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함주(咸州),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해란강(海蘭江)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함주(咸州),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해란강(海蘭江)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8. 24. 11:08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1068년 07월 27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정유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아뢰기를, “판관(判官) 임희열(任希悅),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배행지(裴行之),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 석수규(石秀珪) 등이 또 초도(椒島)를 순시하다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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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1068년 07월 27일 (음))

丁酉 東界兵馬使奏, “判官任希悅, 都部署副使裴行之, 元興鎭副使石秀珪等, 又巡椒島, 夜至閻羅浦, 遇賊船八艘, 擊破三艘. 餘賊登岸奔潰, 追斬三十餘級.”...
정유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아뢰기를, “판관(判官) 임희열(任希悅),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배행지(裴行之),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 석수규(石秀珪) 등이 또 초도(椒島)를 순시하다가, 밤에 염라포(閻羅浦)에 이르러 적의 배 8척과 마주쳐 그 중 3척을 격파하였습니다. 남은 적이 해안에 상륙하여 흩어져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습니다.”....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가 적의 배(賊船)와 싸운 것을 보면 원흥진(元興鎭)은 바닷가 주변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동계병마사(東界兵馬使)가 원흥진부사(元興鎭副使)의 전과(戰果)를 보고하는 것을 보면 원흥진(元興鎭)은 동계(東界)에 속함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이다. (1073년 06월 24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병신 병마사(兵馬使)가 아뢰기를, “동번(東蕃)의 해적(海賊)이 동경(東京) 관할의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범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였으므로, 원흥진도부서(元興鎭都部署)의 군장(軍將)들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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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1073년 06월 24일 (음))

丙申 兵馬使奏, “東蕃海賊, 寇東京轄下波潛部曲, 奪掠民口, 元興鎭都部署軍將, 率戰艦數十艘, 出椒島與戰, 斬十二級, 奪俘十六人.”
병신 병마사(兵馬使)가 아뢰기를, “동번(東蕃)의 해적(海賊)이 동경(東京) 관할의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범하여 백성들을 약탈하였으므로, 원흥진도부서(元興鎭都部署)의 군장(軍將)들이 전함(戰艦)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椒島)에 나아가 싸워서, 12급(級)을 베고 포로(捕虜)된 16인을 빼앗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번(東蕃)은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는 여진족에게 흡수된 흑수부 계열의 세력이라고 본다.

동경(東京) 관할의 파잠부곡이 동번(東蕃)에게 침범을 받자 동계(東界)에 속한 원흥진도부서(元興鎭都部署)가 동번(東蕃)을 바다에서 격퇴한 것을 보면 고려 동경(東京)은 고려 동계(東界)에 속했다고 본다.

지역적으로 고려 서북계(西北界)에 서경(西京)이 있듯이 고려 동계(東界)에 고려 동경(東京)이 있음은 상식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원흥(元興)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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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원흥(元興)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元興鎭, 東北面和寧府屬邑, 濱于大海. 邑人船商而還, 其妻悅而歌之.
원흥진(元興鎭)은 동북면(東北面) 화령부(和寧府)의 속읍(屬邑)으로 큰 바다에 가깝다. 읍 사람들이 배를 타고 장사하러 갔다가 돌아오니, 그 아내들이 기뻐하여 이를 노래하였다.

원흥진(元興鎭)은 동북면(東北面) 화령부(和寧府)의 속읍(屬邑)(元興鎭, 東北面和寧府屬邑)이라고 한다.

원흥진(元興鎭)은 화령부(和寧府)에 속하고 화령부(和寧府)는 동북면(東北面)

즉, 동계(東界)에 속함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화주(和州)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화주(和州)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혹은 장령진(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당문(唐文)이라 불렀고【당(唐)은 당(堂)으로도 쓴다.】,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화주(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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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和州本高句麗之地, 或稱長嶺鎭, 或稱唐文【唐一作堂】, 或稱博平郡, 高麗初, 爲和州. 成宗十四年, 改和州安邊都護府. 顯宗九年, 降爲和州防禦使, 爲本營. 高宗時, 沒于蒙古, 爲雙城摠管府. 州因合于登州, 猶稱防禦使. 後倂于通州. 忠烈王時, 復舊. 恭愍王五年, 出師收復, 爲和州牧. 十八年, 陞爲和寧府, 設土官. 有橫江.
화주(和州)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혹은 장령진(長嶺鎭)이라 불렀고, 혹은 당문(唐文)이라 불렀고【당(唐)은 당(堂)으로도 쓴다.】,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불렀는데, 고려 초에 화주(和州)라고 하였다. 성종 14년(995)에 화주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시키고(명주[溟州] 역시 1260년 이전 방어사[防禦使]라고 불렸었다. 명주는 말갈과 가깝다고 한다)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고종 때에 몽고(蒙古)에 편입되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되었다. 화주가 이로 인해 등주(登州)에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방어사로 불렀다. 뒤에 통주(通州)에 합병되었다. 충렬왕 때에 복구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다. 〈공민왕〉18년(1369)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키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횡강(橫江)이 있다.

