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東女)과 동번(東蕃) 2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여진(東女)과 동번(東蕃) 2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8. 16. 17:55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이다. 948년 09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무신〉 3년(948)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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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이다.

(戊申)三年 秋九月 東女眞大匡蘇無盖等來, 獻馬七百匹及方物. 王御天德殿, 閱馬爲三等, 評定其價, 馬一等, 銀注子一事, 錦絹各一匹, 二等, 銀鉢一事, 錦絹各一匹, 三等, 錦絹各一匹. 忽雷雨, 震押物人, 又震殿西角. 王大驚, 近臣等扶入重光殿, 遂不豫, 赦.
무신〉 3년(948)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1등 말은 은주전자 1개와 금(錦)‧견(絹) 각 1필, 2등은 은 바리때 1개와 금‧견 각 1필, 3등은 금‧견 각 1필로 정하였다. 갑자기 우레가 치며 비가 내렸으며,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번개가 내리치고 또 전각 서쪽 모퉁이도 번개가 내리쳤다. 왕이 크게 놀라자 근신(近臣)들이 부축하여 중광전(重光殿)으로 들었는데, 드디어 편찮게 되자 사면령을 내렸다.

이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진(女真, 女眞)에 대한 기록이자 최초로 기록된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최초로 등장한 여진(女眞)에 대한 기록은 948년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록이며 두번째로 등장하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록은 1005년 1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이다.

949년에서 1004년 사이에 여진(女眞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문장의 전후상황을 볼 때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해석된다)에 대한 기록은 총 5회 등장하지만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는 아니다. 아래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한 도표이다.

948년 9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
984년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85년 5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1년 10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3년 5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3년 8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1005년 1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

따라서 900년대에 동여진(東女眞)은 고려(高麗)에게 적대적인 세력은 아니었다고 해석되며,

900년대 고려는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여진(遼東半島 女眞)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05년 01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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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원문과 번역이다.

(乙巳)八年 春正月 東女眞寇登州, 燒州鎭部落三十餘所, 遣將禦之.
〈을사〉8년(1005) 봄 정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주진(州鎭)의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將帥)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동여진(東女眞)의 두번째 기사이다. 동여진(東女眞)은 948년 이후 57년 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두번째로 등장했는데 동여진(東女眞)이 고려를 침략한 기사가 등장했다.

하지만 모든 동여진(東女眞)이 고려를 침략한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동여진(東女眞)은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동여진(東女眞)은 완안부(完顔部)가 여진(女眞)과 동번(東蕃) 전체를 통합하기 전까지는 통일된 세력이 아니었고 동여진(東女眞)의 대부분은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려를 침략한 동여진(東女眞)은 그 중에 많지 않았다고 본다.

 

 

아래 도표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동여진(東女眞)이 고려를 공격한 기사이다.

1005년 01월 미상 (음)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을사〉8년(1005) 봄 정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1011년 08월 미상 (음)
동여진(東女眞)의 배 1백여 척이 경주(慶州)를 침략하였다.
1012년 05월 02일 (음)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5월 기사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을 침략하였다....
1028년 10월 26일 (음)
정해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선 15척이 고성(高城)을 침략하였다.
1028년 10월 28일 (음)
기축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선이〉 용진진(龍津鎭)을 침략하여 ...
1029년 03월 21일 (음)
경진 동여진(東女眞)의 해적선 10척이 명주(溟州)를 침입하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후(金厚)가 공격하여 퇴각시켰다.
1029년 05월 07일 (음)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5월 을축 동여진(東女眞)의 400여 인이 동산현(洞山縣)을 침략하였다.
1052년 06월 06일 (음)
기묘 동여진(東女眞) 고지문(高之問) 등이 바다를 건너 삼척현(三陟縣) 임원수(臨遠戍)에 와서 공격하였다......
1064년 윤05월 03일
윤5월 무진 동여진(東女眞) 적의 괴수 마질개(麻叱盖) 등 100여 인이 배로 바다를 건너 평해군(平海郡) 남포(南浦)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남녀 9인을 사로잡아갔다.
1084년 06월 14일 (음)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6월 임오 동여진(東女眞)이 흥해군(興海郡) 모산진(母山津)의 농장을 노략질하자, 수졸(戍卒)이 그들을 격파하고 5인을 사로잡았다.
1097년 07월 21일 (음)
임신 동여진(東女眞)의 적선(賊船) 10척이 진명현(鎭溟縣)을 침략하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한충(金漢忠)이 판관(判官) 강증(康拯)을 보내 그들과 싸워 이겨서 배 3척을 노획하고 48명의 머리를 베었다.

아래의 도표는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동여진(東女眞)과 동번(東蕃)이 고려를 침략한 년도와 횟수이다.

