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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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리발(활라태사의 장남)
영가(활라태사의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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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속(핵리발의 장남)
아골타(핵리발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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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김행은 고려 승려이고 김행에 해당되는 인물은 완안발해이다. 그리고 김행의 아들인 김극수에 해당되는 인물은 완안수가이다.
결국 위의 도표를 보면,
완완부의 지도자인 완안발해는 고려에서 김행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활동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이다.
金史/卷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湼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
zh.wikisource.org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원문과 번역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할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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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廼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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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왔다, 당시 나이는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내(阿古廼)는 불교를 좋아해서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후세의 후손들은 분명 모일 수 있겠지만 나는 갈 수 없다"며 고려를 떠나기를 거부했고 오직 동생 보활리(保活里)만 함께 갔다. 시조(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완안부족(完顏部) 복간수(僕幹水)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保活里)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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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왕순식, 금준, 김극수와 금사(金史)에 기재된 함보를 비교한 도표이다.
| 왕순식(王順式) | 금준(今俊) | 김극수(金克守) | 함보(函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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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주출신이다.
왕순식의 아버지 허월은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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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주출신이다.
금준은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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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평주출신이다.
김극수의 아버지 김행은 승려(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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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출신이다.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에 심취해 고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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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高麗史)의 왕순식(王順式) | 금사(金史)의 함보(函普) |
| 왕순식의 본래 성씨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왕순식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강릉김씨로 추정하거나 명주에서 활동하던 김씨로 추정하고 있다. 왕순식(본래 이름은 김순식으로 추정한다)은 후에 왕건에 의해 왕씨가 되었다. 왕순식의 아버지는 승려이다. |
고려 출신 함보의 성씨는 금사(金史)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찬자들은 금나라 국호가 신라김씨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다만 금사(金史)에서는 그런 내용을 주장하진 않는다.
함보는 완안부로 이주 후 왕씨(여진어 '왕', '왕기얀'의 한문표기가 '완안'이다)가 되었다.
함보의 형은 불교에 심취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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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가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여진족 내부에서 금나라 시조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실제 인물은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왕순식(王順式)이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는 실제 모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래는 청태종 홍타이지에 대한 위키백과 내용이다.
숭덕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음력 10월 25일) ~ 1643년 9월 21일(음력 8월 9일))는 후금의 제2대 칸이자, 청나라의 황제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만주어:
ko.wikipedia.org
아래는 위키백과 설명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따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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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e inenggi. han hendume. musei gurun-i gebu daci manju.
hada. ula. yehe. hoifa kai. tere-be ulhirakū niyalma jušen sembi.
jušen serengge sibei coo mergen-i hūncihin kai. tere muse-de ai dalji.
ereci julesi yaya niyalma muse gurun-i da manju sere gebu-be hūla.
jušen seme hūlaha-de weile.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이 날에 한(汗)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여진)이라 한다.
주션(여진)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여진)이 우리(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만주국)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여진)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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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종 홍타이지는 만주는 여진족이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진족과 만주는 처음부터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명나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청나라 자국 내의 사람들도 지칭한다고 본다)이 만주를 여진이라고 부른다고 유시(諭示)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滿洲源流考 卷一 卷二 →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30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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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유기백과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기재된 본문과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 출판)에 기재된 남주성 님의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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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朝得姓曰 愛新覺羅氏
國語謂金曰愛新 可為金源同派之証
盖我朝在大金時 未嘗非完顔氏之服屬
猶之完顔氏在今日 皆為我朝之臣僕
普天率土 統于一尊 理固如斯也
譬之漢 唐 宋 明之相代 豈皆非其勝國之臣僕乎
又有云我祖宗時 曽受明龍虎将軍封號 亦無足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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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왕조의 성은 애신각라(아이신기오로)씨이다.
국어로 금(金)은 애신(아이신)인데 금원(金源)과 같은 일파라는 증거이다.
대체로 우리 왕조(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씨)는 이전에
대금(大金) 때에 완안씨(完顔氏)에게 복속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안씨(完顔氏)가 지금은 모두 우리 왕조의 신하가 되었다.