화주(和州)는 시대의 순서에 따라 아래와 같이 명칭이 바뀐다.

화주(和州) =>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 화령부(和寧府)

흥진(元興鎭)이 화령부(和寧府)의 속읍이라는 것은 원흥진(元興鎭)이 화주(和州)의 속읍이라는 뜻이다.

 

즉, 바닷가에 있고 고려 동경(東京)을 보호하는 군사기지가 있는 원흥진(元興鎭)이 동계(東界)에 속한 화주(和州)의 속읍이라는 것은 고려 화주(和州)와 고려 동경(東京)이 멀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조선학자들의 견해가 들어간 고려사(高麗史)와 우리나라의 주류 견해처럼,

고려 동경(東京)이 경상북도 경주이고 고려 화주(和州)가 함경남도 금야라면 위의 고려사(高麗史) 내용과는 지역적으로 맞지 않는다.

 

나는 고려 동경(東京)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이고 고려 화주(和州)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해란강(海蘭江, 海兰江) 남쪽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동계(東界)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정종 2년(1036)에 동계(東界)【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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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東界本高句麗舊地, 成宗十四年, 分境內, 爲十道, 以和州·溟州等郡縣, 爲朔方道. 靖宗二年, 稱東界【與北界, 爲兩界】, 文宗元年, 稱東北面【或稱東面·東路·東北路·東北界】. 後咸州迆北, 沒於東女眞. 睿宗二年, 以平章事尹瓘, 爲元帥, 知樞密院事吳延寵, 副之, 率兵擊逐女眞, 置九城, 立碑于公嶮鎭之先春嶺, 以爲界. 至明宗八年, 稱沿海溟州道.
高宗四十五年, 蒙古兵來侵, 龍津縣人趙暉·定州人卓靑, 叛殺兵馬使愼執平, 以和州迆北, 附于蒙古. 蒙古乃置雙城惣管府于和州, 以暉爲摠管, 靑爲千戶, 以治之. 四十六年, 以忠淸道之寧越·平昌, 來隷, 後還其道. 元宗四年, 稱江陵道. 忠烈王十六年, 以寧越·平昌, 復來屬.
恭愍王五年, 稱江陵朔方道. 七月, 遣樞密院副使柳仁雨, 攻破雙城. 於是, 按地圖, 收復和·登·定·長·預·高·文·宜州, 及宣德·元興·寧仁·耀德·靜邊等鎭諸城. 前此, 朔方道, 以都連浦爲界, 築長城, 置定州·宣德·元興三關門, 沒于元, 凡九十九年. 至是, 始復之. 以壽春君李壽山, 爲都巡問使, 定疆域, 復號東北面. 九年, 稱朔方江陵道.
以此考之, 鐵嶺以北爲朔方道, 以南爲江陵道. 高麗時, 或稱朔方道, 或稱江陵道, 或合爲朔方江陵道, 或稱爲江陵朔方道, 又或稱沿海溟州道. 一分一合, 雖沿革稱號不同, 然自高麗初, 至于末年, 公嶮迆南, 三陟迆北, 通謂之東界云. 領都護府一, 防禦郡九, 鎭十, 縣二十五. 睿宗朝所置, 大都護府一, 防禦郡四, 鎭六. 恭愍王以後所置, 府二.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정종 2년(1036)에 동계(東界)【북계(北界)와 더불어 양계(兩界)라 하였다.】라 불렀고, 문종 원년(1047)에 동북면(東北面)【혹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고도 불렀다.】이라 불렀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되었다. 예종 2년(1107)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명종 8년(1178)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
고종 45년(1258)에 몽고(蒙古) 병사가 침입하자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란을 일으켜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몽고는 이내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를 설치하였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고종〉46년(1259)에 충청도의 영월(寧越)·평창(平昌)을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충청도로 되돌렸다. 원종 4년(1263)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 충렬왕 16년(1390)에 영월·평창을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공민왕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다. 7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地圖)를 순찰하여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의 여러 성(城)을 수복하였다. 이전에 삭방도는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정주·선덕진·원흥진에 설치한 세 관문(關門)이 원나라에 편입된 지 99년이 되었다. 이때에 비로소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강역(疆域)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다. 〈공민왕〉9년(1360)에는 삭방강릉도라 불렀다.
이로써 살펴보면, 철령(鐵嶺)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고려 때에 혹 삭방도, 혹 강릉도, 혹 합쳐서 삭방강릉도, 혹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렀다. 한 번 나누고 한 번 합침에 따라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관할하는 도호부(都護府)가 1개, 방어군(防禦郡)이 9개, 진(鎭)이 10개, 현(縣)이 25개이다. 예종 때에 설치한 것이 대도호부(大都護府) 1개, 방어군(防禦郡) 4개, 진(鎭) 6개이다. 공민왕 이후로 둔 것이 부(府) 2개이다.