년도 동여진(東女眞)이 침략한 사건 동번(東蕃)이 침략한 사건
1001년 ~1010년 1005년 01월  
1011년 ~ 1020년
1011년 08월
1012년 05월
 
1021년 ~ 1030년
1028년 10월
1028년 10월
1029년 03월
1029년 05월
 
1031년 ~ 1040년   1036년 02월
1041년 ~ 1050년  
1043년 11월
1046년 07월
1049년 06월
1049년 07월
1051년 ~ 1060년 1052년 06월
1050년 07월
1051년 09월
1056년 07월
1061년 ~ 1070년 1064년 윤05월 1064년 07월
1071년 ~ 1080년   1073년 06월
1080년 12월
1081년 ~ 1090년 1084년 06월  
1091년 ~ 1100년 1097년 07월  
 
려사(高麗史)에 기재된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 동여진(東女眞), 동번(東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태조원년 이후 고려를 침략한 기사는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지 않는다.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은 1027년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2회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동여진(東女眞)은 1005년부터 1029년까지 집중적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동번(東蕃)은 1036년 처음 등장한 후 1056년까지 집중적으로 고려를 침략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지금의 러시아 우스리스크나 파르티잔스크에 거주하던 여진족(女真族, 女眞族) 야라(耶懒)가 주변의 흑수말갈(黑水靺鞨)계열로 이주 및 장악하면서 이들 흑수말갈(黑水靺鞨)계열은 고려사(高麗史)에서 동여진(東女眞)이나 동번(東蕃)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 후 이들 중 몇몇의 동여진(東女眞)과 동번(東蕃) 세력이 육상을 통해서나 해적의 형태로 고려를 침략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15의 내용이다.

 

遼史/卷15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zh.wikisource.org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15의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한 내용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開泰元年春正月己巳朔,宋遣趙湘、符成翰來賀。癸未,長白山三十部女直酋長來貢,乞授爵秩。
개태(開泰, 요나라[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 隆緖]의 두번째 연호이다) 원년(1012년) 춘분(春) 정월 기사(己巳) 초하루, 송나라는 조상(趙)과 부성한(符成翰)을 보내 축하를 전했다.
계미(癸未), 장백산(長白山) 30부여진의 추장이 와서 조공을 바치고 작위 수여를 요청했다.

1012년 정월에 장백산 30부여진의 추장이 거란에게 조공을 바치고 작위 수여를 요청했다(長白山三十部女直酋長來貢,乞授爵秩)고 요사(遼史)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12년 윤10월 19일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閏月 女眞毛逸羅·鉏乙豆, 率部落三十姓, 詣和州乞盟, 許之.
윤10월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부락 30개 성씨를 인솔하여 화주(和州)에 와서 화맹(和盟)을 간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부락 30개 성씨를 인솔하여 고려 화주에 와서 화맹을 간청했다(女眞毛逸羅·鉏乙豆, 率部落三十姓, 詣和州乞盟)라는 고려사(高麗史) 기사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인솔한 부락(部落) 30개 성씨(三十姓)는 같은 해 요사(遼史)에 기록된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방문한 고려의 화주(和州)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에서 함경북도 회령시(咸鏡北道 會嶺市) 사이에 있는 어느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후에 고려의 화주(和州)에 대해 설명드릴 때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에서 함경북도 회령시(咸鏡北道 會嶺市) 사이에 있는 어느 지역이 후에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위치한 지역이며 조선태조 이성계의 고향은 바로 이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 백도백과에서 제공하는 장백산여진국(长白山女直国)에 대한 내용이다.

 

长白山女直国

长白山女直国,辽代回霸女真诸部之一,因居长白山至辉发河、松花江上游地区得名,属辽朝属国属部。辽圣宗统和三十年(1012年),长白山三十部女直乞授爵秩,辽设长白山女直国大王府,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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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백도백과에서 제공하는 장백산여진국(长白山女直国)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한 내용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长白山女直国,辽代回霸女真诸部之一。
沿革
亦称长白山部。因居长白山地区,故名。其下有众多小部,辽在其地设长白山女直国大王府,任命其首领为大王统辖其民。向辽纳贡无定期,有从征义务,但时叛时服。金初,被阿骨打统一,按金国女真人制,编置猛安谋克组织,为金代女真族的一部分。
出处
出处《辽史·圣宗纪》开泰元年正月条有,“癸未,长白山三十部女直酋长来贡,乞授爵秩,”史失记诸部名。
《宋史·太祖本纪》:“建隆二年八月,女直国遣使来朝献。”
장백산여직국(장백산여진국)은 요나라 때 회패여진(回霸女真)의 여러 부 중 하나였다.
연혁
혹은 장백산부로도 칭한다. 장백산(지금의 백두산인지는 의문이다. 내 개인적으론 지금의 중국에 위치한 장백산맥에 속한 어떤 산일 수도 있다) 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으로 불렸다. 그 아래엔 여러 작은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나라는 그곳에 장백산여직국(장백산여진국)의 대왕부를 세우고, 그 수령을 대왕으로 임명하여 그 지역민을 다스리게 했다. 요나라에 대해 조공은 정한 기일이 없었고, 징집에 응해야 하는 의무는 있었지만, 마음대로 반란을 하거나 복종했다. 금나라 초에, 아골타(금나라 태조)가 이 장백산여직국(장백산여진국)을 병합했는데, 그는 금나라의 여진인 편제를 채택하여 맹안모극 조직해 이들을 편제한 후, 금나라 때 여진족의 일부가 되었다.
출처
『요사, 성종기(聖宗紀)』 개태 원년(1012년) 정월 기록에는 "계미(癸未), 장백산(長白山) 30부여진의 추장이 와서 조공을 바치고 작위 수여를 요청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 부의 명칭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송사(宋史), 태조본기』에는 "건륭 2년(961년) 8월, 여직국(여진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은 회패여진(回霸女真) 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나라(遼)에 정한 기일이 없이 조공을 했고 마음대로 반란을 하거나 복종했다고 한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 보면,

