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사(高麗史)의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2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의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2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7. 31. 15:48

아래는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등장한 내용이다.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黑水)가 기재된 기사 936년 일리천 전투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기재된 기사
1019년 09월 09일 (음)
임술 중양절(重陽節)이었으므로 저관(邸館)에서 송(宋)과 탐라(耽羅),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019년 12월 08일 (음)
경인 동흑수국(東黑水國)의 추장(酋長) 구돌라(仇突羅)가 와서 토종말과 무기를 바쳤다.
1021년 07월 20일 (음)
계사 동여진(東女眞)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거울마두개(居蔚摩頭蓋)가 왔다.
1022년 01월 17일 (음)
정해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사일라(沙逸羅)와 만투불(曼投弗)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022년 08월 17일 (음)
철리국(鐵利國)의 수령(首領) 나사(那沙)가 흑수(黑水)의 아부한(阿夫閒)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3년 11월 06일 (음)
11월 병신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야힐라(耶肹羅)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073년 11월 12일 (음)
11월 신해 〈왕이〉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신봉루(神鳳樓)에 나아가 풍악을 관람하였다. 다음 날 대회에서는 대송(大宋)‧흑수(黑水)‧탐라(耽羅)‧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각 예물과 명마를 바쳤다.
1103년 07월 27일 (음)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017년 08월 29일 (음)
갑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아리불(阿離弗) 등 6인이 내투(來投)하자, 강남(江南)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020년 01월 14일 (음)
병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알시경(閼尸頃)과 고지문(高之問) 등 24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0년 05월 25일 (음)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오두나(烏頭那) 등 70여 인이 와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1년 01월 미상 (음)
이 달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추장(酋長) 아두(阿頭)와 타불(陁弗) 등이 와서 말(馬)과 활, 화살을 바쳤다.
1021년 09월 23일 (음)
을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소홀개(蘇勿蓋)와 고지문(高之門)이 와서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1022년 05월 25일 (음)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소의(踈意) 등 30여 인이 내조(來朝)하였다.
1023년 01월 미상 (음)
이 달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오사불(烏沙弗) 등 80인이 와서 말과 토산물을 바쳐서 각각 베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1024년 04월 25일 (음)
임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고도매(古刀買)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024년 09월 29일 (음)
갑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아리고(阿里古)가 왔다.
1027년 02월 23일 (음)
갑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귀덕대장군(歸德大將軍) 아골아가(阿骨阿駕)가 와서 토종말 및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을 바쳤다.
1064년 12월 01일 (음)
거란(契丹)의 고노(高奴) 등 3인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포기(抛棄) 등 8인이 내투(來投)하였다.

 


아래는 위의 도표 중 흑수
(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내용을 요약한 내용이다.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
936년 태조왕건의 일리천 전투 이후 흑수(黑水)는 83년 동안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지 않다가 1019년 9월부터 1103년 7월까지 고려사(高麗史)8회에 걸쳐 등장한다.
흑수(黑水)는 1019년 9월부터 1023년 11월까지 4년 동안 6회에 걸쳐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되어 있다. 이후 1073년과 1103년에 각각 한 번씩 등장한다.
동여진흑수추장(東女眞黑水酋長)이라는 명칭이 1021년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여진으로 흑수에 살고 있는 자(女眞居黑水者)라는 문장이 1103년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1017년 8월부터 1064년 12월까지 흑수말갈(黑水靺鞨)은 11회에 걸쳐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1017년부터 1027년까지 10년 동안 10회에 걸쳐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37년 후에 한 번 등장한다.

흑수(黑水)는 1019년부터 1023년까지 4년 동안 집중적으로 6회에 걸쳐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그리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은 1017년부터 1027년까지 10년 동안 10회에 걸쳐 고려사(高麗史) 등장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이 기간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이후로는 간혹 등장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인 흑수부(黑水部)의 파생 부(部)들이 1027년 이후론 동여진(東女眞) 출신의 여진족(女真族, 女眞族)들에 의해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여러 흑수부(黑水部)들은 여진화(女眞化)가 되면서 더 이상은 흑수부(黑水部)라고 보기 힘든 여진부(女真部, 女眞部)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1021년 고려사(高麗史) 기사에 이미 동여진흑수추장(東女眞黑水酋長)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103년에 완안부(完顔部)를 가리켜 여진으로 흑수에 살고 있는 자(女眞居黑水者)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에 의해 잠식된 흑수부(黑水部)' 내지는 '흑수부(黑水部)의 여진화(女眞化)'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신당서(新唐書) 권219의 말갈(靺鞨) 내용이다. 

