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900년대 동여진(東女眞)과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900년대 동여진(東女眞)과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8. 13. 12:46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음력 918년 9월 26일)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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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원문과 번역이다.

丙申 諭群臣曰,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병신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평양(平壤)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무성해 번인(蕃人)이 그 사이를 사냥하느라 옮겨 다니고 이로 인하여 변경 고을을 침략하니 그 피해가 매우 크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堂弟]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수비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여진(女真, 女眞)이 등장한 시기는 발해(渤海)가 멸망한 이후(926년 이후)이다.

간혹 태조 원년(太祖 元年, 918년) 고려 평양(高麗 平壤)에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는 여진(女真, 女眞)이라고 특정하지 않고 번인(蕃人)으로 기재했다.

즉, 발해(渤海) 멸망 전에 고려 평양(高麗 平壤)에 거주하던 외국인은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번인(蕃人)이 활동하고 있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大金國志)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7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七〉   完顔   五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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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에 기재된 대금국지(大金國志) 본문과 번역이다. 남주성 박사님의 만주원류고(글모아 출판) 번역을 인용한다.

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使不得與本國往來謂之哈斯罕滿洲語藩籬也志云不得與本國往來寔有防閑之義舊作合蘓欵又作曷蘓館今改正
거란은 여진이 장차 화가 될까 걱정하여 호족 수천 가를 꾀어서 요양의 남쪽(遼陽之南)에 옮겨 살게 하고, 본국과 사자가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들을 합사한(哈斯罕)(만주어로 번리[藩籬 울타리 담장]이다. '지'에는 "본국과 왕래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두 지역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뜻이다. 이전에 합소관[合蘓欵] 또는 갈소관[曷蘓館]으로 썼던 것을 이제 고침)이라고 하였다.

거란(契丹)은 발해(渤海)를 멸망시킨 후 발해(渤海)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真族, 女眞族)들을 분리시켜 그 일부를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요양(遼陽)의 남쪽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가리킨다.

아래는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내용이다. 

 

哈斯罕关

哈斯罕关(别名苏州关关址)是辽宁省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的辽代历史遗迹,地处辽东半岛南端黄海与渤海之间的狭窄地岬,为镇东海口长城的重要关隘,现存两段辅墙及一座望台遗迹。

baike.baidu.com

아래는 위의 중국백도백과에 기재된 합사한관(哈斯罕关)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하고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감안해주시길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哈斯罕关别名苏州关关址 ,是辽圣宗统和九年(991) 所建关隘。初建时以木栅为关。
木栅在契丹语称“哈斯罕”,故名。
位于辽东半岛南端黄海与渤海之间的狭窄地带,现地属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
历史沿革
据《宋会要辑稿·番夷》记载,辽契丹太祖天显元年(926),辽灭渤海(国),但女真部族仍与宋朝保持经济往来,并向宋朝进贡。
辽“虑女真为患”,为“分其势,使不得相通”,便强制将女真人迁到熊岳至金州一带,并在辽南置扶州(后改复州),设怀德军节度;置苏州(今金州),设安复军节度。
但居于开原至松花江一带的女真部族仍通过海路与宋朝保持往来。
辽为绝其“贡献之路”,于辽圣宗统和九年(991)在金州地峡修筑关墙,派驻3000兵员防守。(现证实镇东海口长城为辽太祖登基初年修筑)
关墙初建时以木栅围成,金代至元代陆续改建为土石结构。
明代以后,此关渐废;亦有说法为废弃时间在金元之际 。
합사한관(哈斯罕关)으로도 알려진 소주관은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건설된 요충지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목책으로 지어졌었다. 목책은 거란어로 "합사한(hāsīhǎn)"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지어졌다. 요동반도 남단, 황해(우리나라의 서해)와 발해(Bohai sea) 사이의 좁은 지역(요동반도)에 위치하며 현재 대련시 감정자구대련만가도에 속한다.
역사연혁(历史沿革)
송회요집고:번이에 의하면, 요나라 거란 태조 천현 원년(926년),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여진부족은 송나라와 경제적인 연관 때문에 교류를 유지하며 송나라에도 조공을 병행했다(발해국에 부속된 여진은 발해국이 거란에 멸망했으니 이후 거란에 속하게 되었지만, 여진은 송나라에게 경제적으로 연계돼 있어서 송나라에게 조공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요나라는 "여진족이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그 세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진족을 웅악에서 금주 일대까지 강제 이주시키고 아울러 요나라 남쪽에 부주(후에 복주로 이름을 바꾸었다)를 설치했다. 회덕군을 설치하고 절도사를 두었다; 소주(현재의 금주)를 설치하고, 안복군 절도사를 두었다.
그러나 개원(开原)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부족은 여전히 바닷길을 통해 송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며 왕래했다.
요나라는 '공헌지로'을 차단하기 위해, 요나라 성종 통화 9년(991)에 금주의 땅의 협곡에 성벽(关墙)을 쌓고 3000명의 병력을 배치해 방어했다. (정지진 동해구의 장성은 요태조가 즉위 초기에 축조한 것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다)
성벽(关墙)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금나라로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진 계속하여 흙과 석조로 구성된 건축물로 재건되었다.
명나라 이후, 이 관은 점차 폐기되었고, 폐기된 시기는 금나라에서 원나라로 바뀌던 시기였다고보고 있다