회패(回霸女真)는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其國往來無禁謂之回霸)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요나라(遼)는 회패여진(回霸女真)을 완전히 장악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회패여진(回霸女真)에 속한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서 자유롭게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회패여진(回霸女真)이 활동하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휘발하(辉发河) 구글지도이다.

 

Huifa River · 중국

★★★★★ ·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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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휘발하(辉发河)가 회패여진(回霸女真)이 활동하던 지역이라면 회패여진(回霸女真)의 일파인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 역시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중국 장백산맥(长白山地)이나 백산시(白山市)내지는 그 주변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장백산(長白山)이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일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아래는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의 구글지도이다.

 

옌지 시 ·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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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에서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咸鏡北道 會嶺市) 사이의 어느 지역에 고려 화주(和州)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부락 30개 성씨를 인솔하여 화주(和州)에 와서 화맹(和盟)을 간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女眞毛逸羅·鉏乙豆, 率部落三十姓, 詣和州乞盟, 許之)라는 내용의 지역적 배경은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휘발하(辉发河) 주변에서 거주하던 부락(女眞) 30개 성씨(三十姓部落)내지는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이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와 함경북도 회령시(咸鏡北道 會嶺市) 사이에 있는 어느 지역으로 와서 고려와 화맹(和盟)을 맺은 거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1073년 05월 05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또 〈서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평로진(平虜鎭) 인근 지역의 번인(蕃人) 우두머리인 유원장군(柔遠將軍) 골어부(骨於夫)와 멱해촌(覓害村)의 요결(要結) 등이 보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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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今欲報讎, 告諭化內三山村中尹夜西老等三十徒酋長,【東蕃黑水人, 其種三十, 號曰三十徒】 亦皆響應, 各率蕃軍, 方將進討, 請遣鄕人觀戰.’
지금 원수를 갚으려고 〈고려에〉 귀화한 삼산촌의 중윤(中尹) 야서로(夜西老) 등 삼십도(三十徒)의 추장(酋長)들【동번(東蕃)의 흑수인(黑水人)은 그 종족이 30이므로 삼십도(三十徒)라 부름.】에게 알려 주었더니, 또한 모두 행동을 같이하여 각기 번군(蕃軍)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나아가 토벌하고자 하므로, 요청하건대 고려의 사람[鄕人]들을 보내 전투를 관찰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번(東蕃)의 흑수인(黑水人)은 그 종족이 30이므로 삼십도(三十徒)라 부름(東蕃黑水人, 其種三十, 號曰三十徒)이라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자들이 고려사(高麗史)에 주석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동번(東蕃)의 흑수인(黑水人)(東蕃黑水人)이라고 기재된 내용을 보면, 1027년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잘 등장하지 않던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대부분 여진(女眞)에게 병합되어 동번(東蕃)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 1073년 기사에 기재된 동번의 흑수 30도(東蕃黑水人三十徒)가 요사(遼史) 1012년 기사에 기재된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이며 고려사(高麗史) 1012년 기사에 기재된 부락 30성(部落三十姓)이라면

 

즉, 아래의 도표에 기재된 도식이라면

동번의 흑수30도(東蕃黑水人三十徒) = 장백산 30부여진(長白山三十部女直) = 여진(女眞)의 인솔에 따라 고려를 방문한 부락30성(部落三十姓)

동번의 흑수 30도(東蕃黑水人三十徒)는 원래 흑수(黑水)계통이었고,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당시 부락 30성(部落三十姓)을 인솔해서 고려를 방문했다면 1012년 당시에도 여진(女眞)의 영향을 받던 흑수부(黑水部)였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1072년도가 되면 고려에선 이들을 여진(女眞)에 장악된 흑수(黑水)라는 의미인 동번(東蕃)으로 칭했다고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