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삼한(三韓)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삼한(三韓)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6. 20. 17:09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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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因分此地爲四郡, 各置郡長綏民編. 眞番臨屯在南北, 樂浪玄菟東西偏. 胥匡以生理自絶, 風俗漸醨民未安. 隨時合散浮沈際, 自然分界成三韓. 三韓各有幾州縣, 蚩蚩散在湖山間. 各自稱國相侵凌, 數餘七十何足徵.稱國者, 馬有四十, 辰有二十, 幷有十二. 於中何者是大國. 先以扶餘檀君本紀曰, “與非西岬河伯之女婚而生男, 名夫婁.” 東明本紀曰, “扶餘王夫婁, 老無子, 祭山川, 求嗣. 所御馬, 至鯤淵, 見大石流殘. 王怪, 而使人轉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曰, ‘天錫我令胤乎?’ 立爲太子, 名曰金蛙. 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濱有地, 號迦葉原, 土宜五穀, 可都也.」’ 勸王移都, 號東扶餘云云.” 臣嘗使於上國, 至遼濱路傍, 有立墓, 其人曰, “扶餘駙馬大王墓也.” 又賈耽曰, “大原南, 鴨綠血, 扶餘舊地.” 則北扶余者, 宜在遼濱. 其開國, 蓋自後朝鮮, 而至此, 幾矣. 沸流稱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 日淺, 爲我附庸, 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膺. 此諸君長問誰後, 世系亦自檀君承. 其餘小者名何等, 於文籍中推未能. 今之州府別號是, 諺說那知應不應. 想得漢皇綏遠意, 定黎蒸處害黎蒸, 辰馬弁人終鼎峙, 羅與麗濟相次興. 自分爲郡至羅起, 計年七十二算零.
이로 인하여 이 땅이 4군(四郡)으로 나뉘었으니, 각 군(郡)에 장(長)을 두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모여 살게 하였다네.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남북에 있고, 낙랑(樂浪)과 현도(玄菟)가 동서로 치우쳐 있었도다. 서로 싸우다가 도리를 스스로 끊어 버리니, 풍속은 날로 얄팍해지고 백성들은 안정되지 못하였다네. 때때로 모이고 흩어지며 부침(浮沈)하는 사이에, 자연히 경계가 나뉘어져 삼한(三韓)을 이루었도다. 삼한에는 몇몇 주현(州縣)이 있었으나, 어지러이 강과 산간에 흩어져 있었네. 각각 스스로 나라를 칭하고는 서로 침노하였으니, 숫자를 어찌 70여 개로 족히 칭할 수 있겠는가?(나라를 칭한 것이, 마한(馬韓)은 40개, 진한(辰韓)은 20개, 변한(弁韓)은 12개였다) 그 중에 어떤 자가 대국이던가? 먼저 부여(扶餘)(『단군본기(檀君本紀)』에 이르기를, “비서갑(非西岬)의 하백(河伯)의 딸과 혼인하여 사내아이를 낳고 부루(夫婁)라고 이름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으며, 『동명본기(東明本紀)』에 이르기를, “부여왕 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아들을 얻기를 구하였다.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렀는데 큰 돌이 굴러 떨어져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왕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돌을 굴려보니,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황금색의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대를 이을 아들을 주신 것인가?’ 하고는, 태자로 삼고 금와(金蛙)라고 이름을 지었다. 재상(宰相)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일전에 하느님이 내려와 저에게 이르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라. 동해(東海) 바닷가에 땅이 있어 가섭원(迦葉原)이라 부르는데, 땅에는 오곡이 자랄 것이니 가히 도읍할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천도하고 동부여(東扶餘)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갈 때, 요동의 바닷가 길 옆에 이르렀는데, 묘가 세워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여의 부마대왕(駙馬大王)의 묘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가탐(賈耽)이 말하기를, “큰 들의 남쪽은 압록강(鴨綠江)으로서 부여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즉 북부여(北扶餘)는 마땅히 요하 강변에 있었을 것이다. 그 개국은 대저 후조선(後朝鮮)부터 이때까지, 얼마인가?) 비류(沸流)(『동명본기(東明本紀)』에 이르기를, “비류왕 송양(松讓)이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으로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으나, 지금 너희들이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기대는 것[附庸]이 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즉 이 또한 의심컨대 단군의 후손일 것이다)를 칭하며, 다음으로는 시라(尸羅)와 고례(高禮)가 있었으며, 남북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이 이어졌도다. 이와 같은 여러 임금들은 누구의 후손이겠는가? 세계(世系)로는 또한 단군으로부터 이어졌도다. 그 나머지 소국들의 이름은 어떠한가? 문헌 중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없네. 지금의 주부(州府)의 별호(別號)가 이것이니, 속설(俗說)로 맞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한(漢) 무제(武帝)가 먼 곳을 안정시키려는 뜻을 생각해보면, 백성을 안정시킬 곳에서 백성을 해치고 말았으니, 진한, 마한, 변한 사람들이 끝내 솥발처럼 일어섰고,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차례로 건국되었도다. 한사군(漢四郡)으로 나뉜 이후 신라가 일어서기까지, 햇수를 헤아려 72년이 되었네.