 

新唐書/卷21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契丹,本東胡種,其先爲匈奴所破,保鮮卑山。魏青龍中,部酋比能稍桀驁,爲幽州刺史王雄所殺,衆遂微,逃潢水之南,黃龍之北。至元魏,自號曰契丹。地直京

zh.wikisource.org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신당서(新唐書) 권219의 말갈(靺鞨)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틀리게 번역할 수도 있으니 감안하시길 바란다.

靺鞨
黑水靺鞨居肅慎地,亦曰挹婁,元魏時曰勿吉。.........
拂涅,亦稱大拂涅,開元、天寶間八來,獻鯨睛、貂鼠、白兔皮;鐵利,開元中六來;越喜,七來,貞元中一來;虞婁,貞觀間再來,貞元一來。後渤海盛,靺鞨皆役屬之,不復與王會矣。
말갈
흑수말갈은 숙신 지역에 살았는데, 이 지역은 읍루로도 불렸고, 원위 때에는 물길로 불렸다. ........
불열(拂涅)은 대불열(大拂涅)이라고도 불리며, 개원(開元, 756년 ~ 762년)과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시대에 여덟 번이나 찾아와 고래 눈, 검은 담비, 흰 토끼 가죽을 바쳤다. 철리는 개원(開元, 756년 ~ 762년)에 여섯 번이나 왔다. 월희는 일곱 번 왔고, 그 중 한 번은 정원(貞元, 785년 ~ 805년 8월)에 왔다. 우루는 정관(貞觀, 627년 ~ 649년) 기간에 두 번, 정원(貞元, 785년 ~ 805년 8월)에 한 번 왔다. 그 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모든 말갈은 발해에 귀속되어 더 이상 왕을 만나지 못했다.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개원(開元, 756년 ~ 762년)과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 때 불열(拂涅)이 발해(渤海)와는 별개로 당나라(唐)에 조공했음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이다. 

 

金史/卷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湼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

zh.wikisource.org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원문과 번역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할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湼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
금의 선조는 말갈씨이다. 말갈은 본디 물길로 불렸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 원위 때 물길은 7부가 있었다. 속말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로 불렸다. 수나라는 말갈로 칭했고 7부는 동일하다. 당나라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고 그 외 5부는 듣지 못했다.

금사(金史)를 보면,

당나라 초기(唐初) 불열부(拂湼部)는 속말말갈(粟末靺鞨)이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병합되어 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신당서(新唐書)와 금사(金史)를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
금사(金史)
발해(渤海)가 당나라(唐)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과 국명을 받은 713년 이후에도, 불열(拂涅)은 742년에서 762년까지 당나라(唐)에 조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갈(靺鞨)이 물길(勿吉)로 불리던 원위(元魏) 때도 불열부(拂湼部)는 존재하고 있었고 물길(勿吉)이 말갈(靺鞨)로 불리던 수나라(隋) 때도 불열부(拂湼部)는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 초기(唐初)엔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만 있었다고 한다.

불열부(拂湼部)는 물길(勿吉)로 불릴 때도 존재한 오래된 말갈부(靺鞨部)였고 속말부(粟末)와 흑수부(黑水)가 존재하고 있었을 때도 불열부(拂湼部)는 이들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나라(金)를 건국한 여진(女真, 女眞)의 시각을 반영한 금사(金史)에선 당나라 초기(唐初) 이후 불열부(拂湼部)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기술하고있다.

그에 반해 여진(女真, 女眞)과 적대적인 송나라(宋)의 시각을 반영한 신당서(新唐書)에선 불열부(拂湼部)는 발해(渤海)가 등장한 이후에도 당(唐)에 조공하는 등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기재하고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금사(金史)를 검토한 내 개인적인 견해론,

말갈(靺鞨) 흑수말갈(黑水靺鞨)의 후예를 주장하는 여진(女真, 女眞)의 시각을 반영한 금사(金史)에선 당나라 초기(唐初) 이후 다른 말갈부(靺鞨部)들은 속말말갈(粟末靺鞨)과 흑수말갈(黑水靺鞨)로 합병되어 다른 말갈부(靺鞨部)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20년 06월 1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己亥 弗奈國酋長沙訶門遣女眞奴鬱達來, 獻土物.
기해 불나국(弗奈國)의 추장(酋長) 사가문(沙訶門)이 여진(女眞)의 노비 울달(鬱達)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불열부(拂涅部)의 불열(拂涅)은 지금의 중국어 발음으론 fúniè라고 발음한다.

