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발해(渤海) 멸망 전후의 흑수(黑水)와 여진(女真) 본문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4년 2월 기록이다. 921년 02월 07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에 위의 태조 4년 2월 기록을 원문과 번역 그대로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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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四年 春二月 甲子 黑水酋長高子羅, 率百七十人來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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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4년(921) 봄 2월 갑자 흑수(黑水)의 추장(酋長) 고자라(高子羅)가
17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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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는 926년에 멸망한다. 그런데 멸망하기 5년 전인 921년에 흑수의 추장 고자라가 170인을 거느리고 고려에 내투했다(黑水酋長高子羅, 率百七十人來投)는 기사가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한다.
즉, 흑수(黑水)가 발해(渤海)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내용이며 흑수(黑水)에 대한 발해(渤海)의 장악력이 훼손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4년 4월 기록이다. 921년 04월 29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db.history.go.kr
아래에 위의 태조 4년 4월 기록을 원문과 번역 그대로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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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四月 乙酉 黑水阿於閒率二百人來投.
여름 4월 을유 흑수(黑水)의 아어간(阿於閒)이 200인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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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黑水) 추장 고자라에 이어 흑수의 아어간도 200인을 거느리고 고려에 내투했다(黑水阿於閒率二百人來投)는 기사가 등장한다.
고자라가 170인을 거느리고 내투한지 2개월 후 아어간도 200인을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내투했다는 것은 흑수인(黑水人)들이 발해(渤海)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며 흑수(黑水)에 대한 발해(渤海)의 장악력이 훼손되었다는 뜻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5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五 部族〈五〉 靺鞨 南北朝 北史靺鞨即古肅慎氏也所居多依山水渠帥曰大莫弗瞞咄〈案滿洲語謂長曰達稱老
zh.wikisource.org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 본문과 번역이다.
남주성 박사님의 만주원류고(글모아 출판) 번역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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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册府元龜>
後唐同光二年九月黑水國遣使朝貢三年黑水胡獨鹿〈按滿洲語令急速曰呼都拉與胡獨鹿音近〉等遣使朝貢三年青州奏市到黑水馬三十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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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원구>
후당 동광 2년(924) 9월에 흑수국에서 사진을 보내 조공하였다. 3년(925)에 흑수 호독록(살펴보건대 만주어로 서둘러라[令急速]를 호도랍[呼都拉]이라고 하는데 호독록[胡獨鹿]과 발음이 비슷하다) 등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년(925)에 청주에서 보고하기를 "시장에 흑수부 말 30필이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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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이외에 책부원구(册府元龜)에서도 발해(渤海) 멸망 전 흑수(黑水)가 독자적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낸다.
즉, 발해(渤海)의 멸망에 앞서 흑수(黑水)가 독자적으로 외교활동한 것이다.
흑수(黑水)에 대한 발해(渤海)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모습은 고려사(高麗史) 외에 북송(北宋)의 기록인 책부원구(册府元龜)에서도 등장한다.
흑수(黑水)는 발해(渤海)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후당(後唐)에 조공하는 것을 볼 때 발해(渤海)에서 독립내지는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이다.
金史/卷1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湼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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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금사(金史)의 원문과 번역일부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어색할 수 있다.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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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
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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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발해는 번성하고 강력해졌으며 흑수도 발해에 속하게 되어 조공이 끊어졌다. 오대 때 거란이 발해의 영토를 취했고,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귀부해 속하게 되었다. 그 땅의 남쪽은 거란에 적했고(거란의 명부에 기록되었고) 이들은 숙여진으로 불렸다. 하지만 북쪽은 거란에 적하지 않아(거란의 명부에 기록되지 않아) 생여진으로 불렸다.
생여진의 땅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으며, 혼동강은 흑룡강으로도 불린다, 소위 '백산,흑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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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를 보면,
발해는 번성하고 강력해졌으며 흑수도 발해에 속하게 되어 조공이 끊어졌다. 오대 때 거란이 발해의 영토를 취했고,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귀부해 속하게 되었다. 그 땅의 남쪽은 거란에 적했고 이들은 숙여진으로 불렸다. 하지만 북쪽은 거란에 적하지 않아 생여진으로 불렸다(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라고 기재되어 있다.
흑수(黑水)가 발해(渤海)에 귀속되었다가 발해(渤海)가 거란(契丹)에 멸망된 후 흑수(黑水)는 거란(契丹)에 다시 귀속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면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란(契丹)에 귀속되었으면 이후엔 거란(契丹)에 귀속된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해서 기술해야 하는데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아닌 숙여진(熟女直)과 생여진(生女直)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즉, 흑수(黑水) 내지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서 앞뒤 설명없이 여진(女真)으로 대상이 바뀐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대금국지(大金國志) 내용이다.
