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 서경과 주몽의 졸본부여 (수정된 내용)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고려 서경과 주몽의 졸본부여 (수정된 내용)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7. 4. 16:19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帝王韻紀 卷下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db.history.go.kr

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주몽이 고구려현을 건국할 때 주변의 비류국과 개국의 선후, 부용관계를 다툰 것을 보면 주몽의 고구려현[졸본부여]과 송양의 비류국은 근접해있다)

고려의 서경(西京)에 대해서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가 직접 위치를 밝히고 있다.

바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라고 위치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현재 국내에 대다수 학자들은 북한의 평양(平壤)을 고려의 서경(西京)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평양(平壤)이 현재 북한의 평양(平壤)이고 그 지역이 고려의 서경(西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 때 인물인 이승휴는 현재 고려의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 주변에 비류국(沸流國)이 있고 그 나라의 왕은 송양(松讓)이라고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 평양(平壤)의 위치는 학설이 갈리지만,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의 위치는 요동(遼東) 지역 내지는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으로 인식한다.

고려 때 인물인 이승휴가 고려의 서경(西京)을 밝힌 것이니 어떠한 기록보다도 고려 서경(西京)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 본다.

또한 제왕운기의 내용을 보면,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에 존재한 옛 비류국(沸流國)에서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럼 고려 때도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이 현재와 같이 압록강(鴨綠江)보다 북쪽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확인한 사료에 의하면 "그렇다!" 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db.history.go.kr

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音述水.” ,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세 명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고구려가 등장하는 데엔 두 가지 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그 중 한 가지인데, 주몽은 졸본천 내지는 홀승골성에 이르렀고 이 곳의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으며 이 때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지었고 자신을 성을 고씨로 삼았다는 설이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구려가 등장하는 데엔 두 가지 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앞에서 밝힌 내용과 다른 또 다른 내용인데,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고 그 졸본부여의 왕이 아들이 없자 졸본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때 저술된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엄사수(淹㴲水)의 위치를 직접 밝히고 있다.

압록강(鴨綠江) 동북쪽에 주몽이 건넌 엄사수(淹㴲水)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주몽이 건넌 강은 압록강(鴨綠江)의 동북쪽에 위치한 강이다(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대략적인 위치만 아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몽이 정착한 곳은 졸본천(卒本川) 주변이며 비류수(沸流水) 주변에 초막을 짓고 고구려(髙句麗)를 세웠다고 기재한다.

혹은 고구려(髙句麗)가 아니라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세웠다고도 기재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졸본(卒本) 안에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압록강(鴨綠江)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압록강

 

www.google.co.kr

의 구글지도를 보면 압록강(鴨綠江)이 보인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엄사수(淹㴲水)의 위치는 압록강(鴨綠江)의 동북쪽이라고 한다.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의 합류지점을 기준으로 그 곳에서 동북쪽이라고 하면 현재 길림시(吉林市) 아래 지역이며 이 영역은 바로 옛 부여국(夫餘國)의 영역에 해당된다.

하지만 압록강(鴨綠江)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 영안시(宁安市)나 그 아래 지역에 해당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과 번역이다.

 

주제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고구려의 시조 신화인 주몽(朱蒙) 신화를 전하는 자료는 다양한 계통이 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고구려 당시에 작성된 자료인 고구려 금석문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이다. ‘광개토왕비’와

contents.history.go.kr

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罡, 履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字) 불명(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 서쪽 산 위[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졸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다.

고려인들이 이 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고려 때 삼국사기의 내용과 지리적 묘사는 같다고 본다.

주몽이 건넌 강은 부여(夫餘)에 있는 엄리대수(奄利大水)라고 한다.

고구려인들 역시 주몽이 건넌 강은 부여(夫餘)에 있는 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엔 주몽이 압록강(鴨綠江) 동북쪽의 엄사수(淹㴲水)를 건넜다 기재하고 있고 압록강(鴨綠江)과 압강(鴨江) 합류지점에서 동북에 동부여(東夫餘)의 중심지로 추정하는 길림(吉林)과 제2송화강이 있으니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의 내용은 대략 일치한다. (다만, 고려에선 주몽이 건넌 강을 지금의 모단강[牡丹江]으로 보고 지금의 모단강[牡丹江] 동쪽에 동부여[東夫餘]가 있었다고 보는 것 같다)

주몽은 그 강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지역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부여 지역의 강을 건너 크게 멀지 않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즉, 부여지역의 강을 건넌 후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고구려(髙句麗)를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에선 졸본부여[卒本扶餘]로도 칭한다)

 

 

아래는 중국 길림시(吉林市)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지린 시 · 중국 지린 성

중국 지린 성

www.google.co.kr

록강(鴨綠江) 동북쪽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길림시(吉林市) 일대는 송원시(松原市) 일대와 더불어 옛 부여국(夫餘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는 지역이다.

