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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부여국의 동명왕 스토리 분석 2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의 부여(扶餘)와 동명왕(東明王)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의 부여(扶餘)와 동명왕(東明王) 내용과 번역이다.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以]也.
魏略曰: 舊志又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 「有氣如雞子來下, 我故有身.」 後生子, 王捐之於溷中, 豬以喙噓之, 徙至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 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欲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夫餘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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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魏略: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王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東明이 활을 잘 쏘자, 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施掩水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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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재된 부여의 동명왕 스토리는 논형에 기재된 동명왕 이야기와 거의 스토리가 같다.
다만 논형에선 탁리국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선 고리국으로 기재되어 있고, 논형에선 동명이 표수를 건넜다고 기재하고 있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선 시엄수를 건넌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
나는 위의 동명왕(東明王) 스토리를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고리국(高離國)은 주변의 어느 나라를 상국(上國)이나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들고 있었으며 고리국(高離國)이 받드는 상국(上國)의 국왕이 고리국(高離國)에 왔을 때
고리국(高離國)의 왕은 자신의 시비(侍婢)에게 상국(上國)의 왕을 시종들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리국왕(高離國王)의 시비(侍婢)는 상국(上國)의 왕 아이를 임신했다고 보았다.
고리국왕(高離國王)이 시비(侍婢)에게 내 아이가 아니라며 죽이려 하였으나
시비(侍婢)가 '달걀과 같은 기운'을 언급하며 자신이 임신한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암시했고 고리국왕(高離國王)은 그 아이가 상국(上國)의 왕 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직접 죽이진 못하고 돼지우리나 마구간에 유기해서 죽어도 된다는 의도로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말씀드렸었다.
시비(侍婢)가 언급한 '달걀과 같은 기운'은 제정일치사회에서 나라의 제사장 지위를 가진 군주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아이 동명(東明)이 자라자 말을 사육하도록 하였는데 동명(東明)이 뛰어난 명궁(善射 선사)의 능력을 보여주자 고리국왕(高離國王)은 자신의 나라가 빼앗길까 두려워서 장성한 동명(東明)을 죽이려고 한 것은
상국(上國)의 지도자는 명궁(善射 선사)이었고 동명(東明)이 자라면서 활솜씨가 뛰어나자 동명(東明)은 상국(上國)의 지도자 아들임을 고리국왕(高離國王)이 확인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렸었다.
동명(東明)이 상국(上國)의 지도자와 서로 결탁해서 내부와 외부에서 협공을 해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고리국왕(高離國王)이 동명(東明)을 죽이려 했다 말씀드렸었다.
그리고 고리국왕(高離國王)이 받드는 상국(上國)은 아마도 탁발선비(拓跋鮮卑)이거나 그 주변의 다른 선비족(鮮卑族)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아래는 흉노제국(匈奴帝國)의 선우(單于)인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등장하는 중국의 CCTV 영상이다.
묵돌선우(冒頓單于)는 당시 현재의 내몽골지역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호(東胡)를 공격했고 동호(東胡)는 묵돌선우(冒頓單于)에 패해 도피한 후
후에 선비(鮮卑)로 지칭되는 탁발선비(拓跋鮮卑), 우문선비(宇文鮮卑), 모용선비(慕容鮮卑) 등의 선비(鮮卑)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었다.
즉,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에 의해 선비(鮮卑)나 후에 몽골이 되는 실위(室韋)가 생겨난 것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동호(東胡)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동호(東胡)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구글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틀릴 수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東胡,分支自原始蒙古族的一支古代蒙古族,與原始突厥族、通古斯族、漢族有通婚關係,是一個古老的游牧為主的民族與部落國家,曾居住在今時的蒙古國東部、中華人民共和國內蒙古東部、東北西部。
可能在商代初年便存在,在西周時首次出現文獻記載,到秦末漢初時被匈奴滅亡,存在了大約1000年。
東胡與漢族、濊貊、肅慎一同被稱為古東北四大民族。
在被併入匈奴帝國後,東胡後來分支出為鮮卑與烏桓。
現代語言學者一般認為東胡語言是一種古代蒙古語,屬蒙古語族,今蒙古族可能為東胡後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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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몽골족에서 분파된 고대몽골족인 동호(東胡)는 원시(原始) 투르크족(突厥族), 퉁구스족(通古斯族), 한족(漢族)과 혼인관계를 맺은 고대 유목민족이자 부족국가였다. 일찌기 지금의 몽골공화국 동부와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동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동북3성)지역의 서부에 거주했었다.
상나라(商) 초기에 존재했을 수도 있고 서주(西周) 때에 수 차례 출현한 내용이 처음 기록되었으며 진나라(秦) 말에서 한나라(漢) 초에 흉노(匈奴)에 의해 멸망하여 약 1,000년 동안의 존재를 마쳤다.
동호(東胡)는 한족(漢族), 예맥(濊貊), 숙신(肅慎)과 함께 중국 고대 동북지방의 4대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흉노제국(匈奴帝國)에 병합된 후 동호(東胡)의 후예는 나중에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으로 나누어졌다.
현대 언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호(東胡)의 언어가 몽골어족에 속하는 고대 몽골어이며 오늘날의 몽골인들은 동호(東胡)의 후예일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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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흉노(匈奴)에 패한 동호(東胡)가 후에 동호(東胡)에서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불리게 된 내용이다.