大金國志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臣懋昭上言:竊惟紀外國之暦年,簡書具在;考累朝之文館,事迹难磨。爰輯遺聞,少裨淵覽。伏念臣偷生淮浦,竊祿金朝,少讀父書,因獲清流之選;日親文苑,粗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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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유기백과에서 제공하는 대금국지(大金國志) 본문과 번역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을 통해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이 어색할 수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에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기재한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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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云:契丹乘唐衰興北方,吞諸番三十六,女真在其中。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而著籍焉,分其勢,使不得與本國通,謂之“合蘇欸”。
自咸州東北分界入宮口至束沫江,中間所居之女真,隸咸州兵馬司,與其國往來無禁,謂之“回霸”。
極遠邊而野居者,謂之“黃頭女真”。
又,居束沫江之北,寧江州之東,地方千餘里,戶十餘萬。無大君長,亦無國名,止是族帳散居山谷間,自推豪傑為酋長。小者千戶,大者數千戶,蓋七十二部落之一也。僻處契丹東北隅,臣屬一百餘年,世襲節度使,兄弟相傳,周而復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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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말에 의하면 : 당나라가 쇠퇴할 때 거란은 북방에서 발흥해서, 여러 36개 변방세력(番)을 병합했고 그 중에 여진이 있다는 설도 전해진다. 거란은 여진이 근심거리가 될 것이 두려워, 호족 수천가를 꾀어 요양의 남쪽으로 이주시켜 거란에 호적하게 하고, 그 기세를 분산시켰으며, 사신이 본국과 소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합소애"라고 칭했다.
함주시 북동쪽 경계에서 궁구에서 속말강까지, 중간에 여진이 거주하는 지역은, 함주병마사에 예속되었으며,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회패(回霸, 휘발[辉发]여진을 지칭한다)"라고 불렸다.
아주 먼 변방 지역의 들판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황두여진"이라고 부른다.
또한, 속말강 북쪽에 거하며, 영강주(寧江州, 지금의 길림성 부여시로 추정된다)의 동쪽에 있으며, 그 땅은 대략 천리이고, 가구 수는 대략 10만이다. 대군장도 없으며, 국가의 명칭도 없고, 다만 족들(族, 가족은 아니며 부족으로 해석된다)의 천막이 산 골짜기 간에 흩어져 산제해 있고, 각자의 호걸을 추장으로 추대한다. 작게는 수가 천 가구이고, 크게는 수천 가구이며, 아마도 72개 부락 중 하나이다. 거란의 북동쪽 모퉁이 궁벽한 곳에 거하는 이들은, 대략 100년 가량 속국이었으며, 형제 간 끊이지 않고 절도사(節度使)라는 칭호가 세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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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국지(大金國志)에 보면,
거란은 여진이 근심거리가 될 것이 두려워, 호족 수천가를 꾀어 요양의 남쪽으로 이주시켜 거란에 호적하게 하고, 그 기세를 분산시켰으며, 사신이 본국과 소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합소애"라고 칭했다(契丹恐女真為患,誘豪右數千家處之遼陽之南而著籍焉,分其勢,使不得與本國通,謂之“合蘇欸”)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 합소애(合蘇欸)는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여진(女真)이며 이들을 거란(契丹)에선 숙여진(熟女直)으로 칭했다.
금사(金史)와 대금국지(大金國志)의 문장을 보면 네 가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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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흑수(黑水)에 대해서 기술하다가 아무런 설명이 없이 여진(女真)으로 대상이 바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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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국지(大金國志)에선 5개 세력의 여진(女真)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여진(女真)으로 불린 흑수 6부(黑水六部)를 제외하면 발해(渤海) 멸망 전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데 왜 이렇게 여진(女真)의 세력이 많아졌나?
발해(渤海)는 분명 여러 말갈부(靺鞨部)와 흑수부(黑水部)를 통합한 나라인데 발해 멸망 전후엔 왜 이렇게 여진(女真)의 세력이 많아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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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란(契丹)은 발해(渤海)가 멸망하자 여진(女真)이 근심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여진(女真)의 일부를 꾀어서 지금의 요동반도로 이주시키고 본국(本國)과의 소통을 막아 여진(女真)을 분리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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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은 분리시킨 여진(女真)을 본국(本國)과 소통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요동반도에 이주된 여진(女真)의 원래 본국(本國)은 어디였을까?
