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여진(東女)과 동번(東蕃) 1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17년 08월 27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壬辰 西女眞揩信, 擒契丹東京崇聖寺僧道遵以來.
|
||
|
임진 서여진(西女眞)의 개신(揩信)이 거란(契丹) 동경(東京)에 있는 숭성사(崇聖寺)의 승려 도준(道遵)을 사로잡아 왔다.
|
고려사(高麗史)에서 최초로 서여진(西女眞)이 기재된 내용이다.
거란(契丹) 동경(東京)(契丹東京)이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고려에선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을 서여진(西女眞)으로 칭한 것 같다.
하지만 984년, 985년, 991년, 993년에도 요동반도(遼東半島)에 거주하는 여진(女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했지만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들을 서여진(西女眞)으로 칭하지 않았다. 여진(女眞)이라고만 칭했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서여진(西女眞)으로 지칭한 문장은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래는 여진족(女真族, 女眞族) 모일라(毛逸羅)가 등장하는 고려사(高麗史) 기사들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12년 윤10월 19일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閏月 女眞毛逸羅·鉏乙豆, 率部落三十姓, 詣和州乞盟, 許之.
|
||
|
윤10월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부락 30개 성씨를 인솔하여 화주(和州)에 와서 화맹(和盟)을 간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女眞毛逸羅)라고 고려사(高麗史)에는 표기되어 있지만, 고려 동계에 속한 화주(和州)에서 화맹을 간청한 것을 볼 때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는 동여진(東女眞) 소속으로 추정된다.
화주(和州)는 후에 원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세워지는 지역이며 조선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고려 화주(和州)를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咸鏡南道 金野郡)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 화주(和州)는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咸鏡南道 金野郡)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咸鏡南道 金野郡)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던 곳도 아니며 조선태조 이성계의 고향도 아니라고 본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 화주(和州)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에서 함경북도 회령시(咸鏡北道 會嶺市) 사이에 있는 어느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여진(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조을두(鉏乙豆)가 인솔한 30성부락(三十姓部落)은 지금의 휘발하(辉发河) 주변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延边朝鲜族自治州 延吉市) 사이에 위치한 여진부락(女眞部落)이라고 추정된다.
이 내용에 대해선 후에 해당되는 내용을 다룰 때 다시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19년 08월 28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壬子 東女眞毛逸羅率衆, 來朝, 增階職.
|
||
|
임자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가 무리를 인솔하여 내조(來朝)하였으므로, 관계(官階)(관리[官吏]나 벼슬의 등급[等級]을 뜻하는 단어이다)와 관직(職)을 더하였다(增).
|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가 무리를 인솔하여 내조(來朝)하였으므로, 관계(官階)와 관직을 더하였다(東女眞毛逸羅率衆, 來朝, 增階職)라고 기재하는 것은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는 고려에 내조하는 세력의 인물이었고 관계와 관직을 더하였다는 것은 관직을 더하기 이전부터 고려의 관직을 받아 관리로서 등급이 있었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모일라(毛逸羅)가 소속된 동여진(東女眞)은 고려의 영향권 안에 있는 동여진(東女眞)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21년 03월 10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乙酉 西女眞毛逸羅·那忽邏等來, 獻土馬·貂鼠皮.
|
||
|
을유 서여진(西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나홀라(那忽邏) 등이 와서 토종말과 노랑가슴담비가죽인 초서피(貂鼠皮)를 바쳤다.
|
서여진(西女眞)의 모일라(毛逸羅)로 기재했는데 2년 전 기사인 1019년 8월 고려사(高麗史) 기사에선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로 기재되어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동여진(東女眞)에도 서여진(西女眞)에도 비슷한 시기에 모일라(毛逸羅)라는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고려사(高麗史) 편찬자가 동여진(東女眞)을 서여진(西女眞)으로 잘못 표기했거나 동여진(東女眞)과 서여진(西女眞)에 동명이인이 있었거나
모일라(毛逸羅)는 사람의 명칭이 아닌 여진족(女真族, 女眞族) 내부에서 통용되던 지도자의 호칭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기사이다. 1025년 01월 28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辛亥 女眞酋長毛逸羅來朝, 以有功邊圉, 加授(벼슬을 더하여 준다는 뜻이다)大匡, 優賜衣物.