하늘과 땅이 두루 한 분 지존에게 다스려지는 이치가 이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한, 당, 송, 명나라가 번갈아 대를 이을 때에
어찌 그 이긴 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우리의 선조는 일찍이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将軍)의 칭호를 받았다는 말이 있으나 이 또한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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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내용과 번역을 보면,
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씨와 금나라 황족 완안씨는 서로 주종관계가 뒤바뀐 다른 집안으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1635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가 자신들 만주는 여진족이 아니며 만주와 여진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유시(諭示)한 사실과
1777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예전엔 청나라 황족의 조상이 금나라 황제인 완안씨(한자 '완안[完顔]'은 여진어 '왕기얀'의 음차이고 뜻은 '왕'이기 때문에 '왕'씨로 해석한다)에게 복속된 신분이었지만, 지금은 금나라 황제의 후손인 완안씨가 청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고 밝힌 내용을 볼 때
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씨와 금나라 황족인 완안씨는 같은 집안이 아니다.
청나라 황족인 아이신기오로씨가 금나라 황족의 후예라면,
홍타이지는 칭기즈칸의 후손을 지칭하는 홍타이지가 될 수 없고 칭기즈칸 후손만이 자격이 있는 몽골의 대칸(복드칸)도 될 수가 없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내용이다. ( 777년 10월 )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HOI sg_009r_0040_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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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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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 伊飡周元爲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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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이찬 주원(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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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주원이 신라 시중이 되었다는 기사이다.
아래는 위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기사에 대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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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은 성은 김씨로서 혜공왕~선덕왕대에 활동한 고위 진골귀족 출신의 인물이다. 김주원은 강릉김씨 족보(『청구세보(靑丘世譜)』)에서 춘추(태종무열왕)의 셋째 아들 문왕[文汪(王)]의 직계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경덕왕대에 상대등을 역임한 사인(思仁)이며, 그의 아버지는 경덕왕대에 시중(侍中)을 역임한 유정(惟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제47 제계고8)에서 주원이 유정의 아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서나 『삼국유사』, 그리고 조선시대의 자료에 주원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 자료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 곤란할 듯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44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 “주원이 화(禍)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三陟)·근을어(斤乙於)·울진(蔚珍) 등 고을을 떼어서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에 대하여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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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이 태종무열왕 계열이라는 것은 강릉김씨 족보에 기재된 내용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리고 조선시대 자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한다.
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나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지고 명주의 속현인 삼척과 울진 등을 식읍으로 삼게 했다는 내용은 조선 때 작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재된 내용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시대 자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내용이다.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홀연히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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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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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㡬宣徳王崩, 國人欲奉周元為王將迎入宫. 家在川北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宫即位. 上宰之徒衆皆來附之, 拜賀新登之主, 是為元聖大王. 諱敬信金武, 盖厚夢之應也. 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時, 餘山已卒矣召其子孫賜爵. 王之孫有五人, 惠忠大子·憲平大子·禮英匝干·大龍夫人·小龍夫人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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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홀연히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상재(上宰)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그를 따랐으며, 새로 즉위한 왕께 경배하고 축하하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았던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가 살았다. 왕이 즉위하였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관작을 주었다. 왕에게는 다섯 명의 자손이 있었는데, 혜충태자(惠忠太子)·헌평태자(憲平太子)·예영 잡간(禮英匝干)·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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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이 명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명주에서 명주군왕(溟州郡王)이 되었다는 내용은 없다.
여진이 당나라 정관(貞觀) 때 이미 중국을 방문했고
즉, 고구려가 존재하던 때에도 고구려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고구려 멸망 이전인 정관 10년(貞觀十年, 대략 637년)에 말갈(흑수말갈로 해석된다)과 신라의 영토가 접했다면
여진은 고구려 후기나 말기엔 고구려가 통제 못하던 세력이었고 흑수말갈과 여진은 친(親)신라 세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말갈과 여진이 항상 친(親)신라 세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외교적으로 선택을 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여진의 본거지는 중국과 러시아 모두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부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 때처럼 고구려 때에도 파르티잔강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러시아 국경 부근과 지금의 북한국경 주변의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던 말갈부(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들은 고구려 멸망 전인 당나라 개원 때 흑수말갈이나 흑수부로 분류되던 우루부라고 본다)로 여진은 이주했거나 함께 연대하며 행동을 했을 수 있다.
여진과 말갈은 혈통적으로 같은 출신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때인 627년에서 649년에 고구려의 통제를 받지 않고 여진이 당나라를 방문했다는 것은 여진이 고구려의 통제 밖에서 독자적인 외교를 했다는 뜻이고 이들은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상대했을 수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명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왕순식은 강릉김씨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강릉김씨가 아니라고 해도 명주에서 활동하던 김씨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한다.
고려 때 왕순식의 영역인 명주는 고려 후기엔 강릉부로 명칭이 바뀐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의 강릉부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이 아니라고 본다.
