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완안부(完顔部), 동번(東蕃), 동여진(東女眞), 여진(女眞) 본문
고려사(高麗史)에는 윤관의 여진정벌과 관련된 세력들을 지칭할 때 다양한 명칭들로 기재하고 있다.
고려와 충돌한 여진(女眞)을 고려사(高麗史)에선 동번(東蕃), 동여진(東女眞), 여진(女眞)으로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우두머리로서 후에 금나라(金)를 세우는 완안부(完顔部)는 여진으로서 흑수에 거하는 부족(女眞居黑水者部族)으로도 칭한다.
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서 동번(東蕃)으로 기재된 내용들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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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년 01월 18일 (음)
신해 동번(東蕃)의 공아(公牙) 등 10인이 내조(來朝)하였다.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전례에 따라 하사하였다. 처음에 임간(林幹)이 군대를 내보냈을 때 추장(酋長) 연개(延盖)가 지훈(之訓) 등에게 그들을 역습하게 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지훈이 공아를 보내 내조하였다. 왕이 정전(正殿)에서 맞이하려고 예를 갖추어 그들을 기다렸는데, 잡단(雜端) 최위(崔緯) 등이 아뢰기를, “옛날부터 노인(虜人)이 왔을 때 정전에서 불러 보는 것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옛 제도에 따라 편전(便殿)에서 대접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06년 01월 미상 (음)
예종(睿宗) 원년(1106) 정월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지난 번 동번(東蕃)과의 전쟁에서 군령(軍令)이 엄격하지 않았으므로, 장수(將帥)들은 감히 힘껏 싸우지 않았으며 병졸들도 또한 모두 도망치고 무너져 여러 번 패전하게 되었습니다.......
1106년 03월 04일 (음)
요(遼)에서 우리 군사 종지(宗志) 등 12인을 돌려보냈다. 갑신년(1104) 전쟁에서 동번(東蕃)에 패배하여 요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이었다.
1106년 03월 15일 (음)
정미 동번(東蕃)이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자,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을 소환하였다.
1109년 02월 23일 (음)
무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이재(李載)가 소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나라에 변고가 많고 백성[黎庶]이 편안하지 못한데, 임금께서는 두 동생을 책봉하고는 여러 차례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며 어사대부(御史大夫) 최계방(崔繼芳)에게 명령하여 춤까지 추게 하였습니다. 또한 연등회의 연회에서는 해가 높이 떠서야 끝을 내고, 평장사(平章事) 김경용(金景庸)에게 명령하여 춤을 추게 했으니 그 무엇이 예라 하겠습니까? 또 지금 동번(東蕃)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고 주둔군이 물러가지도 않았습니다. 최근 〈여진(女眞)이〉 사현(史顯)을 보내 거짓으로 화친을 청해오자, 우리 조정에서는 그 말만 믿고 요(遼)에 사신을 보내 9성의 반환을 보고하려고 하는데, 아주 옳지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잘 살펴 결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1109년 05월 09일 (음)
........“짐이 부족한 덕에도 불구하고 외람되게 삼한을 통치한 지 올해로 다섯 해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하고, 권위는 여러 방면의 변고를 제압하기에도 부족하여 침식을 잊고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한 번도 여유롭게 평안을 누린 적이 없었다. 더욱이 이 동번(東蕃)의 적은 조종(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지난 갑신년(甲申年, 1104)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전쟁을 일으켜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근래에는 매번 국경의 성(城)까지 침범하여 수졸(戍卒)의 옷과 군량 및 무기까지 강탈하였으며, 자신들의 우악스럽고 사나움을 믿고 변방을 침구해 소란을 피워왔으니 그 죄는 토벌을 당해야 마땅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1109년 06월 26일 (음)
기해 동번(東蕃)의 사신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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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서 동여진(東女眞)으로 기재된 내용들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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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 04월 20일 (음)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영가(盈歌)가 사자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영가는 곧 금(金)의 목종(穆宗)이다.
1102년 11월 26일 (음)
정미 동여진(東女眞)의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은그릇 제조 장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니, 그것을 허락하였다.
