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신라(新羅)가 탄생한 지역인 옥저(沃沮)는 어느 곳인가?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신라(新羅)가 탄생한 지역인 옥저(沃沮)는 어느 곳인가?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8. 31. 20:50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4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4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30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port Parsed by mw‐web.eqiad.main‐595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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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三國志魏書辰韓〈另條見前〉十二國有斯盧國
通典新羅國魏時新盧國其先本辰韓辰韓始有六國稍分為十二新羅其一也魏将毌丘儉討髙麗破之髙麗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
通考新羅國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髙麗東南兼有漢時樂浪郡之地〉初曰新盧或曰新羅東濵大海魏毌丘儉破髙麗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故其人雜有華夏髙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入新羅遂王其國
'삼국지 위서': 진한(앞의 다른 조 참조)은 12개국으로 사로국이 있다.
'통전': 신라국은 위나라 때에는 신로국으로서 그 선조는 본래 진한이다. 진한은 처음에 6개 국이었으나 점차 나누어져서 12개 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서 깨뜨리자 고구려 왕은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옥저에] 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통고': 신라국은 백제의 동남쪽 5백여 리에 있다. (또한 고구려 동남쪽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신로 또는 신라로 불렀다. 동쪽은 대해의 바닷가이다. 위의 관구검이 고려(고구려)를 쳐부수자 [왕이] 옥저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옥저에] 남은 사람들은 신라가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화하,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으며, 옥저, 불내, 한, 예,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서 바다로부터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 왕이 되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통전(通典)과 통고(通考)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왕(동천왕)이 옥저(남옥저로 추정)로 피난을 갔고 그 옥저(남옥저로 추정) 땅에 남은 고구려인들로 인해 신라가 탄생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내용을 도표로 작성하면 아래와 같다.

통전(通典)과 통고(通考)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新羅)는 위나라 때(魏時) 신로(新盧)로 불렸다.
신라(新羅)의 선조는 진한(辰韓)이다.
신라(新羅)는 고구려 왕이 옥저(沃沮)로 피난간 후에 옥저(沃沮) 땅에 남은 고구려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라벌(徐羅伐)은 기원전 69년도에 시작되었다.
서라벌(徐羅伐)은 진한(辰韓) 6부의 촌장이 박혁거세를 추대하며 시작했다.
기원후 246년에 고구려 동천왕이 남옥저(南沃沮) 피난을 갔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된 서라벌(徐羅伐)과 중국의 통전(通典)과 통고(通考)에 기록된 신라(新羅)는 서로 다른 나라라고 본다.

다만 지역적으로 서라벌(徐羅伐)과 신라(新羅)는 진한(辰韓)으로 분류된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 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諸史又云新羅始保沃沮考後漢書魏志通考俱有東沃沮南沃沮北沃沮之文無大君長邑落各自有帥而其地或在挹婁〈另條見前〉夫餘之南或在挹婁之北或屬元菟或屬樂浪或屬句驪東濵海而南接濊所載皆朝鮮句驪及漢樂浪諸郡事則沃沮者應即今之窩集盛京邊外東南北諸處在在有之
新羅所保據毌丘儉傳在肅慎〈另條見前〉界南千餘里則當在吉林烏拉之南近長白山殆納沁庫魯訥納魯諸窩集之地歟王本百濟人金姓隋初已三十餘世唐武徳至會昌又十八世五代以後史弗能詳至其山林盤互法令修明道不拾遺人嫻書射史稱君子之國不虚也若休忍躭羅諸國並為新羅所併其遺迹皆在今朝鮮南界云
또 여러 사서에서 "신라는 처음에 옥저를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후한서', '위지', '통고'를 살펴보면 모두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의 기록이 있는바, 대군장은 없고 읍락에 각각 수(帥, 장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 지역이 혹은 읍루(앞의 다른 조 참조)와 부여의 남쪽에 있다고 하고, 혹은 읍루의 북쪽에 있다고 하거나, 혹은 현도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낙랑에 속한다고 하고, 혹은 구리에 속한다고 하였다. 동쪽으로 바다와 닿았고, 남쪽으로 예와 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두 조선과 구리 및 한의 낙랑 여러 군의 사실이 실려 있다. 곧 옥저는 당연히 오늘의 와집으로서 성경의 변두리 바깥쪽 동남북의 어디에나 이런 곳이 있다.
신라가 차지한 곳은 '관구검전'에 따르면 숙신(앞의 다른 조 참조) 경계에서 남쪽 천여리이므로, 당연히 길림오라의 남쪽으로 장백산에 가까우며 아마도 납심, 고로눌, 납로의 여러 와집의 지역이 아니겠는가?
신라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성이 김씨이다. 수나라 초에 이미 삼십여 대를 전하여 왔다. 당 무덕 연간에서 회창 연간에 이르기까지 또 18대를 이었다. 오대 이후에는 사서에서 상세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나라 산림은 서로 잇달아 있다. 법령이 엄정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글과 활쏘기를 즐겨 익히므로 사서에서는 군자의 나라로 불렸으니 헛된 말이 아니다. 휴인과 탐라의 여러 나라가 함께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니, 그 유적이 모두 오늘날 조선의 남쪽에 남아 있다.
나라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인 한림원 학자들이 신라에 대해 중국의 사서를 보고 내린 결론이다.