고려사(高麗史)와 책부원구(册府元龜), 원일통지(元一統志) 등을 종합해 보면,
고려의 명주(고려의 강릉부)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지역이거나 지금의 북한국경과 가까운 러시아 연해주 남부의 어느 지역이라고 본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찬자들은,
지금의 길림성 일부가 진한(辰韓)이고 길림시를 계림(雞林)으로 본다.
또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찬자들은 신라가 탄생했다는 옥저의 위치를 청나라 때 와집(窩集)이 활동하던 지역인 지금의 백두산과 그 동쪽 두만강 외곽 일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지금의 북한 국경과 가까운 러시아 연해주 남부는 신라김씨에겐 원래 연고가 있는 지역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강릉김씨 시조의 릉이 현재 강릉에 있고 그에 대한 내용을 담은 비석이 강릉의 어느 절에 있다고 해도 조선 어느 시기에 이장을 했거나 비석을 옮겼을 거로 추정된다.
왕순식은 왕건의 성을 딴 것이고 그 이전의 성씨는 고려사(高麗史) 기록엔 없다.
다만 왕순식은 지금의 강릉을 기반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세력이었다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식하고 있다.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은 원래 신라의 왕으로 내정되었지만 권력싸움에 밀려 왕에서 밀리고 신라의 새로운 왕은 김주원에게 명주군왕(溟州郡王)을 봉하고 강릉을 그의 영역으로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러한 내용은 없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술된 내용이다. 대략 740여년이 지난 조선 성종 때에 쓰여진 내용이다. 따라서 그 내용을 완전히 신뢰하기엔 곤란하다)
속칭
권력싸움에 밀린 김주원에게 신라 원성왕(元聖王) 진영에서 "옛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를 했다는 내용인데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조선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견해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처럼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주원에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주고 명주군왕(溟州郡王)의 영역이 지금의 강릉이라고 해석하면 정치적으로 맞지가 않는 처분이다.
지금의 경주에서 멀지 않고 경주의 길목을 막을 수도 있는 강릉에다가 그의 정적을 보내고 그의 영역으로 준다는 것은 정치적인 상식으로 맞지가 않는 처분이다.
적어도 아무 실권도 없는 자리를 준 후에 서라벌 근처에 두고 원성왕(元聖王)과 그의 측근들이 김주원을 감시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먼 변방으로 보내서 허울뿐인 자리를 주어야 한다.
김주원의 영역은 강릉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울진, 삼척이라는 내용도 보이는데 그러면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의 영역은 매우 넓어서 신라왕의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된다.
그렇다면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워 신라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왕건이 삼국통일 전에 왕순식(강릉김씨이거나 명주에서 활동하던 김씨로 추정되는 인물이다)은 명주를 기반으로 왕건에게도 부담이 가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일리천 전투 때 왕순식은 마군 2만명[馬軍二萬]을 지휘했다).
그런데 만일 명주의 위치가 지금의 강릉이라면 왕순식은 신라김씨임을 내세워 자신의 영역에서 멀지 않은 신라를 왕건보다 먼저 공격하고 병합했을 것이다.
왕순식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신라의 기득권들이 신라의 존속을 명분으로 신라김씨로 추정되는 왕순식에게 왕위를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신라왕에게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책부원구(册府元龜) 등을 종합하고 정치적인 상식으로 볼 때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영역인 명주는 지금의 강릉이 아니라고 본다.
신라의 가장 변방인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곳이거나 그 부근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라고 본다.
책부원구(册府元龜)에 신라는 말갈과 접한다고 기재되어 있으니 말갈과 접한 변방인 명주로 김주원은 밀려난 것이고(신라김씨의 원래 연고이기도 하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강릉김씨들은 명주를 기반으로 말갈 내지는 여진의 세력들까지 흡수하며 그 지역에서 실질적인 왕이자 신라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후삼국시대까지 활동했다고 추정된다(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는 왕이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주원과 그 후손들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지역이거나 그와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의 어느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왕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왕순식이 북쪽에서 강력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태조 왕건은 후백제에 전력을 다 하지 못했다고 본다.
다만, 철륵이나 흑수를 통해 왕순식을 포위하는 형세는 취했다고 본다.
왕순식이 왕건에게 귀부한 후 일리천 전투가 되면 고려의 군사들은 갑자기 증가하는데 그동안 왕순식을 견제하느라 후백제와의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고려군사와 왕순식의 군사들까지 합세한 결과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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