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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 서경(졸본), 고려 평양(비류국) (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아래는 위의 제왕운기에 기재된 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沸流國王松讓者, 禮以後先開國爭, 尋爲大雨所漂突, 擧國款附輸忠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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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이라는 자는, 점잖게 〈주몽과〉 개국의 선후를 다투다가,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이〉 떠내려가 버려, 온 나라가 귀부(歸附)하여 충성을 맹세하도다.
(주몽이 고구려현을 건국할 때 주변의 비류국과 개국의 선후, 부용관계를 다툰 것을 보면 주몽의 고구려현[졸본부여]과 송양의 비류국은 근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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沸流稱東明本紀曰, “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 日淺, 爲我附庸, 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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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沸流)(『동명본기(東明本紀)』에 이르기를, “비류왕 송양(松讓)이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으로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으나, 지금 너희들이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기대는 것[附庸]이 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즉 이 또한 의심컨대 단군의 후손일 것이다)를 칭하며, 다음으로는 시라(尸羅)와 고례(高禮)가 있었으며, 남북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이 이어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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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에선,
고려 서경은 주몽이 고구려현이란 이름으로 건국한 곳(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이며
비류국의 왕인 송양은 동명본기(東明本紀)를 인용해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손으로(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라고 했다고 기재한다.
즉, 주몽이 도읍한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과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서로 별개의 지역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권17 제5의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7 제5의 원문과 번역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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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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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徃尋, 至沸流國. 其囯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甞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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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사냥을 하며 찾아서 비류국(沸流國)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서 보고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바다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 일찍이 군자를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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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7 제5 를 보면,
고구려 동천왕은 247년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다. 그리고 '평양성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平壤者, 夲校仙人王儉之宅也)'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는 이전 수도인 환도성이 복구 불능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평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 수도는 환도성(丸都城)이다.(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그런데 고려 때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를 보면,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에서 건국하니(開國馬韓王儉城)'라고 기재함으로서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은 주몽이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세운 곳이라고 밝힌다.
또한 비류국의 왕인 송양을 설명할 때엔 동명본기를 인용해,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손으로(沸流王松讓謂曰, ‘予以仙人之後)"라고 했다고 기재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3을 보면,
주몽이 고구려(졸본에 해당된다)를 건국한 지역은 비류수가 흐르고 있고 비류수(沸流水) 상류(上流)엔 비류국(沸流國)이 있다고 함으로서 주몽의 고구려(졸본에 해당된다)와 비류국(沸流國)은 인접해있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들로 기재한다
즉, 제왕운기에선 옛 비류국인 선인(仙人)의 지역과 고구려를 세운 지역인 왕검성(王儉城)을 서로 구분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선 고구려 평양(平壤)은 선인 왕검(仙人王儉)의 땅이라고 하면서 서로 구분하지 않고 선인(仙人)과 왕검(王儉)이 결합된 단어를 사용한다.
위의 삼국사기와 제왕운기를 서로 엮어 보면 아래와 같은 도식을 만들 수 있다.
동청왕 때 천도한 고구려의 평양 = 선인 왕검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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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 왕검의 땅 = 마한의 왕검성(고구려현)추정지역 + 송양(선인의 후예)의 비류국추정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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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서경 = 마한의 왕검성(주몽이 고구려현이란 이름으로 건국한 곳)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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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올린 삼국사기와 제왕운기의 내용을 엮으면 고구려 동천왕 때의 평양은 주몽이 고구려(졸본, 마한의 왕검성)를 세운 곳과 그(졸본, 마한의 왕검성)에 인접한 송양의 비류국이 통합된 도시이다.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에 천도한 평양(平壤)은 284년 전인 기원전 37년에 존재했던 고구려현과 비류국을 통합해 평양(平壤)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의 고구려현이나 비류국이라는 지역 명칭은 시간이 지나 고구려 동천왕 때엔 평양(平壤)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본다.
따라서 고려 때 서경이 주몽이 고구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선 이 지역을 졸본이라고 칭하고, 제왕운기에선 마한의 왕검성이라고 칭했다)를 건국한 도시로 한정된다면 고려의 서경(西京)은 고구려의 평양(平壤)보다는 지역 범위가 제한된다.
고려의 서경(西京)은 고구려의 평양(平壤)에서 선인의 땅인 비류국과 압록강 주변을 제외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동천왕이 천도한 고구려의 평양 = 선인 왕검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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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왕검의 땅 = 마한의 왕검성(졸본)추정지역 + 선인의 후예 송양의 비류국 추정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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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서경 = 마한의 왕검성 = 주몽이 고구려현을 건국한 곳(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이 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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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표현을 달리해서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동천왕 때 고구려 평양 = {마한의 왕검성(주몽이 건국한 지역, 졸본부여), 송양의 비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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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 ={마한의 왕검성(주몽이 건국한 지역, 졸본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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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때 고구려 평양의 넓이 > 고려 서경의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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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송양의 비류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중의 하나인 중국의 부이강(富爾江) 구글지도이다.(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이 지역이 비류국은 아니다)
아래는 옛 비류수로 추정되는 지금의 혼강(浑江) 구글지도이다.(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지금의 혼강은 비류수로 해석되지 않는다)
비류수로 추정되는 혼강(浑江)은 압록강 (鴨綠江)과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원문과 번역이다.