백도백과 내용을 보면,

거란(契丹)은 발해(渤海) 멸망 후(926년 이후) 분산시킨 여진족(女真族, 女眞族) 일부를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대련시감정자구대련만가도(大连市甘井子区大连湾街道)에 거주케 한 후 991년부터는 이들을 합사한(哈斯罕)으로 칭하며 본격적으로 관리했다고 한다.

아래는 금주(金州) 구글지도이다.

 

진저우 구 ·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

중국 랴오닝 성 다롄 시

www.google.co.kr

거란(契丹)은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주시킨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을 관할하기 위해 소주(苏州)를 설치했다고 한다.

지금의 금주(金州)는 거란(契丹)에 의해 이주된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거란(契丹)은 금주(金州)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을 합사한(哈斯罕)이라고 칭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이다. 948년 09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무신〉 3년(948)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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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이다.

(戊申)三年 秋九月 東女眞大匡蘇無盖等來, 獻馬七百匹及方物. 王御天德殿, 閱馬爲三等, 評定其價, 馬一等, 銀注子一事, 錦絹各一匹, 二等, 銀鉢一事, 錦絹各一匹, 三等, 錦絹各一匹. 忽雷雨, 震押物人, 又震殿西角. 王大驚, 近臣等扶入重光殿, 遂不豫, 赦.
무신〉 3년(948) 가을 9월 동여진(東女眞)에서 대광(大匡) 소무개(蘇無蓋) 등을 보내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말을 살펴본 후 3등급으로 나누어 값을 매겼는데, 1등 말은 은주전자 1개와 금(錦)‧견(絹) 각 1필, 2등은 은 바리때 1개와 금‧견 각 1필, 3등은 금‧견 각 1필로 정하였다. 갑자기 우레가 치며 비가 내렸으며, 물건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번개가 내리치고 또 전각 서쪽 모퉁이도 번개가 내리쳤다. 왕이 크게 놀라자 근신(近臣)들이 부축하여 중광전(重光殿)으로 들었는데, 드디어 편찮게 되자 사면령을 내렸다.

이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진(女真, 女眞)에 대한 기록이다.

여진(女眞), 동여진(東女眞), 서여진(西女眞) 중에 동여진(東女眞)이 고려사(高麗史)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여진족(女真族, 女眞族)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한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948년 기사에 기록된 동여진(東女眞)으로 표기된 세력이라면,

948년 당시엔 서여진(西女眞)이나 다른 여진(女真, 女眞)도 있었다는 반증으로도 해석된다.

926년에 발해(渤海)가 거란(契丹)에 의해 멸망한 후 거란(契丹)이 하얼빈 주변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真族, 女眞族)들을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발해(渤海) 멸망 후 언제 이주시켰는지는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948년 고려사(高麗史)에 동여진(東女眞)이 등장한 것을 볼 때 요동반도(遼東半島)의 여진(女真)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동여진(東女眞)에서 고려(高麗)로 방문한 인물인 소무개의 직책이 고려(高麗)의 공직인 대광(大匡)인 것(東女眞大匡蘇無盖)을 볼 수 있다.

대광(大匡)은 고려(高麗)에서 매우 높은 직책으로서 태조왕건의 사촌동생인 왕식렴과 왕건을 추대한 배현경, 왕건의 측근인 박술희와 유금필, 왕건의 사돈인 왕규 역시 직책이 대광(大匡)이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기사이다. 1025년 01월 28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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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辛亥 女眞酋長毛逸羅來朝, 以有功邊圉, 加授大匡, 優賜衣物.
신해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모일라(毛逸羅)가 내조(來朝)하자, 국경지대를 지키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대광(大匡)으로 올려 제수하였고 옷과 물품을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여진(女眞)의 추장 모일라에게 고려(高麗)의 대광(大匡)이라는 직책을 제수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앞의 사례와 달리 동여진(東女眞)이 아닌 여진(女眞)이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의 국경(邊圉) 지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여진(女眞), 동여진(東女眞), 서여진(西女眞)에 대한 기록이 기재되어있으며 이 중에 가장 먼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 것은 동여진(東女眞)이다.