1103년 07월 27일 (음)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으로 왕래하기 시작하여 이후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고 우리도 다시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영가가 그의 족제(族弟)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로 방문하니, 왕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날짜 | 1103년 11월 20일 (음)
병신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고쇄(古洒), 솔부(率夫), 아로(阿老) 등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104년 01월 06일 (음)
〈숙종(肅宗)〉 (갑인) 9년(1104) 봄 정월 신사 동여진(東女眞)의 남녀 1,753인이 내투(來投)하였다(이 기사는 고려와 충돌하는 여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석되지만 동여진이 정주 밖에 진을 친날과 같은 날에 일어난 사건이다).
1104년 01월 06일 (음)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오아속(烏雅束)이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틈이 생기자, 공형지조(公兄之助)를 보내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하고 기병이 와서 정주(定州) 관문 밖에 진을 쳤다.
1106년 03월 05일 (음)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동여진(東女眞)의 지훈(之訓)이 기병 2,000명을 이끌고 와서 관외(關外)에 진을 치고, 성심을 다하여 복종하며 말하기를, ‘지난해의 전쟁은 새로 즉위한 왕이 알지 못하는 것이며, 공아(公牙)가 내조(來朝)하였을 때 그 뜻을 깨우치고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냈으니 왕의 은혜가 지극히 두터운데 어찌 감히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부지런히 조공(朝貢)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109년 04월 30일 (음)
갑진 동여진(東女眞)이 다시 사현(史顯)을 우리의 국경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1109년 11월 20일 (음)
경신 동여진(東女眞) 추장(酋長) 오로(吳老)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110년 11월 13일 (음)
정축 동여진(東女眞)의 사현(史顯) 등 12인이 내조(來朝)하였다.
1110년 12월 01일 (음)
12월 을미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사현(史顯) 등을 접견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1114년 04월 12일 (음)
정사 동여진(東女眞)의 고라골(古羅骨)과 사현(史顯) 등 12인이 와서 말을 바쳤다.
1118년 윤09월 29일
수사공 좌복야 판상서병부사(守司空 左僕射 判尙書兵部事) 최정(崔挺)이 사망하자 시호(諡號)를 정의(貞毅)라 하였다. 문종(文宗)이 무사를 선발하였을 때 최정은 빼어난 활솜씨로 뽑혔으며, 동여진(東女眞)의 정벌에 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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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서 여진(女眞)으로 기재된 내용들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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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년 02월 08일 (음)
임자 임간(林幹)이 여진(女眞)과 정주성(定州城) 밖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유사(有司)에서 탄핵하여 아뢰니, 임간과 병마사 좌복야(兵馬使 左僕射) 황유현(黃兪顯), 부사(副使) 대장군(大將軍) 송충(宋忠), 호부시랑(戶部侍郞) 왕공윤(王公胤), 우승선(右承宣) 조규(趙珪)에게 패전의 죄를 물어 모두 파직하였다.
1104년 03월 04일 (음)
정축 윤관(尹瓘)이 여진(女眞)과 싸워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우리 군대의 사상자(死傷)와 실종자도 과반이 넘었다.
1104년 06월 13일 (음)
갑인 동북면병마도통(東北面兵馬都統)이 아뢰기를, “여진(女眞)이 스스로 성책[場寨]을 허물고, 공형(公兄)・지조(之助) 등 68인이 관문을 두들기며 화친하기를 애걸합니다.”라고 하였다.
1107년 윤10월 20일
임인 장차 여진(女眞)을 정벌하려고 〈왕이〉 순천관(順天館) 남문에 나아가 열병하였으며 은(銀)과 포(布),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1107년 12월 15일 (음)
병신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쳐서 크게 패배시키자, 여러 장수를 보내 경계를 정하고 웅주(雄州)·영주(英州)·복주(福州)·길주(吉州)의 4주(州)에 성을 쌓았다.
1108년 02월 11일 (음)
임진 여진(女眞)이 웅주(雄州)를 포위하자, 최홍정(崔弘正)이 성문을 열고 나가 격파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포로로 잡은 80명의 머리를 베고, 수레와 말과 무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획득하였다.