|
||
|
신해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모일라(毛逸羅)가 내조(來朝)하자, 국경지대를 지키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대광(大匡)으로 올려 제수하였고 옷과 물품을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
여진(女眞)의 추장(酋長) 모일라(毛逸羅)가 내조(來朝)하자, 국경지대를 지키는 데 공이 있다고 하여 대광(大匡)으로 올려 제수하였다(女眞酋長毛逸羅來朝, 以有功邊圉, 加授大匡)라고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본문에 기재된 邊圉(변어)는 아래와 같은 각각의 의미를 지닌 한문이다.
|
邊(변)은 '국경'이나 '국토의 끝'이라는 뜻이며,
圉(어)는 '변경'이나 '국경'이라는 뜻도 있지만 '막다', '막아 지키다'라는 뜻도 있다.
|
따라서 이 문장에 기재된 여진(女眞)은 고려의 국경 내에서 고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여진(女眞)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1025년 1월 고려사(高麗史) 기사에 등장하는 대광(大匡)으로 제수된 모일라(毛逸羅)는 1019년 8월 고려사(高麗史) 기사에 등장하는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와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1019년 8월 기사에 등장하는 동여진(東女眞)의 모일라(毛逸羅)가 예전부터 고려의 관직을 받은 인물로 기재되어 있고 1025년 1월에는 대광(大匡)으로 제수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어서 두 사건은 서로 연결이 된다.
아래는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등장한 내용이다.
|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黑水)가 기재된 기사 |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기재된 기사 |
|
1019년 09월 09일 (음)
임술 중양절(重陽節)이었으므로 저관(邸館)에서 송(宋)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019년 12월 08일 (음)
경인 동흑수국(東黑水國)의 추장(酋長) 구돌라(仇突羅)가 와서 토종말과 무기를 바쳤다.
1021년 07월 20일 (음)
계사 동여진(東女眞)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거울마두개(居蔚摩頭蓋)가 왔다.
1022년 01월 17일 (음)
정해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사일라(沙逸羅)와 만투불(曼投弗)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022년 08월 17일 (음)
철리국(鐵利國)의 수령(首領) 나사(那沙)가 흑수(黑水)의 아부한(阿夫閒)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3년 11월 06일 (음)
11월 병신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야힐라(耶肹羅)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073년 11월 12일 (음)
11월 신해 〈왕이〉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풍악을 관람하였다. 다음 날 대회에서는 대송(大宋)‧흑수(黑水)‧탐라(耽羅)‧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각 예물과 명마를 바쳤다.
1103년 07월 27일 (음)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1017년 08월 29일 (음)
갑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아리불(阿離弗) 등 6인이 내투(來投)하자, 강남(江南)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020년 01월 14일 (음)
병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알시경(閼尸頃)과 고지문(高之問) 등 24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0년 05월 25일 (음)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오두나(烏頭那) 등 70여 인이 와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1년 01월 미상 (음)
이 달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추장(酋長) 아두(阿頭)와 타불(陁弗) 등이 와서 말(馬)과 활, 화살을 바쳤다.
1021년 09월 23일 (음)
을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소홀개(蘇勿蓋)와 고지문(高之門)이 와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2년 05월 25일 (음)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소의(踈意) 등 30여 인이 내조(來朝)하였다.
1023년 01월 미상 (음)
이 달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오사불(烏沙弗) 등 80인이 와서 말과 토산물을 바쳐서 각각 베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1024년 04월 25일 (음)
임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고도매(古刀買)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4년 09월 29일 (음)
갑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아리고(阿里古)가 왔다.
1027년 02월 23일 (음)
갑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아골아가(阿骨阿駕)가 와서 토종말 및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을 바쳤다.