아래는 위의 내용을 도표로 정리한 후 내 개인적인 의견을 밝힌 것이다. 보라색 글씨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成宗十四年, 分境內, 爲十道, 以和州·溟州等郡縣, 爲朔方道)
명주(溟州)는 말갈과 닿아 있다(太宗王五年, 以地連靺鞨)고 하고, 화주(和州)와 명주(溟州) 모두 고려 때 방어사(防禦使)로 불렸으며, 이 두 지역을 포함한 행정구역이 삭방도(朔方道)이면 화주(和州)와 명주(溟州)는 모두 두만강 주변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되었다(咸州迆北, 沒於東女眞)
여진에게 돌려주고 금나라 영토가 되는 동북9성은 가장 남쪽이 함주(원나라 때 합란부)이다. 동진국 남경(東眞國 南京)의 남쪽에 해란부(고려 함주)가 있었다고 원일통지(元一統志)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동진국 남경(東眞國 南京)의 위치를 알면 고려 함주(咸州)도 대략 알 수 있다.
고려 화주(和州)는 동북9성에 포함되지 않아 동북9성 반환 이후와 금나라 때에도 고려 영토였다.
즉, 동북9성 및 금나라 바로 남쪽에 고려 화주(和州)가 위치한다.
명종 8년(1178)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至明宗八年, 稱沿海溟州道)
동북9성을 여진에게 돌려준 후 이 지역이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불렸으면 화주(和州)처럼 명주(溟州) 역시 고려의 영토였고 금나라 바로 남쪽에 위치한 고려 영토였다고 추정된다.
신라 태종무열왕 5년 시기 명주(溟州)는 말갈과 닿아 있다(太宗王五年, 以地連靺鞨)고 기록되어 있고, 금나라는 여러 말갈부들을 병합해서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몽고는 이내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를 설치하였다(和州迆北, 附于蒙古. 蒙古乃置雙城惣管府于和州)
화주(和州)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된다. 따라서 고려의 동계(東界) 국경은 금나라 때보다 약간 더 내려 왔다. 함주(咸州) 남쪽에 화주(和州)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7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地圖)를 순찰하여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의 여러 성(城)을 수복하였다(七月, 遣樞密院副使柳仁雨, 攻破雙城. 於是, 按地圖, 收復和·登·定·長·預·高·文·宜州, 及宣德·元興·寧仁·耀德·靜邊等鎭諸城)
위에 열거된 고려가 몽골로부터 수복한 영토 중에 옛 동북9성과 겹치는 지역은 없다. 다만 옛 동북9성 및 금나라 영토에 속했던 함주(咸州)는 원나라 합란부(哈蘭府)가 되기 때문에 위의 고려사(高麗史)에는 열거되지는 않았지만 고려가 수복한 영토 중엔 동북9성과 겹치는 지역이 있다.
다만 화주(和州) 이북 땅이 몽골에게 잃었다가 되찾은 땅이기 때문에 몽골에게 잃은 땅은 화주(和州)와 같은 위도(緯度)이거나 화주(和州)보다 북쪽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13 본문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원나라의 지리서인 원일통지(元一統志)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3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30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port Parsed by mw‐web.codfw.main‐866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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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元一統志
自南京而南曰海蘭府又南曰雙城直抵於髙麗之王京(按渤海南京在海州遼南京在遼陽此所云南京而南或僅指海蘭府冶所然亦當在東而非南也雙城亦非遼之雙城縣)
원일통지
남경(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도문시)의 남쪽을 해란부(원나라의 합란부, 고려의 함주이다)라 하고, 또 그 남쪽을 쌍성(쌍성총관부, 고려 화주)이라 하는데, 곧바로 고려의 왕경(고려 동경으로 해석된다)과 닿는다.(살펴보건대, 발해의 남경은 해주이고 요나라 남경은 요양에 있다. 여기에서 남경의 남쪽이라 한 것은 혹 겨우 해란부의 치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당연히 동쪽이지 남쪽이 아니다. 쌍성 또한 요나라 쌍성현이 아니다)

남경(지금의 연길시, 도문시) 남쪽에 해란부(고려 함주)가 있고 다시 그 남쪽에 쌍성(雙城, 쌍성총관부, 고려 화주이다)이 있으며 그 곳은 고려의 왕경(髙麗之王京, 고려 동경)과 닿아 있다(自南京而南曰海蘭府又南曰雙城直抵於髙麗之王京)고 한다.