 

신라가 탄생한 옥저 땅은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에서 동남쪽 방향 변두리이며(沃沮者應即今之窩集盛京邊外東南北諸處在在有),

청나라 때의 길림오랍(吉林烏拉,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 남쪽 장백산(백두산)에 가깝고(則當在吉林烏拉之南近長白山),

청나라 때 그 주변에 사는 와집(오자야인의 후예)이 거주하는 지역(殆納沁庫魯訥納魯諸窩集之地歟)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청나라 때 장백산(백두산)에서 동쪽의 두만강 북부에 거주하는 와집(조선에선 올적합으로 칭한다)의 거주지라고 보는 것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한 경흥촌, 용정시, 연길시, 훈춘시 등이 이에 속하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도 이에 속한다.

 

또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인 한림원 학자들은,

계림은 길림성 길림시에 있었고 신라는 백두산과 두만강 주변에 있었다고 봄으로서 계림과 신라는 서로 다른 지역에 존재한 것으로 본다.

 

 개인적인 견해론,

후에 지금의 경상도 경주로 신라와 계림의 중심지가 이주했다고 해도 두만강 바깥은 완전히 고구려가 장악하진 못했다고 본다.

즉,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지역과 러시아 하산스키 군은 고구려와 신라가 여진을 포함한 말갈과 서로 합종연횡하던 분쟁지역이었다고 본다.

 

 

관구검 기공비(毋丘儉 紀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이다.

 

관구검 기공비(毋丘儉 紀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아래는 관구검 기공비(毋丘儉 紀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 일부이다.

정의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판석령(板石嶺)에서 발견된 위나라 장수 관구검 관련 전공비.
내용
244년(동천왕 18) 8월에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國內城)을 점령하고 245년에는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 등이 다시 침공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관구검은 전공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위의 내용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재된 내용을 볼 때 이 관구검 기공비(毋丘儉 紀功碑)가 발견된 곳은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일 가능성이 높다.

아래는 집안시(集安市) 구글지도이다. 

 

지안 시 · 중국 지린 성 퉁화 시

중국 지린 성 퉁화 시

www.google.co.kr

관구검 기공비(毋丘儉 紀功碑)가 발견된 곳은 집안시 판석령(集安市 板石嶺)이라고 한다.

대략 이 지역이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동천왕은 이곳에서 남옥저로 피난을 간 것이다.

나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찬자인 한림원 학자들은 동천왕이 피난을 간 곳이 지금의 두만강 주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보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구글지도이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 · 중국 지린 성

중국 지린 성

www.google.co.kr

고구려 동천왕이 피난을 간 남옥저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두만강과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나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저자인 한림원 학자들은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견해처럼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은 아니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高麗史) 제신 윤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윤관(尹瓘)이 또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쓰게 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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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高麗史) 제신 윤관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 世脩貢職, 被我祖宗恩澤深矣.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

윤관이 지금의 해란강(海兰江) 북쪽과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번(東蕃)과 여진(女眞) 정벌한 후 밝힌 내용이다.