불나국(弗奈國)의 불나(弗奈)는 지금의 중국어 발음으론 fúnài로 발음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학자들은 불나국(弗奈國)을 발해 때 불열부(拂涅部)의 후예로 추정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 견해에 동의한다.

1020년 당시 불나국(弗奈國)의 추장 사가문이 여진족 노비(女眞奴)를 고려(高麗)로 보내 토산물을 고려(高麗)에 바쳤다는 내용이다.

즉, 1020년 당시 불나국(弗奈國)에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거주하고 있었거나 불나국(弗奈國) 주변에 여진부(女真部, 女眞部)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불열부(拂涅部)는 무단강(牡丹江) 동쪽에서 흥개호(兴凯湖) 서쪽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흥개호(兴凯湖) 구글지도이다.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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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google.com

 

아래는 무단강(牡丹江)의 지도를 볼 수 있는 무단강(牡丹江) 위키백과 내용이다. 

 

무단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단강 牡丹江Mǔdānjiāng (지리 유형: 강) 나라 중국 발원지 무단령(牡丹嶺) 북쪽 기슭  - 위치 지린성 둔화시 강원진(江源鎮) 마오점촌(馬五店村) 서남부 하구

ko.wikipedia.org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21년 07월 20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癸巳 東女眞黑水酋長居蔚摩頭蓋來.
계사 동여진(東女眞)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거울마두개(居蔚摩頭蓋)가 왔다.

1021년 7월 20일(음) 고려사(高麗史) 동여진흑수추장(東女眞黑水酋長)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등장한다.

이 문장에 대한 내 개인적인 해석은,

추장(酋長)의 명칭이 거울마두개(居蔚摩頭蓋) 한 명인 것을 볼 때 동여진(東女眞)과 흑수(黑水)라는 서로 별개인 두 세력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동여진흑수(東女眞黑水)라는 하나의 세력을 지칭한다고 본다.

동여진(東女眞)이 흑수부(黑水部) 파생부(部)로 이주하면서 1021년 고려사(高麗史)에선 더 이상 흑수부(黑水部)로도 동여진(東女眞)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부(黑水部)가 있음을 기재한 거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103년 07월 27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

db.history.g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甲辰 東女眞太師盈歌遣使來朝. 有本國醫者, 居完顔部, 善治疾. 時盈歌戚屬有疾, 盈歌謂醫曰, “汝能治此人病, 則吾當遣人歸汝鄕國.” 其人果愈, 盈歌如約, 遣人送至境上, 醫者至言于王曰, “女眞居黑水者, 部族日强, 兵益精悍.” 王乃始通使, 自是來往不阻, 盈歌旣破蕭海里, 報捷于我, 我, 復使人賀之. 盈歌遣其族弟斜葛, 報聘, 王待之甚厚.
갑진 동여진(東女眞)의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 내조(來朝)하였다. 〈일찍이〉 고려(高麗)의 의사(醫者)가 완안부(完顔部)에 머물면서 병을 잘 고쳤다. 그때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사에게 말하기를, “네가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준다면 내가 즉시 사람을 시켜 너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과연 완치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국경까지 보내주었고,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사신으로 왕래하기 시작하여 이후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알려주고 우리도 다시 사신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였다. 영가가 그의 족제(族弟)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로 방문하니, 왕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여진으로 흑수에 거주하는 자(女眞居黑水者)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내용이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 < 고려시대 사료 DB

처음에 어떤 의원이 있었는데 질병을 잘 치료하였으며 본래 고려인이었다. 애초에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며, 그 성명도 역시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진의 완안부(完顔部)에 살았다. 목종(穆宗, 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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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원문과 번역이다.