1108년 03월 29일 (음)
3월 기묘 여진(女眞)이 영주성(英州城) 밖에 진을 치자, 관군이 나아가 싸워 그들을 격퇴하였다. 20명의 목을 베고, 무기와 말 8필을 노획하였다.
1108년 04월 08일 (음)
무자 여진(女眞)이 목책을 설치하고 웅주성(雄州城)을 포위하였다.
1108년 04월 11일 (음)
신묘 〈왕이〉 창릉(昌陵)을 참배하고 시를 지었는데 여진(女眞)을 평정한 뜻을 담았다. 호종(扈從)한 유신(儒臣)에게 두루 보이고 화답하는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였다.
1108년 04월 29일 (음)
기유 여진(女眞)이 침입하자, 근신(近臣)에게 유향(油香)과 궁검(弓劒)을 개경 안[京內]에 있는 사원에 바치고 여진을 물리치기를 빌라고 각각 명령하였다.
1108년 05월 04일 (음)
계축 오연총(吳延寵)이 웅주(雄州)에 이르러 여진(女眞)을 쳐서 그 무리를 격파하였다.
1108년 07월 07일 (음)
행영병마원수 문하시중(行營兵馬元帥 門下侍中) 윤관(尹瓘)에게 다시 여진(女眞)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였다.
1108년 08월 11일 (음)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와 영주(英州)에서 여진(女眞)과 싸워서 33명의 머리를 베었다.
1108년 08월 16일 (음)
계사. 병마판관(兵馬判官) 유익(庾翼)과 장군 송충(宋忠), 신기군(神騎軍) 박회절(朴懷節) 등이 여진(女眞)과 길주(吉州)에서 싸우다가 죽자, 유익에게는 병부시랑 지어사대사(兵部侍郞 知御史臺事)를, 송충에게는 상장군 병부상서(上將軍 兵部尙書)를 추증하였다.
1108년 09월 16일 (음)
계해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女眞)을 공격하여 27명의 머리를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1109년 01월 04일 (음)
기유 동계행영병마녹사(東界行營兵馬錄事) 왕사근(王思謹)과 하경택(河景澤) 등이 함주(咸州)에서 여진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109년 03월 07일 (음)
신해 행영병마녹사(行營兵馬錄事) 장문위(長文緯) 등이 여진(女眞)과 숭녕진(崇寧鎭)에서 싸워 〈적의 목〉 38급을 베었다.
1109년 03월 11일 (음)
을묘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허재(許載)와 김의원(金義元) 등이 길주(吉州)의 관문 밖에서 여진(女眞)과 싸워 〈적의 목〉 30급을 베고 철갑(鐵甲)과 소와 말을 포획하였다.
1109년 05월 06일 (음)
5월 경술 행영병마(行營兵馬)에서 아뢰기를, “여진(女眞)이 선덕진(宣德鎭)을 침략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1109년 05월 08일 (음)
임자 여진(女眞)의 변경 침략 때문에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여 분향하고,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 여러 신묘(神廟)에서 기도하게 하였다.
1109년 05월 16일 (음)
경신 여진(女眞)이 길주(吉州)를 포위하니 오연총(吳延寵)이 군사를 이끌고 구하려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1109년 06월 12일 (음)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군대를 이끌고 길주(吉州)를 구원하려다가, 여진(女眞)이 화친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주(定州)로 되돌아왔다.