여진은 고구려 때부터 개마산 동쪽(盖馬山東)에 모여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 내용이다.

 

옥저의 위치와 변천 < 사료로 본 한국사

근대 신재호이홍구 곽금선, 김기성, 김명섭, 김명재, 김명환, 김상훈, 김소영, 김영진, 김헌주, 남기현, 류동연, 박순섭, 박주영, 박한민, 성주현, 송영화, 심철기, 양진아, 이성우, 이양희,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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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의 본문과 번역이다.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방향은 좁고 서남 방향은 길어서 천 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아 있다. 호수(戶數)는 5,000호(戶)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고 기재하고 있다.

윤관이 지금의 해란강(海兰江) 북쪽과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는 동번(東蕃)과 동여진(東女眞)을 지칭할 때 고구려 때 개마산(蓋馬山) 동쪽에 모여 살던 세력이라고 지칭했는데 위치와 방향이 비슷하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옥저와 여진은 본래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에 거주하던 세력이지만 위만조선 멸망 후 위만조선 유민들처럼 요하(遼河)를 건너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두만강 부근과 연해주 남부로 이주해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내용이다. ( 246년 10월 )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20년(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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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본문과 번역이다.

冬十月, 儉攻䧟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宻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决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衞, 謂曰, “若有能取宻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徃焉.” 遂於戰地, 見宻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牲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 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濵,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㓛, 以宻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青木谷, 賜屋句 鴨渌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壊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括地志云, “不耐城即國内城也. 城累石爲之.” 此即丸都山與國内城相接. 梁書以, “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以, “得來諌王, 爲王位宫時事.” 誤也..
〔20년(246)〕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 안을 도륙하였으며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홀로 옆을 지키고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결사대[死士]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진으로 가서 힘껏 싸웠다. 왕이 샛길로 달아나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 “밀우를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하게 상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하부(下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가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진 곳에 밀우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업고 돌아왔다. 왕이 그를 무릎에 눕혔더니 한참 만에 깨어났다.
왕이 샛길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옥저에 이르렀으나 위군(魏軍)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이 계책이 궁하고 기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서서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대접하면서 틈을 엿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힘껏 공격하여 반드시 승리를 거두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유유가 위군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寡君]이 큰 나라에 죄를 얻고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사구(司寇)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부하들의 음식 거리나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魏)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군이 마침내 혼란해졌다. 왕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빠르게 이들을 공격하니, 위군이 어지러워져서 싸우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樂浪)에서(삼국사기 기록인 것을 볼 때 실제 낙랑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창려가 아니라 지금의 요동에 위치한 환인만주족자치현이거나 요동의 어느 지역을 가리킨다고 본다) 퇴각하였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第一)로 삼았다. 밀우에게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 압록두눌하원(鴨淥杜訥河原)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 했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이 싸움에서 위(魏)의 장수가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을 새기고 돌아갔다.
처음에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이 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고 마침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무덤을 허물지 말고, 〔무덤 주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자식을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서 보내주었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다. 성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즉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가까이 접하였을 것이다. 『양서(梁書)』에는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였는데 관구검이 침략해왔다.”라고 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시정을 건의한 것은 왕 위궁(位宮) 때의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한 위의 삼국사기(三國史記) 해설의 일부이다.

...『삼국지』 권28 위서28 관구검전에는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가 왕기의 추격을 받고 옥저에서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 남쪽 경계에까지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동옥저전에 “궁(宮: 동천왕)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 하고 남옥저(南沃沮)로부터 8백여 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를 해석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숙신의 남쪽 경계에서 남쪽으로 1000리(약 400km) 떨어진 곳인 옥저는 남옥저를 가리키며

북옥저에서 남옥저까지는 남쪽 방향으로 800리(약 320km)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滿洲源流考 卷一 卷二 →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30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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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1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後漢書
夫餘國在元菟北千里
地方二千里㝡為平敞以員柵為城有宫室倉庫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狗加其邑落皆主屬諸加
<후한서>
부여국은 현도에서 북쪽으로 천 리 떨어져 있고
, 그 국토는 사방 이천 리로 매우 평탄하고 넓다. 주위에 목책을 세워서 성을 만들었다. 성 안에는 궁실과 창고가 있었다. 육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지었는데 마가, 우가, 구가가 있고, 그 도시와 마을은 모두 제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後漢書
古肅慎國在夫餘東北千餘里東濵大海
<후한서>
옛 숙신국은 부여국에서 동북쪽 쳔여 리에 있다. 동쪽은 대해이다.