아래는 옛 부여(夫餘)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송원시(松原市)의 구글지도이다. 길림시(吉林市)에서 서북쪽에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송원시(松原市) 일대가 북부여(北夫餘)이고 길림시(吉林市) 일대는 금와의 동부여(東夫餘) 정권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한다.

 

Google Maps

Find local businesses, view maps and get driving directions in Google Maps.

www.google.co.kr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동무가 되어 엄수(淹水) 지금은 어딘지 자세하지 않다.까지 와서 물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오늘 도망을 가는 길에 뒤따

db.history.go.kr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db.history.go.kr

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본문과 번역이다.

於是蒙與烏伊䓁三人爲友行, 至淹水 今未詳.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追者垂及奈何.” 扵是魚鼈成橋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夲州 玄菟郡之界.遂都焉. 未遑作宫室但結廬扵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高爲氏, 夲姓解也. 仐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時年十二歳,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歳即位稱王. 高麗全盛之日二十一万五百八户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동무가 되어 엄수(淹水) 지금은 어딘지 자세하지 않다.까지 와서 물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손자인데 오늘 도망을 가는 길에 뒤따르는 자가 쫓아 닥치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고기와 자라들이 나와 다리가 되어 물을 건너게 하고 나서 다리는 풀려 버려, 추격하던 말 탄 자들은 물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졸본주 현토군의 지역이다.까지 와서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하였다.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어 그저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따라서 고씨로 성을 삼으니 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이제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여 자신이 높을 고자로 성을 삼았다. 당시의 나이가 열두 살이요,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甲申)에 즉위하고 왕으로 일컬었다. 고[구]려의 전성시대에는 210,508호였다.

 

髙句麗
髙句麗即卒夲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䓁”, 皆誤矣. 卒夲州在遼東界.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삼국유사 역시 제왕운기나 삼국사기처럼 고려 때 저술된 책이다.

삼국유사의 저자는 주몽의 고구려는 졸본부여(髙句麗即卒夲扶餘也)이며 고구려를 세운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卒夲州在遼東界)고 밝히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엄수(淹水)가 현재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에서도 부여(扶餘)지역이나 압록강(鴨綠江) 동북쪽의 강이라는 것 외엔 그 강의 정확한 위치는 기재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것만 알고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내 개인적으론 북쪽으로 흐르는 길림시(吉林市) 아래의 송화강(松花江)으로 해석되는데 고려에선 지금의 영안시(宁安市) 아래를 흐르는 모단강(牡丹江)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고려 때 저술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비류수(沸流水) 주변의 졸본(卒本)지역이며 졸본(卒本)의 주변엔 비류국(沸流國)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제왕운기에선 비류수[沸流水]나 졸본[卒本]이라는 지명은 등장하진 않고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만 기재했다. 그리고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이 주몽의 고구려 근처에 있는 것처럼 해석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를 보면,

부여(夫餘) 내지는 압록강(鴨綠江) 동북지역에서 남하해서 비류국(沸流國)과 인접한 비류수(沸流水)를 낀 졸본(卒本) 지역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며,

삼국유사에선 이 졸본(卒本)을 요동(遼東)에 있다고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다 후대에 저술한 제왕운기에선,

저자가 직접 지금 고려의 서경(西京)이 바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이고 그 지역은 옛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이었다고 밝힌다.

라서 고려 서경(西京)은 현재 남북한의 대다수 학자들이 주장하는 북한의 평양(平壤)이 아니라 압록강(鴨綠江) 위 지역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이라고 본다.

(제왕운기에선 고려 서경[西京]이 압록강[鴨綠江] 위라고 기재되어 있진 않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선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은 압록강[鴨綠江] 보다 북쪽에 위치한다.

삼국사기 저자의 주장으론 지금의 요하[遼河] 주변이나 요하[遼河] 서쪽에서 주몽이 고구려[髙句麗]를 세운 것이 되는데 그 역시도 압록강[鴨綠江] 보다는 북쪽이다.

또한 고려사의 1388년 철령위 설치에 대항하는 내용을 보면 압록강[鴨綠江]과 고려 서경[西京], 고려 평양[平壤]은 인접한 곳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 요령성 환인현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현재는 만주족자치현이라고 한다.

 

환런 만족 자치현 ·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중국 랴오닝 성 번시 시

www.google.co.kr

 

아래는 요하(遼河, 辽河)의 구글지도이다.

 

Liaohe River · 중국

★★★★☆ · 강

www.google.co.kr

삼국사기의 저자는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大遼國東亰之西)에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卒本)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거란의 동경 서쪽이면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이나 요하[遼河]의 서쪽지역에 해당된다)

 

또는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사위가 되어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위를 물려받았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저자의 논리라면 비류수[沸流水]는 지금 요하[遼河]부근이나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