1109년 07월 18일 (음)
신유 행영병마별감 승선(行營兵馬別監 承宣) 최홍정(崔弘正)과 병마사 이부상서(兵馬使 吏部尙書) 문관(文冠)이 여진(女眞) 추장(酋長) 거위이(居熨伊) 등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가 9성의 반환을 요청했으니 마땅히 이전에 했던 약속처럼 하늘에 대해 맹세하라.”라고 하였다. 추장 등은 함주(咸州)(함주는 후에 원나라의 합란부[哈蘭府]가 된다) 성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지금 이후 대대손손[九父之世]까지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칠 것입니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우리나라[蕃土]는 망하여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고 맹세를 마치고 물러갔다. 최홍정 등은 길주(吉州)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9성의 전투 장비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거두어 들였다. 〈이에〉 적인(狄人)이 기꺼이 그들의 소와 말을 내어 우리 백성 가운데 남아 있던 남녀노소를 실어 보냈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1109년 08월 27일 (음)
기해 여진(女眞)의 사신 사현(史顯)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109년 미상 (음)
이해에 도관낭중(都官郞中) 이국경(李國瓊)을 요(遼)에 파견하여 여진(女眞)의 9성 반환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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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표에 기재된 고려사(高麗史) 내용 중에 내가 설명할 고려사(高麗史) 기사는 아래와 같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104년 01월 06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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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女眞酋長烏雅束, 與別部夫乃老有隙, 遣公兄之助, 發兵攻之, 騎兵來屯定州關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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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오아속(烏雅束)이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틈이 생기자, 공형지조(公兄之助)를 보내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하고 기병이 와서 정주(定州) 관문 밖에 진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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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진의 추장(東女眞酋長), 정확히는 완안부의 추장(完颜部酋長)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이 지방세력과 틈이 생기자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공형지조(公兄之助)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에서 공형지조(公兄之助)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공적인 형의 도움'이라는 뜻이다.
완안부 추장(完颜部酋長)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의 명령으로 고려와의 싸움에 투입된 장수는 추장의 둘째 동생 완안알대(完顔斡帶)이다.
추장인 형(公兄)이 동생을 통해 도움(助)을 준 것을 고려사에선 공형지조(公兄之助)로 표기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109년 05월 0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계축 왕이 사면령을 선포하려고 재추(宰樞)를 불러 의논하였는데, 최홍사(崔弘嗣)가 사면령이 옳지 않다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얼마 전 좌우 신하들의 강경한 요청에 따라 군대를 동원해 적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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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况此東蕃賊類, 自祖宗以來, 附托國勢, 多被恩賞, 今則背恩棄德, 招集遠賊, 凌犯國境. 嚮於甲申年, 連兵拒戰, 殺我軍民, 其或生擒, 以爲僕隷者, 不可勝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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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 동번(東蕃)의 적은 조종(祖宗) 이래로 우리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큰 은택을 입어 왔는데도 지금은 배은망덕하게도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 지난 갑신년(甲申年, 1104)에는 끊임없이 군사를 내어 전쟁을 일으켜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였으며, 때로는 생포하여 노예로 삼은 자들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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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招集遠賊, 凌犯國境)라고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되어 있다.
고려는 1104년에는 고려 정주(定州) 밖에 주둔한 완안부(完颜部)와 전투를 벌였고,
1107년 윤관의 여진정벌과 9성을 축조한 이후 여진(女眞)에게 반격을 당할 때는 완안부(完颜部)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야라부(耶懒部) 그리고 할라(曷懶 [hélǎn], 고려 함주 이북지역이며 지금의 해란강 이북 지역이라고 해석된다)의 할라전(曷懶甸 [hélǎndiān]) 지역에 거주하는 동번(東蕃) 및 동여진(東女眞)과 전투를 벌였다고 해석된다.
또한, 1104년 고려 정주(定州) 밖에 주둔한 완안부(完颜部)와 전투를 벌일 때도 고려 정주 밖의 동번(東蕃) 및 동여진(東女眞)도 완안부(完颜部)에 합세했다고 본다.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멀리 있는 적까지 불러 모아 국경을 침범하였다(招集遠賊, 凌犯國境)라는 내용은 이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래는 해란강(海兰江, Hailan River) 구글지도이다.
Hailan River ·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 룽징 시 邮政编码: 133400
강
www.google.co.kr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가 9성을 설치한 지역인 할라전(曷懶甸 [hélǎndiān])은 지금의 해란강(海兰江 [hăilánjiāng]) 이북 지역이라고 본다.
또한 원나라 합란부(哈蘭府 [hālánfǔ])이자 고려의 함주(咸州)도 이 해란강(海兰江 [hăilánjiāng])이 흐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에 있었다고 본다.
즉,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咸鏡南道 咸興) 근처가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 대해선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 다시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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