왕운기(帝王韻紀)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에 고려의 유학자인 이승휴(李承休)가 단군(檀君) 삼한(三韓)등의 역사에 관해 저술한 책이다. 다만 논문식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라 시구의 형태로 쓴 책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단군에 대해 기술한 초기의 책이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단군 스토리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따르고 있고, 단군의 한자 명칭은 제왕운기(帝王韻紀)를 따르고 있다.

 

즉,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단군을 檀君으로 한자표기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은 壇君으로 한자표기한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견해로,

이 두 책은 단순히 역사책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을 담고 있는 책이고 두 책의 저자와 두 저작의 사상적, 정치적 배경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이 책들에 기술된 한자표기와 스토리는 서로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두 책의 내용을 섞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다.

 

위 제왕운기(帝王韻紀) 내용을 보면 삼한(三韓)이 형성되는 내용이 등장한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한나라(漢) 4군(四郡)이 들어왔고 한나라(漢) 4군(四郡)에게 밀려난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서로 충돌이 일어나면서 삼한을 형성한 것으로 기술한다.

 

그리고 제왕운기에선 이러한 충돌이 한나라(漢)4군(四郡)끼리의 충돌이 원인인 건지 한나라(漢)4군(四郡)과는 관계없이 위만조선의 유민세력들끼리 충돌이 일어났다는 건지 제왕운기에 기재된 문장만으론 알기가 힘들다.

 

결국, 충돌과정에서 위만조선유민의 나라는 70여국으로 분리되었고 이들이 서로 연맹국(聯盟國)을 구성한 게 삼한(三韓)이라고 기술한다.

 

또한 부여(夫餘)는 이때 등장한 70여국 중 하나로 기술하고 있으며 가장 먼저 두각을 드러낸 큰 나라(大國)로 기술하고 있다.(삼국사기에 기재된 통일신라 신문왕의 삼한관이면 부여나 고구려는 삼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왕운기와 삼국유사는 최치원의 삼한관을 따르고 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한 것이 기원전 108년이고 해모수(解慕漱)가 도읍을 정하고 부여왕(扶餘王)이 된 것이 삼국유사 북부여(北扶餘)기에 기재된 것을 보면 대략 기원전 59~58년으로 계산되니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한 후 4군(四郡)이 등장했고 위만조선의 유민들 간에 충돌이 생기면서

70여개의 나라가 등장하고 이들이 삼한(三韓)이라면

 

대략 부여(扶餘)에서 해모수(解慕漱)가 부여왕(扶餘王)이 된 시기는 위만조선유민들에 의해 70여개의 나라들이 등장하던 시기에 속한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이 기간을 72년간으로 본다.

 

또한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기자조선(箕子朝鮮, 後朝鮮)의 준왕을 몰아낸 연나라 출신 위만(衛滿)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위만(衛滿)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은 허물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선 우거왕(右渠王)의 허물이 무엇인진 적시하진 않는다.

의외로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킨 한나라(漢)에 대해선 이 땅에 안정을 이룬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의 후손들을 나열할 때 부여와 옥저는 언급하지만 말갈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말갈을 단군의 후손으로 기재하지 않거나 삼한(三韓)의 구성원인 70여국 중 하나로 기재하지 않는 것은 이승휴가 고려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할 당시의 고려왕과 고려인들의 역사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고려세조 용건(高麗世祖 龍建)은 고구려를 제외하고 말갈의 선조인 숙신(숙신은 말갈의 지역적 선조이지 혈통적 선조는 아니라고 본다)을 삼한(三韓)의 구성원 중 하나로 본다.(당나라 예종도 말갈을 삼한의 구성원으로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청나라(大淸)황제는 고려왕건의 후예로 보는데 건륭제(乾隆帝) 때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서도 삼한(三韓), 부여, 백제, 신라를 언급하지만 고구려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숙신과 숙신의 지역적 후예인 말갈과 발해는 언급한다.

 

즉, 청나라(大淸)의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고려세조 용건(高麗世祖 龍建)의 삼한관을 따르고 있다.