丁未 禑次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使大護軍裴矩督之. 船運林·廉等家財于西京, 欲充軍賞. 又發中外僧徒爲兵, 抄京畿兵, 屯東西江, 以備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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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우왕이 평양(平壤)에 행차하여 여러 도의 병사들을 뽑는 것을 독려하였고,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가 감독하게 하였다. 배(船)로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집의 재산을 서경(西京)으로 운반하게 하여 군대의 상(軍賞)에 충당하였다. 또 중외의 승도들을 병사로 동원하고 경기(京畿)의 병사를 뽑아내어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주둔시켜 왜구를 대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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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고려 우왕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으로 군사를 보내는 내용이다.
고려 우왕이 평양(平壤)에 행차해서 병사를 뽑는 것을 독려하였고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으며 배(船 선박)로 임견미, 염흥방의 재산을 서경(西京)으로 운반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고려의 서경(西京)과 고려의 평양(平壤)을 함께 언급한다.
즉, 고려의 서경(西京)과 고려의 평양은 서로 다른 지역이다.
하지만 배를 통해 서경(西京)으로 운반한 것을 보면 압록강(鴨綠江), 고려 평양(平壤), 고려 서경(西京)은 강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멀지가 않은 인접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문장을 읽어보면, 이 문장의 뉘앙스는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에서 배[船 선박]를 통해 연결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몽의 졸본과 송양의 비류국은 비류수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비류수로 해석되는 중국 혼강(浑江)은 압록강(鴨綠江)과 연결되어 있다.
위의 고려사의 내용을 해석해서 고려 평양은 압록강(鴨綠江) 주변이고 내가 해석한 것처럼 부이강 주변인 지금의 집안시 북부는 송양의 비류국에 해당된다면 그 지역은 고려 때 성주(成州)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과 길림성 집안시를 합한 크기의 도시가 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열전 묘청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사 열전 묘청에 대한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四曰駒麗平壤仙人, 實德燃燈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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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구려 평양선인 실덕연등불(駒麗 平壤仙人 實德燃燈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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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西京) 천도 시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묘청이 팔성당이란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하며 옛 '고구려 평양선인(駒麗平壤仙人)'을 언급한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고려인들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역인 고려 서경(西京) 외에 선인(仙人)의 후예가 다스린 비류국 지역이 포함되는 고구려 평양(平壤)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한 고구려 평양(平壤) 지역에 고려인들은 평양선인(平壤仙人) 사당을 세웠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4 인종 4년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126년 12월 12일, 양력 1127년 1월 26일)
아래는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勾麗]의 본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였는데(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보며 원래 의미는 '평양의 옛 터는 압록강을 벗어나지 못했는데'가 맞는 번역이라고 본다),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 |
고구려의 평양은 여러 차례 바뀌었어도 압록강(鴨綠江)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즉, 고구려 평양은 송양의 비류국이 있던 곳으로 해석되는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북쪽의 부이강 주변과 압록강(鴨綠江)과 접한 집안시 남부까지였다고 해석되는 내용이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다. 고구려는 졸본(卒本), 환도성(丸都城), 평양(平壤) 등 여러번 수도가 바뀌었지만 고구려의 상징은 주몽이 고구려(卒本扶餘)를 세운 졸본(卒本)지역이다.
따라서 고려는 고구려의 상징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졸본(卒本)지역에 고려 서경(西京)을 세웠다
송양의 비류국 지역은 주몽의 졸본과 합해진 후 당시 다물이라고 불렸다가 이후 고구려 동천왕 때엔 졸본과 비류국 지역이 합해져 평양(平壤)이라고 불렸다고 본다.
그리고 고구려 평양은 비류국의 남쪽인 압록강(鴨綠江)을 접한 지역까지 확장된 도시였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어 고려 때는 고구려 평양을 세 지역으로 분리해서,
고구려 평양의 서북부에 해당되는 지금의 오녀산 남쪽은 고려 서경(西京)으로
고구려 평양의 동북부에 해당되던 송양(松讓)의 비류국(沸流國)은 고려 성주(成州)로
고구려 평양의 동남부에 해당되는 지역인 지금의 집안시(集安市) 남부인 압록강(鴨綠江)과 접한 지역은 고려 평양(平壤)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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