동여진(東女眞)은 948년 9월에 가장 먼저 등장하며 이후 57년이 지난 1005년 1월에 두번째로 등장한다.

그런데 57년 이후 1005년 1월에 다시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는 고려(高麗)를 약탈한 기사이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제1차 전쟁이 종결된 해가 993년이고 제2차 전쟁이 1010년에 일어났으니 그 사이 고려(高麗)의 혼란기 때 동여진(東女眞)은 고려(高麗)에 두번째로 등장했고 고려(高麗)를 약탈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동여진(東女眞)이 처음 등장한 948년에서 동여진(東女眞)이 두번째로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 1005년 사이인 57년 동안 고려사(高麗史)에는 총 5회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가 등장한다.

다만 서여진(西女眞)으로 기재된 기사는 없고 여진(女眞)으로 기재된 기사만 등장한다.

아래는 949년에서 1004년까지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이다. 5회에 걸쳐 등장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내용이다. 984년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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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이다.

命刑官御事李謙宜, 城鴨綠江岸, 以爲關城, 女眞以兵遏之, 虜謙宜而去, 軍潰不克城, 還者三之一.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가에 성을 쌓아 관문(關門)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女眞)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것을 막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돌아가니 군대가 무너져 성을 쌓지 못하였으며 돌아온 자는 셋에 하나였다.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발해(渤海) 멸망 후 요동반도로 이주된 여진(遼東半島 女眞)과 충돌한 내용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내용이다. 985년 05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왕이 시일을 끌며 군사를 일으키지 않자 한국화(韓國華)가 위협과 덕행으로 달랬다. 왕이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서쪽에서 만나기를 허락하자 한국화가 이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거란(契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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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본문과 번역이다.

王遷延不發兵, 國華諭以威德. 王始許發兵西會, 國華乃還. 先是, 契丹伐女眞, 路由我境, 女眞謂我導敵構禍, 貢馬于宋, 因誣譖, “高麗與契丹, 倚爲勢援, 摽掠生口.” 韓遂齡之如宋也, 帝出女眞所上告急木契, 以示遂齡曰, “歸語本國, 還其所俘.” 王聞之憂懼, 及國華至, 王語曰, “女眞貪而多詐, 前冬再馳木契, 言契丹兵將至其境, 本國猶疑虛僞, 未卽救援. 契丹果至, 殺掠甚衆. 餘族遁逃, 入于本國懷昌·威化·光化之境, 契丹兵追捕, 呼我戍卒言, ‘女眞每寇盜我邊鄙, 今已復讎, 整兵而回.’ 於是, 女眞來奔者二千餘人, 皆資給遣還. 不意, 反潛師奄至, 殺掠吾吏民, 驅虜丁壯, 沒爲奴隸. 以其世事中朝, 不敢報怨, 豈期反相誣告, 以惑聖聰? 本國世禀正朔, 謹修職貢, 深荷寵靈, 敢有二心, 交通外國? 况契丹介居遼海之外, 復有二河之阻, 無路可從. 且女眞逃難, 受本國官職者, 十數人尙在, 望召赴京闕, 令入貢之使庭辨, 庶幾得實, 願達天聰.” 國華許諾.
왕이 시일을 끌며 군사를 일으키지 않자 한국화(韓國華)가 위협과 덕행으로 달랬다. 왕이 비로소 군사를 일으켜 서쪽에서 만나기를 허락하자 한국화가 이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 영토를 길로 삼았는데 여진은 우리에게 적을 끌어다가 분란을 엮었다 말하고, 송(宋)에 말을 바치러 가서는 그로 인하여 무고(誣告)하고 참소(讒訴)하기를, “고려가 거란과 더불어 그 세력의 도움에 기대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한수령(韓遂齡)이 송에 가자 송 황제는 여진이 올린 급함을 고한 목계(木契)를 꺼내어 한수령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본국(本國)에 돌아가 말하여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한국화가 이르자 왕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진은 탐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저번 겨울 거듭 목계를 급히 보내어 거란 군사들이 장차 그 땅에 이른다고 말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거짓인지 의심스러워 즉시 구원하지 못하였소. 〈그런데〉 거란이 과연 이르러 많은 〈여진〉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갔소. 그러자 〈여진의〉 남은 족속들이 도망쳐서 우리나라의 회창(懷昌)·위화(威化)·광화(光化)의 땅으로 들어오니 거란 군사가 쫓아와 사로잡아 가면서 우리 수졸(戍卒)에게 이르기를, ‘여진이 매번 우리 국경 시골을 쳐들어와 도적질하므로 이제 우리는 그 원수를 갚고 군사들을 정비해서 돌아간다.’라고 하였소. 이에 여진에서 도망쳐 온 2,000여 명에게 모두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는데, 뜻하지 않게 도리어 몰래 군사를 갑자기 들여 우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거나 도적질하였으며 장정들을 포로로 끌고 가서 모두 노예로 삼았소. 그런데도 〈여진이〉 대대로 중국을 섬겨와 감히 원수를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도리어 서로 무고하여 성총(聖聰)을 현혹할 줄 기약하였겠소? 우리나라는 대대로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고 삼가 공물을 바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크게 받아들고 있으니 감히 두 마음을 가지고 외국과 교통하겠소? 하물며 거란은 요해(遼海) 바깥쪽에 끼어 있으며 또 우리와는 큰 강을 두 개 사이에 둘 정도로 험해 따를 만한 길이 없소. 또 여진에서 피난을 와 우리나라에서 벼슬을 받는 자가 10여 인이 아직 있으니, 바라건대 경궐(京闕)에 불러다가 〈여진의〉 입공(入貢)하는 사신들과 대질[庭辨]하게 하면 거의 사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원컨대 황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한국화가 〈이 요청을〉 허락하였다.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고려[高麗]) 영토를 길로 삼았다(契丹伐女眞, 路由我境)는 내용이 등장한다. 현재 우리나라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려(高麗)의 영토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다.