통일신라 신문왕의 삼한관이나 최치원의 삼한관, 고려 충렬왕 때의 이승휴의 삼한관을 따르진 않는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2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나뉘어 70여 국으로 되었으니 지역은 모두가 사방 100리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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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72국(七十二國)에 대한 원문과 번역 내용이다.

通典云 “朝鮮之遺民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初置為四郡後置二府, 法令漸煩分爲七十八國各萬户(馬韓在西有五十四小邑皆稱國, 辰韓在東有十二小邑稱國, 卞韓在南有十二小邑各稱國).”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나뉘어 70여 국으로 되었으니 지역은 모두가 사방 100리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작은 고을(小邑)들을 모두 나라로 일컬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 개 작은 고을을 각각 나라로 일컬었으며, 변한은 남쪽에 있어 열두 개 작은 고을들을 각각 나라로 일컬었다)

의 제왕운기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통전을 인용해 위만조선 멸망 이후 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져서 70여 국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이 문장을 보면 한나라[漢] 4군[四郡]을 제외한 지역이 70개가 되었다)

 

또한 후한서를 인용해서 한나라(漢)가 4군(四郡)을 두었지만 후에 2부를 두었고 점차 갈라지면서 78개의 나라로 나누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한나라(漢) 4군(四郡)까지 포함해서 78개국이 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나라(漢) 4군(四郡)을 제외한 세력들이 78개국이 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실제 한나라(漢) 4군(四郡)이 있던 지역과 삼한(三韓)이 존재한 지역은 서로 다른 지역이다.

하지만 고려의 역사관과 정체성은 한나라(漢) 4군(四郡)이 있던 지역과 삼한(三韓)이 있던 지역을 서로 겹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매우 모호하게 한나라(漢) 4군(四郡)과 삼한(三韓)을 기술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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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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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에 대한 원문과 번역 내용이다.

魏志云, “魏滿擊朝鮮, 朝鮮王凖率宫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逺云, “馬韓麗也辰韓羅也 㨿本紀, 則 ‘羅先起甲子麗後起甲申, 而此云者以王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已并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좌우(左右)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견훤(甄萱)이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東明)[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邑山)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국유사는 최치원의 삼한론을 인정하고 있다.

'고구려 땅에 본래 읍산이 있어 마한이라고 했다(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기술하고 있다. 통일신라 신문왕의 삼한관에는 고구려는 삼한에 포함되지 않지만 삼국유사에선 최치원의 '마한 고구려설'을 소개한 후 최치원의 '마한 고구려설'이 맞다고 기술한다.

 

종합하면 고려 때 저술된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 기재된 삼한(三韓)은 삼국사기에 기재된 통일신라 신문왕의 삼한(三韓)과는 다르다.

 

삼한(三韓) 초기에는 한나라(漢) 4군(四郡)을 제외한 조선의 유민(朝鮮之遺民)이 나뉘어져 70여 나라로 시작되었지만 후엔 78개의 나라가 된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북대방(北帶方)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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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방(北帶方)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新羅)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인(帶方人)이 낙랑인(樂浪人)과 함께 신라로 귀순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이 두었던 2군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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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북대방(北帶方)에 대한 원문과 번역 내용이다.

北帶方夲竹覃城. 新羅弩禮王四年帶方人與樂浪人投于羅 此皆前漢所置二郡名, 其後僭稱國今来降..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新羅)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인(帶方人)이 낙랑인(樂浪人)과 함께 신라로 귀순해 왔다. 이것은 모두 전한이 두었던 2군의 이름으로 그 후 참람스럽게 나라로 일컫다가 이때에 항복해 왔다.

국유사에 기재된 북대방(北帶方)에 대한 내용이다.

대방인(帶方人)과 낙랑인(樂浪人)이 신라에 귀순한 것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대방(帶方)과 낙랑(樂浪) 모두 한나라(漢)가 두었던 2군(二郡)의 명칭이며 그 후 참람하게(僭) 나라로 불리다(稱國) 이때에 신라에 항복했다 기술하고 있다.

 

한나라(漢)가 두었던 2군(二郡)의 명칭으로 나라를 칭하던 집단들이 신라에게 항복한 내용이다.

삼국유사의 저자는 '나라를 칭했다(稱國)'고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상황을 삼국유사 저자는 '참람하다(僭)'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나라를 참칭한(僭稱國) 대방(帶方)과 낙랑(樂浪)은 어떤 상대에게 참람한(僭) 행위를 한 것인가?

 

그것은 신라나 고구려에게가 아니라 자신들을 보낸 한나라(漢)에게 참람한(僭) 행위를 한 것이다.