고구려현(高句驪縣)이 속한 현도군(玄菟郡)에서 북쪽으로 1천리(약 400km)에 부여가 있고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약 400km)가 떨어진 곳이 숙신이라고 한다.

수화시 경안현(绥化市 庆安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칭안 현 · 중국 헤이룽장 성 쑤이화 시

중국 헤이룽장 성 쑤이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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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에 기재된 내용을 바탕으로 부여와의 거리와 숙신과의 거리를 계산하면 대략 지금의 수화시 경안현(绥化市 庆安县)이 옛 숙신의 땅이다.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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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을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어느 산(山)으로 지정한 후,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 기재된 내용에 따라 그 지역에서 북쪽으로 1천리(약 400km) 거리를 계산하면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이 등장한다.

이 지역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해당된다고 해석된다.

후한서(後漢書)를 보고 계산한 숙신 지역인 수화시 경안현(绥化市 庆安县)

나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편찬자인 한림원 학자들이 옛 신라가 탄생한 옥저로 추정되는 지역으로부터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의 내용을 참고하여 계산한 숙신의 남쪽 경계인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은 지역적으로 서로 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숙신의 중심지는 대략 지금의 수화시 경안현(绥化市 庆安县)이며, 숙신의 남쪽 경계는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이고,

신라가 탄생한 남옥저의 위치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서 동쪽에 해당되는 지역과 동녕현으로부터 두만강 바깥까지에 해당되는 지역인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내용이다.

 

삼국유사 < 한국 고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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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본문과 번이다.

新羅第二十七善徳王即位五年, 貞觀十年丙申慈藏法師西學, 乃於五䑓感文殊授法.詳見本傳.文殊又云, “汝國王是天笁刹利種王, 預受佛記故别有因縁,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故, 人性麁悖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萬庻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泣血而退. 経由中國太和池邉,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藏荅曰, “求菩提故.” 神人禮拜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䴡 濟二國迭犯封陲, 隣冦縱橫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有徳而無威. 故隣國謀之. 冝速歸本國.” 藏問, “歸郷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是吾長子, 受梵王之命來護是寺, 歸本國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㑹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於亰畿南岸置一精廬共資予福, 予亦報之徳矣.” 言已遂奉王而獻之, 忽隱不現.寺中記云, 於終南山圎香禪師処, 受建塔因由.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貞觀)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곧 오대에서 문수보살이 불법을 주는 것을 감응하여 얻었다.자세한 것은 본전에 보인다. 문수가 또 말하기를 “너희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刹利種)왕으로 미리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어서 군신이 평안하고 백성이 화평하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이 변화한 것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났다.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근처를 지나칠 때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물었다. “어찌 이에 이르게 되었는가?” 자장이 답하여 말하기를 “보리(菩提)를 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인이 예를 갖춰 절하고 또 묻기를 “너희 나라는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靺鞨)을 연하고 남쪽으로 왜국을 접하고 있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꾀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자장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장차 무엇이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에 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9층탑을 조성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 탑을 건립한 후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곧 외적이 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해안에 정려(精廬) 하나를 세워 함께 나의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드디어 옥을 받들어 바치고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의 거처에서 건탑의 이유를 받았다고 한다.

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사를 보면 정관 10년(貞觀十年, 대략 637년) 때 사건임을 볼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연결되어 있다(我國北連靺鞨)고 기재하고 있다.

 

즉, 고구려 멸망 전에도 신라는 두만강 바깥에 거주하던 말갈(내 개인적인 견해론 여기서 말갈은 흑수말갈이라고 해석되며 이 흑수말갈 중에는 여진도 속해있었다고 본다)과 서로 접했다고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