거란(契丹)은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女真)을 이주시켜 서로 분리시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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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발해(渤海) 말기에 흑수(黑水)가 발해(渤海)의 영향력을 벗어나 고려(高麗)에 내투하거나 후당(後唐)에게 조공하는 원인은.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던 여진족(女真族, 女眞族)들이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말갈부(靺鞨部)들로 이주하고 그 부(部)들을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이 장악했거나 장악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발해(渤海) 말에 흑수(黑水)가 발해(渤海)를 이탈해서 고려(高麗)로 내투하거나 독립해서 후당(後唐)에 조공을 하고 발해(渤海) 멸망 전후론 많은 여진(女真) 세력들이 흑수(黑水)를 대체해 등장한 거라고 본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 기재된,
흑수부엔 6개 부가 속해있으며, 그들이 지금의 여진이다(其屬分六部,有黑水部,即今之女真)라는 문장이나
금사(金史)에 기재된,
여진으로서 흑수부에 사는 부족(女直居黑水部者部族)이라고
완안부(完顔部)를 지칭한 것은 연해주 남부의 여진(女真)이 여러 흑수부(黑水部)의 파생 부(部)들을 여진화(女眞化) 시켰다는 뜻이라고 본다.
즉, 여진족(女真族, 女眞族)들이 흑수말갈(黑水靺鞨) 계열의 각 부(部)들을 장악하면서 발해(渤海) 내부에 혼란과 균열이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거란(契丹)은 발해(渤海) 멸망 후 이러한 여진(女真)의 위험성을 알고 바로 여진(女真)을 분리시켜 이들의 힘을 약화시킨 거라고 본다.
여기서 거란(契丹)의 요양 남쪽(遼陽之南)으로 이주된 여진족(女真族, 女眞族)의 본국(本國)은 요동반도로 이주하기 전 이들의 출신 지역을 뜻한다고 본다.
아마도 이들의 출신지는 지금의 길림시 주변과 하얼빈 주변이라고 해석된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 보면,
함주시 북동쪽 경계에서 궁구에서 속말강까지, 중간에 여진이 거주하는 지역은, 함주병마사에 예속되었으며,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회패(回霸, 휘발[辉发]여진을 지칭한다)"라고 불렸다(自咸州東北分界入宮口至束沫江,中間所居之女真,隸咸州兵馬司,與其國往來無禁,謂之“回霸”)라고 기술한다.
이 내용은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 기술한 여진(女真)의 5개 세력 중 회패(回霸)에 대한 설명이다. 이들은 거란(契丹)의 요양 남쪽(遼陽之南)으로 이주시킨 숙여진(熟女直)과는 달리 다른 곳과 교류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숙여진(熟女直)이 본국(本國)과의 교류가 금지된 것에 비해 회패(回霸)는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는 것은 숙여진(熟女直)이 회패(回霸)출신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숙여진(熟女直)을 본국(本國)과 분리시킨 것은 여진(女真)의 단합을 두려워한 거란(契丹)의 조치였다. 따라서 회패(回霸)가 자유로이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숙여진(熟女直)과의 단합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론,
거란(契丹)이 회패(回霸)를 제대로 장악했고 통제했는지도 의문이다.
거란(契丹)과 고려(高麗) 간의 힘의 완충지대에 회패(回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 보면,
속말강 북쪽에 거하며, 영강주(寧江州, 지금의 길림성 부여시로 추정된다)의 동쪽에 있으며, 그 땅은 대략 천리이고, 가구 수는 대략 10만이다. 대군장도 없으며, 국가의 명칭도 없고, 다만 족들의 천막이 산 골짜기 간에 흩어져 산제해 있고, 각자의 호걸을 추장으로 추대한다. 작게는 수가 천 가구이고, 크게는 수천 가구이며, 아마도 72개 부락 중 하나이다. 거란의 북동쪽 모퉁이 궁벽한 곳에 거하는 이들은, 대략 100년 가량 속국이었으며, 형제 간 끊이지 않고 절도사라는 칭호가 세습되었다(居束沫江之北,寧江州之東,地方千餘里,戶十餘萬。無大君長,亦無國名,止是族帳散居山谷間,自推豪傑為酋長。小者千戶,大者數千戶,蓋七十二部落之一也。僻處契丹東北隅,臣屬一百餘年,世襲節度使,兄弟相傳,周而復始)라고 기재되어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속말강(束沫江)은 지금의 북류 송화강(제 2송화강)으로 해석되며 형제 간에 절도사(節度使)가 세습되었다는 내용까지 있는 것을 볼 때 이 문장은 완안부여진(完顔部女真)에 대한 내용이라고 본다.
숙여진(熟女直)은 본래 완안부(完顔部)와 그 지역의 여진부(女真部) 그리고 흑룡강과 연해주에 위치한 흑수 6부(黑水六部) 중 거란(契丹)의 영토 안에 있는 흑수말갈(여진족화 된 흑수말갈) 출신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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