아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마반촌(图们市 磨盘村) 구글지도이다.

 

Mopan Village ·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투먼 시 邮政编码: 133001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투먼 시 邮政编码: 133001

www.google.com

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마반촌은 옛 동진국(東眞國) 남경(南京)에 해당된다고 한다.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 지칭한 남경(南京)은 이 지역을 포함한다.

 

 

해란강(海兰江) 즉, 옛 합란하(合兰河) 구글지도이다.

 

Hailan River ·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 시 邮政编码: 133400

www.google.co.kr

동진국 남경(東眞國 南京)으로 추정되는 위의 도문시 마반촌보다 남쪽에 해란강(海兰江 [hăilánjiāng])이 있다.

남경(동진국 남경[東眞國 南京])의 남쪽에 원나라 합란부(哈蘭府 [hālánfǔ])이자 고려의 함주(咸州)가 있다고 원일통지(元一統志)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위의 지도를 검토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원나라 합란부(哈蘭府 [hālánfǔ])이자 고려의 함주(咸州)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 연길시에 있었고,

아마도 연변조선족자치 연길시를 흐르는 해란강(海兰江 [hăilánjiāng])의 북쪽에 해란부(海蘭府 [hăilánfǔ], 고려 함주)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해란강(海兰江 [hăilánjiāng])의 남쪽에는 쌍성총관부(고려 화주)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해란강(海蘭江, 海兰江)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내용이다.

 

海兰江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海兰江 中国东北地区境内与邻国朝鲜交界的一条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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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해란강(海蘭江, 海兰江)에 대한 중국유기백과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海兰江(中国朝鲜语:해란강/海蘭江),位于中华人民共和国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境内,是布尔哈通河右岸支流,辽、金称曷懒水,明代称合兰河,清代称海兰河、骇浪河,河名源自满语(满文:ᡥᠠᡳᠯᠠᠨ,转写:hailan),意为“榆树”。[來源請求]
해란강(중국어와 한국어: 해란강/海蘭江)은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하며, 포이합통하의 우안 지류이다. 요나라와 금나라 때에는 할라수(曷懒水), 명나라 시대에는 합란하(合蘭河, 合兰河), 청나라 시대에는 해란하(海蘭河, 海兰河), 해랑하로 불렸다. 이 강의 이름은 만주어(만주어: ᡥᠠᡳᠯᠠᠨ, 음역: hailan)에서 유래했으며, "느릅나무"를 의미한다. [다만 느릅나무를 의미한다는 내용은 출처가 불명확해서 정확한지는 모른다]

해란강(海江)의 해란(海)은 청나라의 음차표기이고 금나라에선 할라(曷懒), 원나라에선 합란(哈蘭), 명나라에선 합란(合蘭)으로 표기되어있다.

아래는 할라전(曷懶甸)이나 합란부(哈蘭府), 합란(合蘭), 해란부(海蘭府) 등에 등장하는 공통된 발음의 비교 도표이다.

금사의 표기
曷懶, (hélǎn), 할라(갈라)
고려사의 표기
哈蘭, (hālán), 합란
명나라 지도의 표기
合蘭, (hélán), 합란
청나라 서적의 표기
海蘭, (hăilán), 해란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러한 시대별 한자표기의 변화는 금나라 때 음차표기인 할라(曷懒)의 시대별 음차표기의 변화라고 본다.

아래는 발해의 동경(渤海 東京)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훈춘시 팔련성(珲春市 八連城)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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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珲春市 八連城)에 발해의 동경(渤海 東京)이 있었다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학자들은 추정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珲春市 八連城)은 발해의 동경(渤海 東京)이 위치한 곳이었으며 고려의 동경(高麗 東京)이 위치한 곳이었다고 본다.

고려 화주(和州)로 추정되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해란강(海蘭江, 海兰江) 남쪽 지역과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은 서로 멀지 않으며,

화주(和州)의 속현인 원흥진(元興鎭)에서 고려 동경(高麗 東京) 관할의 부곡에 침범한 동번 해적(東蕃海賊)을 격퇴하기 위해 전함(戰艦)을 출동시킨 1073년 6월 24일 고려사(高麗史)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