나는 그동안 거란(契丹)이 고려(高麗)의 영토를 지나가 여진(女眞)을 공격할 수 있었다면 거란(契丹)이 공격한 여진(女眞)은 지금의 휘발하 주변에 거주하던 회패(回霸)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985년 5월 기사를 보면 거란(契丹)에 공격받은 여진(女眞)은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으로 해석된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제 1차 전쟁 이전인 985년도에 요동반도(遼東半島) 지역은 고려(高麗)와 거란(契丹) 간의 분쟁지역이었고 거란(契丹)은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 여진(女眞)을 이용해 고려(高麗)와의 충돌을 피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지역의 여진(女眞)이 거란(契丹)의 변방을 공격한 요사(遼史)의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거란(契丹)은 이들을 완전히 통제하진 못했다고 본다.

따라서 거란(契丹)이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을 공격했을 때 고려(高麗)는 거란(契丹)이 고려(高麗) 영토를 빌려 여진(女眞)을 공격한 거로 인식했다고 본다.

여진(女眞) 역시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이 함께 자신들을 노략질 했다고 송나라(宋)에 보고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991년 10월 03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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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鴨綠江外女眞)이라고 칭한 것을 볼 때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993년 05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夏五月 西北界女眞報, 契丹謀擧兵來侵, 朝議謂其紿我, 不以爲備.
여름 5월 서북계(西北界)의 여진(女眞)에서 거란(契丹)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하려 계획한다고 알려 왔으나, 조정(朝廷)에서 의논하기를 그들이 우리를 속인 것으로 여기고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서북계(西北界)의 여진(女眞)에서 거란(契丹)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하려 계획한다고 알려 왔다(西北界女眞報, 契丹謀擧兵來侵)라고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것을 볼 때,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제 1차 전쟁 전엔 고려(高麗)의 정보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993년 08월 미상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是月, 女眞復報契丹兵至, 始知事急, 分遣諸道兵馬齊正使.
이 달에 여진(女眞)이 거란(契丹)의 군대가 침략하였음을 다시 알려오자, 비로소 일의 위급함을 알고 각 도(道)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냈다.

이 달에 여진(女眞)이 거란(契丹)의 군대가 침략하였음을 다시 알려왔다(是月, 女眞復報契丹兵至)라고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것을 볼 때,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은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제 1차 전쟁 전엔 고려(高麗)의 정보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고려사 기사에 등장하는 동여진(東女眞)과 여진(女眞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문장의 전후상황을 볼 때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해석된다)에 대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948년 9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
984년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85년 5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1년 10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3년 5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993년 8월 여진(女眞)에 대한 기사,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으로 추정
1005년 1월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기사

따라서 900년대에 동여진(東女眞)은 고려(高麗)에게 큰 의미있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해석되며,

900년대엔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여진(遼東半島 女眞)이 고려(高麗)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