初, 有醫者善治疾, 本高麗人, 不知其始自何而來, 亦不著其姓名, 居女直之完顔部. 穆宗時戚屬有疾, 此醫者診視之. 穆宗謂醫者曰, “汝能使此人病愈, 則吾遣人送汝歸汝鄕國.” 醫者曰, “諾.” 其人疾果愈, 穆宗乃以初約歸之.
乙離骨嶺僕散部胡石來勃菫居高麗·女直之兩間, 穆宗使族人叟阿招之, 因使叟阿送醫者, 歸之高麗境上. 醫者歸至高麗, 因謂高麗人, “女直居黑水部者部族日强, 兵益精悍, 年穀屢稔”. 高麗王聞之, 乃通使于女直. 旣而, 胡石來來歸, 遂率乙離骨嶺東諸部皆內附.
처음에 어떤 의원이 있었는데 질병을 잘 치료하였으며 본래 고려인이었다. 애초에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며, 그 성명도 역시 밝혀지지 않았는데, 여진의 완안부(完顔部)에 살았다. 목종(穆宗, 盈歌) 때 친족[戚屬]이 질병이 있었는데, 이 의원이 진찰하였다. 목종이 의원에게 말하기를, “너가 능히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서 너의 고국으로 너를 돌려보내주겠다.”라고 하였다. 의원이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의 병이 과연 나았으므로 목종이 처음 약속한대로 돌려보내주었다.
을리골령(乙離骨嶺) 복산부(僕散部)의 호석래(胡石來) 발근(勃菫)이 고려와 여진[女直] 사이에 거주하고 있었다. 목종이 족인(族人) 수아(叟阿)를 시켜 불러오게 하고, 수아로 하여금 의원을 호송하여 고려 국경까지 돌려보내게 하였다. 의원이 돌아가 고려에 도착하여 고려인들에게 말하기를, “여진족으로 흑수부(黑水部)에 사는 부족은 날로 강성해져서 군대는 더욱 정예화되었으며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왕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여진에 사신을 통하였다. 얼마 후에 호석래가 귀부해왔으며 드디어 을리골령 동쪽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모두 내부(內附)하게 하였다.

금사(金史)를 보면,

여진족으로 흑수부(黑水部)에 사는 부족(女直居黑水部者部族)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아래는 고려사(高麗史)금사(金史)의 문장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번역을 비교한 도표이다.

고려사(高麗史)
醫者至言于王曰, “女眞居黑水者, 部族日强, 兵益精悍.”
의사가 고려에 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 군대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사(金史)
醫者歸至高麗, 因謂高麗人, “女直居黑水部者部族日强, 兵益精悍, 年穀屢稔”.
의원이 돌아가 고려에 도착하여 고려인들에게 말하기를, “여진족으로 흑수부(黑水部)에 사는 부족은 날로 강성해져서 군대는 더욱 정예화되었으며 농사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금사(金史)의 문장을 보면,

고려사(高麗史)를 인용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는 女眞居黑水者, 部族日强이라고 기술하면서 임의로 쉼표를 중간에 삽입한 것에 반해

금사(金史)를 인용할 땐 女直居黑水部者部族日强으로 기술하며 중간에 쉼표를 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쉼표를 삽입함에 따라 번역도 차이가 난다.

고려사(高麗史)를 번역할 땐 여진(女眞)으로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자는 부족이 나날이 강성하고..."로 번역했고

금사(金史)를 번역할 땐 “여진족으로 흑수부(黑水部)에 사는 부족은 날로 강성해져서..."로 번역했다.

두 문장은 미세하게 뉘앙스가 다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원문에 쉼표를 삽입하지 않고 번역한 금사(金史)의 번역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본다.

완안부(完顔部)에 거주하던 고려인(高麗人) 의원의 발언을 원문의 뜻을 살려 해석하면,

완안부(完顔部)는 원래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흑수부(黑水部)였지만 이 곳에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이주해오고 이들이 거주하면서 부(部) 자체가 흑수부(黑水部)를 장약한 여진부(女真部, 女眞部)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1102년부터 고려사(高麗史)에선 완안부(完顔部)를 동여진(東女眞)으로 지칭했지만,

1103년 정작 완안부(完顔部)에 거주하던 고려인(高麗人) 의원은 이 완안부(完顔部)를 가리켜 여진족으로 흑수부에 사는 부족(女直居黑水部者部族)으로 지칭하며 완안부(完顔部)의 실체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