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사(高麗史)의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1 본문

만주족은 여진족이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의 흑수(黑水), 흑수말갈(黑水靺鞨)1

박지원( baghatur khan) 2025. 7. 28. 15:50

(女真)과 흑수(黑水)는 서로 구별되는 세력이었지만 여진(女真)이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말갈부(靺鞨部)들을 장악하면서 흑수부(黑水部)에서 파생된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부(部)들은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에 의해 여진화(女眞化)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고려사(高麗史)엔 흑수(黑水)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등장한다.

두 집단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원래 말갈(靺鞨)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에서 적봉시 그리고 조양시 부근에서 활동하던 동호(東胡) 내지는 오환(烏桓)과 같은 계열의 세력이었지만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고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유민들이 요하(遼河)를 건너 동쪽으로 이주하였을 때 말갈(靺鞨) 역시 동쪽으로 이주해서 옛 숙신(肅愼)과 읍루(挹婁)가 활동하던 지역에 정착한 후 그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또한 위만조선(衛滿朝鮮) 부근에 위치한 진번(真畨,眞番) 역시 요하(遼河)를 건너 동쪽으로 이주한 후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면서 이들은 후에 주리진(珠里真) 내지는 여진(女真)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아마도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흑수(黑水)는 이 지역의 원주민인 숙신(肅愼)의 후예 및 읍루(挹婁), 여진(女真)과 함께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 세력으로 보이며

흑수말갈(黑水靺鞨)은 흑수(黑水)와는 달리 그 지역의 원주민이나 여진(女真)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원래 말갈(靺鞨)의 풍속과 모습을 유지하던 세력이라고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에 흑수(黑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왕건의 고려(高麗) 때가 아닌 궁예왕 때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윤선(尹瑄)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윤선(尹瑄)은 염주(塩州)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맹하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韜鈐]을 잘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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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윤선(尹瑄)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尹瑄, 塩州人. 爲人沉勇, 善韜鈐. 初以弓裔誅殺無厭, 慮禍及己, 遂率其黨, 走北邊. 聚衆至二千餘人, 居鶻巖城, 召黑水蕃衆, 久爲邊郡害. 及太祖卽位, 率衆來附, 北邊以安.
윤선(尹瑄)은 염주(塩州)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맹하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韜鈐]을 잘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내 그의 족당을 이끌고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2,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하여 흑수말갈[黑水蕃]의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시간이 흐르자 변방 군(郡)들에 해를 끼쳤다. 태조가 즉위하자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부하여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내 그의 족당을 이끌고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2,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하여 흑수말갈[黑水蕃]의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시간이 흐르자 변방 군(郡)들에 해를 끼쳤다(初以弓裔誅殺無厭, 慮禍及己, 遂率其黨, 走北邊. 聚衆至二千餘人, 居鶻巖城, 召黑水蕃衆, 久爲邊郡害)라고 기재되어 있다.

윤선이 궁예왕을 피해 그의 족당을 이끌고 궁예왕의 나라(아마도 후고구려가 아닌 마진이나 태봉으로 추정된다)의 변방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윤선이 족당, 2000여명의 무리를 모아서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하고는 흑수번(黑水蕃)의 무리까지 모아 변방의 군(郡)에 해를 끼쳤다고 한다.

이 당시는 918년 전이고 발해(渤海) 말기이다.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흑수(黑水)가 발해(渤海)에서 이탈하던 시기인 921년보다 최소한 3년 전의 사건이다.

윤선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윤선의 세력인 흑수번(黑水蕃)이 마진(摩震) 내지는 태봉(泰封)의 변방 군(郡)에 해를 끼쳤다면 골암성(鶻巖城)은 당시 발해(渤海)의 영토일 수도 있다.

발해(渤海) 말기가 되면 흑수(黑水)는 발해(渤海)에서 이탈하고 부근의 마진(摩震)이나 태봉(泰封)의 이탈 세력과 함께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4년 2월 기록이다. 921년 02월 07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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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위의 태조 4년 2월 기록을 원문과 번역 그대로 올려드린다.

(辛巳)四年 春二月 甲子 黑水酋長高子羅, 率百七十人來投.
〈신사〉 4년(921) 봄 2월 갑자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고자라(高子羅)가
17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기사는 고려태조 왕건 이후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등장한 흑수(黑水)에 대한 내용이다.

궁예왕 때 흑수(黑水)에 대한 기사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지만 태조왕건 이후는 이 기사가 최초로 흑수(黑水)가 등장하는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윤선의 내용처럼 흑수(黑水)가 발해(渤海)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기술한 내용이다. 다만 흑수(黑水)가 윤선과 함께 마진(摩震)이나 태봉(泰封)의 변방을 공격하는 내용은 아니며 흑수(黑水)의 추장과 그 세력이 왕건고려(王建高麗)로 내투하는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왕건고려(王建高麗) 이전의 궁예왕 때를 제외하곤 흑수(黑水)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고려(高麗)와 충돌한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4년 4월 기록이다. 921년 04월 2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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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위의 태조 4년 4월 기록을 원문과 번역 그대로 올려드린다.