1064년 12월 01일 (음)
거란(契丹)의 고노(高奴) 등 3인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포기(抛棄) 등 8인이 내투(來投)하였다.
|
1103년 07월 27일 (음) 고려사(高麗史) 기사에 등장하는 세력은 완안부(完顔部)인데 이들은 '여진으로서 흑수에 거하는 부족(女眞居黑水者部族)' 내지는
'여진으로 흑수부에 거하는 부족(女直居黑水部者部族)'으로 고려사(高麗史)와 금사(金史)에 기재되어 있듯이
이 당시면 완안부(完顔部)는 흑수(黑水)가 아닌 여진(女眞)으로 분류해야 하기 때문에 완안부(完顔部)는 도표에서 흑수(黑水)로 분류하질 않고 제외했다.
|
년도
|
흑수(黑水)
|
흑수말갈(黑水靺鞨)
|
|
1010년 ~ 1120년
|
1019년 09월 09일 (음)
1019년 12월 08일 (음)
|
1017년 08월 29일 (음)
1020년 01월 14일 (음)
1020년 05월 25일 (음)
|
|
1021년 ~ 1130년
|
1021년 07월 20일 (음)
1022년 01월 17일 (음)
1023년 11월 06일 (음)
|
1021년 01월 미상 (음)
1021년 09월 23일 (음)
1022년 05월 25일 (음)
1023년 01월 미상 (음)
1024년 04월 25일 (음)
1024년 09월 29일 (음)
1027년 02월 23일 (음)
|
|
1031년 이후
|
1073년 11월 12일 (음)
|
1064년 12월 01일 (음)
|
위의 도표를 보면,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고려사(高麗史)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017년에서 1027년까지이다. 이 기간동안 총 15회 등장한다.
그리고 1031년 이후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흑수(黑水)는 1073년에 1회, 흑수말갈(黑水靺鞨)은 1064년에 1회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동번(東蕃)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31년 08월 0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甲申 制曰, “女眞將軍阿豆閒等三百四十戶來投, 勒留嘉·鐵二州之地, 然阿豆閒本東蕃子項史之族, 宜遣置東蕃.”
|
||
|
갑신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여진(女眞)의 장군(將軍) 아두한(阿豆閒) 등 340호가 내투(來投)하자 가주(嘉州)와 철주(鐵州) 땅에 억지로 머물게 하였으나, 아두한은 본래 동번(東蕃)의 자항사(子項史) 종족이므로 마땅히 동번으로 보내 머물게 하라.”라고 하였다.
|
위의 1031년 8월 09일 고려사(高麗史) 기사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최초의 동번(東蕃) 기록이다.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기록이 1027년 이후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때 1031년부터 고려사(高麗史)엔 동번(東蕃)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아래는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동번(東蕃)이 고려를 약탈한 내용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
1036년 02월 22일 (음)
신미 동번(東蕃)의 적선(賊船)이 삼척현(三陟縣) 동진(桐津)의 군영을 침략하여....
1043년 11월 02일 (음)
병인 동번(東蕃)의 도적들이 배 8척을 타고 서곡현(瑞谷縣)을 침입하여......
1046년 07월 20일 (음) (동번이 해적이었는지 정확히 알기 힘들다)
무술 제서를 내리기를, “지난번 동번(東蕃)의 적이 정변진(靜邊鎭)을 포위하였을 때....
1049년 06월 07일 (음)
6월 무진 동번(東蕃) 해적(海賊)이 임도현(臨道縣)에 침략하여 17인을 사로잡아갔다.
1049년 07월 06일 (음)
가을 7월 정유 동번(東蕃) 해적(海賊)이 금양현(金壤縣)에 침략하여 20인을 사로잡아갔다.
1050년 07월 01일 (음) (동번이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가을 7월 병술 초하루 동번(東蕃)의 적(賊)이 파천현(派川縣)을 침략하였다.
1051년 09월 06일 (음) (서북면병마사가 동번적과 싸운 것을 볼 때 이들 동번은 해안가 세력이 아니라고 본다)
갑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종도(朴宗道)가 아뢰기를, “어제 장병을 거느리고 관외(關外)를 순행(巡行)하다가 동번적(東蕃賊)을 만나 10여 급을 쳐서 목 베고......