한나라(漢)의 행정구역(二郡)으로서 점령지를 관리하라고 보냈는데 삼한(三韓) 내의 일부 세력들과 연계되었는지 군(郡)이 아닌 나라를 칭했다(稱國).

이는 위임한(委任) 한나라(漢)에게 배임한(背任)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이 한나라가 두었던 2군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본다.

신라 노례왕 때인 27년에도 낙랑인은 신라에 항복했고 고구려 무휼왕도 37년에 낙랑국을 멸망시켰지만 한나라의 낙랑군은 300년대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제왕운기에서 한4군이 등장한 후 서로 싸웠다는 문장은 한4군과 조선유민들이 서로 합종연횡하며 충돌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 낙랑군과 대방이 고조선유민세력들 중 일부와 서로 연계했고 낙랑군, 대방과 연계된 고조선유민세력은 이들 이름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주변에서 나라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부여국(夫餘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송원시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부여국(夫餘國)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중국 길림시 구글지도이다.

 

Google 지도

Google 지도에서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지도를 살펴보거나 운전경로 정보를 검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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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국(夫餘國)은 지역적으로도 한반도를 벗어나며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중심지와는 차이가 난다.(나는 위만조선의 왕험성을 지금 북한의 평양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또한 단군조선의 평양 역시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중국의 문헌을 보면 부여국(夫餘國)의 주요 구성원은 치치하얼로 추정되는 탁리국(橐離國)에서 이주한 세력이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아니다.

 

따라서 한나라(漢) 4군(四郡)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유민(遺民)과 관련없는 부여국(夫餘國)

삼한(三韓)을 구성하는 70여 국의 하나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국(夫餘國)의 후예라 주장하고 있고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모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때 저술이기에 부여국(夫餘國)을 삼한(三韓)의 70여 국 중 하나로 기술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한 이유 외에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의 견해처럼 삼한(三韓)은 국명(國名)이 아니라 선비족, 투르크, 몽골, 만주에서 지도자의 명칭인 칸(Khan)이나 한(Han)을 뜻하는 명칭에 해당되고

 

마한(馬韓)에 40개에서 54개 국가가 있고, 변한(弁韓)에 12개 국가가 있으며, 진한(辰韓)에 12개에서 20개 국가가 있다는 것은

 

각각의 나라들이 서로 연맹(聯盟)을 맺어 연맹국(聯盟國)을 결성했고 그 연맹국(聯盟國) 지도자 명칭이 한(汗, Khan, Han)이라는 뜻이라 본다.

 

이렇게 된다면 부여국(夫餘國)은 조선의 유민(朝鮮之遺民)과는 상관없이 위만조선유민의 나라들과 연맹(聯盟)을 결성한 연맹국(聯盟國)이었고 따라서 부여국(夫餘國)은 연맹국(聯盟國)의 지도자인 한(汗, Khan, Han)에 예속된 나라가 된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zh.wikisource.org

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내용 중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若夫三韓命名 苐列辰韓 馬韓 弁韓 而不詳其義 意當時三國 必有三汗 各統其一 史家不知
汗為君長之稱 遂以音同誤譯 而庸鄙者 甚至訛韓為族姓 尤不足當一噱 向曽有 三韓訂謬之作
惜未令人 盡讀之而共喻耳
무릇 삼한(三韓)의 이름이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열거되어 있으나 그 뜻이 자세하지 않다. 당시 삼국에는 반드시 세 한(三汗)이 있어서 각기 그 하나를 다스렸을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한(汗)이 군장의 호칭인 것을 모르고 마침내 발음만 같은 것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또한 편협하고 속된 자들은 심지어 한(韓)을 성씨로 잘못 알았으니 한번 웃어 넘길 가치도 없다. 내가 일찍이 '삼한정류(三韓訂謬)'라는 글을 썼으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읽어 깨우치도록 하지 못하였다.

의 내용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초반부에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가 직접 내린 유지(諭旨)의 내용이다.

즉, 건륭제(乾隆帝)가 보는 삼한(三韓)의 명칭에 대한 견해이다.

삼한(三韓)이란 명칭의 의미는 (韓)이라는 연맹국(聯盟國)이 3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연맹국(聯盟國)이 있고 그 연맹국의 지도자 명칭이 한(汗, Khan, Han)인데

이러한 사실을 오해하고 사가(史家)들이 한(韓)이라는 한자로 썼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한자 의미로는 三韓(삼한)이 아니라 三汗(삼한)이라는 것이 청나라(大淸) 건륭제(乾隆帝)의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