夏四月 乙酉 黑水阿於閒率二百人來投.
여름 4월 을유 흑수(黑水)의 아어간(阿於閒)이 20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하는 흑수(黑水)에 대한 기사이다. 역시 발해(渤海) 멸망 전에 발해(渤海)에서 이탈하는 흑수(黑水)에 대한 기사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甲午 隔一利川而陣, 王與甄萱觀兵. 以萱及大相堅權·述希·皇甫金山, 元尹康柔英等, 領馬軍一萬, 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 正朝英直·廣世等, 領步軍一萬爲左綱. 大相金鐵·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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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大相庾黔弼, 元尹官茂·官憲等, 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여러 번(蕃)의 정예 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고려(高麗) 초기 흑수(黑水)가 등장하는 세 건의 고려사(高麗史) 기사 내용은 모두 고려태조 왕건 당시를 기술한 내용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일리천 전투 때인 936년 이후 흑수(黑水)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기록은 81년 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그 81년 동안은 거란(契丹)이 확장하던 시기였고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이 서로 무력충돌을 일으키던 시기도 포함되어있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권15의 내용이다.

 

遼史/卷15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zh.wikisource.org

1011년 1월 1일의 번역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것이고 그 아래의 1월 14일부터 1월 24일까지의 내용은 내가 번역한 내용이다.

二十九年春正月
乙亥朔,班師,所降諸城復叛。至貴州南峻嶺谷,大雨連日,馬駝皆疲,甲仗多遺棄,霽乃得渡。
己丑,次鴨淥江(압록강에 이르렀다)
庚寅,皇后及皇弟楚國王隆祐迎於來遠城
壬辰,詔罷諸軍。
己亥,次東京
29년 춘정월
1011년 1월 1일(음력) 군대를 철수시키자 항복했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서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지자 갑옷과 병장기를 많이 버렸으며, 날이 개어서 겨우 건넜다.
1011년 1월 14일(음력) 압록강(鴨淥江, 지금의 요하[遼河]라고 본다)에 도달했다.
1011년 1월 15일(음력) 황후와 황제의 동생 초국왕(楚國王) 융우(耶律隆祐 야율융우)래원성(來遠城)에서 영접하였다.
1011년 1월 17일(음력) 모든 군대를 거두었다.
1011년 1월 24일(음력) 동경(東京)에 도달했다.

요사를 보면,

1011년 1월 24일 거란군(契丹軍)이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거란(契丹)의 2차 침입으로 불리는 전쟁이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제2차 전쟁은 1011년 1월에 마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다음백과에서 설명하는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 내용이다.

 

거란의 침입

고려는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했다. 942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을 청했으나 태조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거란은 993년 고려를 침략했

100.daum.net

아래는 다음백과에서 설명하는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을 설명하는 본문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그뒤 거란은 고려가 국왕의 친조약속을 지키지 않고, 강동6주의 반환요구도 거절하자 1018년(현종 9) 또다시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감찬 등이 흥화진·구주 등지에서 거란군에게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주어 그들의 의도를 제지시켰다.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목적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려와 송의 반거란 연합전선의 형성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거란은 소손녕과 서희가 회담을 할 때부터 고구려의 영토는 거란의 소유라면서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의 영토를 요구했고, 그후에도 고려가 개척한 강동6주를 계속 요구했다.
또한 당시 거란은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둘러싸고 송과 대치했으며, 압록강 유역에서 거란에 의해 밀려난 여진족과 발해유민과도 적대관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발해유민도 송과 군사적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거란에 대항하고자 했는데, 여기에 고려가 가세한다면 거란에게는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란은 송을 침략하기에 앞서 먼저 고려를 침으로써 배후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란(契丹)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019년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은 1019년에 마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현종 5년 기사이다. 1014년 02월 08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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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현종 6년 본문과 번역이다.

鐵利國主那沙, 使女眞萬豆來, 獻馬及貂鼠·靑鼠皮.
철리국주(鐵利國主) 나사(那沙)가 여진(女眞)의 만두(萬豆)를 사신으로 보내 말과 담비의 초서피(貂鼠皮)와 날다람쥐의 청서피(靑鼠皮)를 바쳤다.

일리천 전투 때인 936년 이후 철리(鐵利)에 대한 기록이 78년만인 1014년에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했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은 1019년에 종결되었지만 철리(鐵利)는 전쟁 종결 5년 전에 다시 고려(高麗)에 등장한다.

1011년 제2차 전쟁에서 고려(高麗)와 거란(契丹) 외의 제3자인 철리(鐵利)가 어느정도 전쟁의 최종결과를 예측한 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현종 8년 기사이다. 1017년 08월 2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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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현종 8년 본문과 번역이다.

甲午 黑水靺鞨阿離弗等六人來投, 分處江南州縣.
갑오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아리불(阿離弗) 등 6인이 내투(來投)하자, 강남(江南)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리천 전투 때인 936년 이후 흑수(黑水)에 대한 기록이 81년만인 1017년에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했다.

물론 흑수(黑水)가 아닌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기사이지만 모두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로 본다면 81년 만에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이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 것이다.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은 1019년에 종결되었고 흑수(黑水)는 전쟁 종결 2년 전 고려(高麗)에 등장했다.

즉, 일리천 전투 이후 78년 만에 철리(鐵利)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했고 3년 후엔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도 일리천전투 이후 81년 만에 고려사(高麗史)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철리(鐵利)에 이어 흑수(黑水) 역시 고려(高麗)와 거란(契丹)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어느정도 예측한 후 행동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