1056년 07월 17일 (음) (동번이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가을 7월 정유 동번적(東蕃賊)이 변경을 자주 침범하므로....
1064년 07월 04일 (음)
가을 7월 정묘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환가현(豢猳縣)은 지난 무자년(戊子年, 1048)에 동번(東蕃) 해적의 공격을 받아 남녀 100여 인이 살상되었고.....
1073년 06월 24일 (음)
병신 병마사(兵馬使)가 아뢰기를, “동번(東蕃)의 해적(海賊)이 동경(東京) 관할의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범하여....
1080년 12월 01일 (음) (동번이 해적이라는 내용은 없다)
동번(東蕃)이 반란을 일으키자......
|
고려사(高麗史)에는 동번(東蕃)이 고려 침략한 건이 총 11건이며 그 중에 6건은 동번(東蕃)이 해적(海賊)의 형태이거나 배(船)를 이용해 고려를 침략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동번(東蕃)은 해안가에 거주했거나 강을 주변에 둔 해상세력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73년 05월 05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또 〈서북면병마사가〉 아뢰기를, “평로진(平虜鎭) 인근 지역의 번인(蕃人) 우두머리인 유원장군(柔遠將軍) 골어부(骨於夫)와 멱해촌(覓害村)의 요결(要結) 등이 보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
今欲報讎, 告諭化內三山村中尹夜西老等三十徒酋長,【東蕃黑水人, 其種三十, 號曰三十徒】 亦皆響應, 各率蕃軍, 方將進討, 請遣鄕人觀戰.’
|
||
|
지금 원수를 갚으려고 〈고려에〉 귀화한 삼산촌의 중윤(中尹) 야서로(夜西老) 등 삼십도(三十徒)의 추장(酋長)들【동번(東蕃)의 흑수인(黑水人)은 그 종족이 30이므로 삼십도(三十徒)라 부름.】에게 알려 주었더니, 또한 모두 행동을 같이하여 각기 번군(蕃軍)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나아가 토벌하고자 하므로, 요청하건대 고려의 사람[鄕人]들을 보내 전투를 관찰하십시오.’라고 합니다.
|
동번(東蕃)의 흑수인(黑水人)은 그 종족이 30이므로 삼십도(三十徒)라 부름(東蕃黑水人, 其種三十, 號曰三十徒)라고 고려사(高麗史) 편찬자들이 고려사(高麗史)에 주석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 내용을 보면, 1027년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잘 등장하지 않던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대부분 여진(女眞)에게 병합되어 동번(東蕃)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위에 올려드린 내용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판단된다.
|
왕건고려 이후(918년 이후)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고려를 침범하거나 공격한 기사는 없다.
|
||
|
동번(東蕃)이 등장하면서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기사는 고려사(高麗史)에서 각각 1건만 등장했다.
|
||
|
동번(東蕃)이 고려를 공격한 내용은 1036년 02월 22일 (음) 기사가 처음이다. 하지만 이틀 전인 1036년 02월 20일 (음)에 동번(東蕃)의 장군 개로 등 71인이 와서 준마(駿馬)를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동번(東蕃)은 1080년대까지 정치적으로 통일된 세력은 아니었다고 본다.
|
||
|
고려사(高麗史)에선 흑수(黑水)로 분류되는 세력을 동번(東蕃)으로 칭한 내용이 등장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1027년 이후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대부분은 여진(女眞)에게 병합되어 동번(東蕃)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완안부(完顔部), 동번(東蕃), 동여진(東女眞), 여진(女眞) (8) | 2025.08.21 |
|---|---|
| 여진(東女)과 동번(東蕃) 2 (18) | 2025.08.16 |
| 900년대 동여진(東女眞)과 요동반도 여진(遼東半島 女眞) (10) | 2025.08.13 |
| 고려사(高麗史)의 철리(鐵利) (13) | 2025.08.04 |
| 고려사(高麗史)의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2 (10) | 202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