즉, 동호(東胡)가 흉노(匈奴)에 패한 후 더 이상 동호(東胡)로 불리지 않고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이라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는 내용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선비(鮮卑)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에서 설명하는 선비(鮮卑)에 대한 본문 내용과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구글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틀릴 수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鮮卑(上古漢語擬音:*S[a]r-pe,*Sen-pe),可能分支自原始蒙古族,其語言屬蒙古語族。祖先是古代西伯利亞的游牧民族東胡,後被併入匈奴帝國之下,在匈奴帝國解體後,重新佔有匈奴帝國原有土地,成為草原霸主。
鮮卑源出自東胡。漢朝時期,匈奴以東的游牧民族被匈奴的冒頓單于擊敗後,被併入匈奴。
在匈奴帝國力量衰退後,居於烏桓山和鮮卑山的部落,演化為烏桓和鮮卑二族。鮮卑主要活動於今赤峰市內蒙古東部阿魯科爾沁旗哈古勒河附近。
2世紀時鮮卑國占據匈奴國領地,稱雄塞北。4世紀西晉滅亡後,鮮卑陸續在今天的中國北方建立前燕、代國、後燕、西燕、西秦、南涼、南燕及北魏等國,而漠北則由鮮卑別支柔然稱霸。
439年北魏統一北方,之後時常與柔然發生衝突。
而後北魏經歷六鎮之亂後分裂成東魏、西魏,東魏、西魏隨後也分別被北齊、北周所篡。
最後北周統一華北,於581年因楊堅奪位而亡。
稱霸塞北的柔然汗國也於552年為突厥汗國所滅。於五胡十六國時期在青海建立的鮮卑別支吐谷渾汗國則維持到663年為吐蕃所滅。
名稱及起源
《後漢書》記載稱,冒頓單于領導下的匈奴擊潰東胡後,東胡的一支逃到遼東塞外,居於鮮卑山,因山名而得族名「鮮卑」。
大鮮卑山的位置不詳,現代學者認為可能是指大興安嶺北面。
中華民國學者呂思勉認為,東胡本自稱為鮮卑,東胡為漢人所加稱呼。
鮮卑的原意有吉祥與神獸的意義,現在學者認為即是指馴鹿。
「西伯利亞」的名稱有可能來自「鮮卑利亞」。
歷史
傳說
鮮卑確實的起源時間不詳,古代記載起源自東胡,公元前206年,東胡被匈奴冒頓單于擊敗,併入匈奴帝國。
在《楚辭》中,曾稱讚細腰女子,如同「鮮卑」,因此在西漢時,漢族人就已知道有「鮮卑」這個名稱的存在。
鮮卑保留了匈奴的收繼婚、搶婚(掠女)習俗。至今哈薩克斯坦、吉爾吉斯斯坦仍存在搶親這種習俗。
東漢及三國時期
東漢初年,鮮卑、烏桓諸族原本附屬於匈奴國。
竇憲聯合北方各游牧民族,擊破北匈奴,北匈奴朝西北遁去,鮮卑部落入主蒙古高原。
而匈奴餘部還有大約十餘萬部落,皆跟隨並自稱鮮卑,自此鮮卑開始興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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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고대 중국어 폴리: *S[a]r-pe, *Sen-pe)는 원시몽골족일 가능성이 있으며 선비의 언어는 몽골어에 속한다. 조상은 고대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인 동호(東胡)이며, 후에 흉노제국(匈奴帝國)에 편입되어 흉노(匈奴)의 밑에 있었고, 흉노제국(匈奴帝國)이 해체되자 흉노제국(匈奴帝國)이 점령했던 원래 땅을 다시 점령하고 초원의 군주가 되다.
선비(鮮卑)는 동호(東胡)에서 유래했다. 한나라(漢) 때 흉노(匈奴)의 동쪽에 있던 유목민들은 흉노(匈奴)의 묵돌선우(冒頓單于)에게 패배한 후 흉노(匈奴)에 합병되었다.
흉노제국(匈奴帝國)의 권력이 쇠퇴한 후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에 거주하는 부족은 오환(烏桓)과 선비(鮮卑) 이렇게 두 부족이 되었다. 선비(鮮卑)는 주로 적봉시 내몽골 동부(赤峰市內蒙古東部) 아로과이심기합고륵하(阿魯科爾沁旗哈古勒河)주변에서 활동했다.
2세기에 선비국(鮮卑國)은 흉노국(匈奴國)의 영토를 점령하고 변방의 북쪽에서 영웅으로 불렸다. 4세기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선비는 전연(前燕), 대국(代國), 후연(後燕), 서연(西燕), 서진(西秦), 남양(南涼), 남연(南燕), 북위(北魏)를 잇달아 세웠고, 漠北(고비사막 이북)은 선비계열(鮮卑別支) 세력인 유연(柔然)이 우두머리를 칭했다.
439년 북위(北魏)가 북방을 통일한 후 유연(柔然)과 자주 충돌했다.
이후 북위(北魏)는 육진의 난(六鎮之亂)을 겪은 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고, 이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에게 찬탈당했다.
결국 북주(北周)나라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581년 양견(楊堂)이 왕위를 장악한 후 죽었다.
552년 북부 지역을 지배했던 유연칸국(柔然汗國)도 투르크칸국(돌궐제국 突厥汗國)에 의해 멸망했다. 5호 16국 시대에 청해(青海)에 세워진 선비계열(鮮卑別支)인 토욕혼칸국(吐谷渾汗國)은 663년 토번(吐蕃)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름과 기원
『후한서(後漢書)』에는 묵돌선우(冒頓單于)가 이끄는 흉노(匈奴)가 동호(東胡)를 물리친 후 동호(東胡)의 한 분파가 요동(遼東) 밖으로 도망쳐 선비산(鮮卑山)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선비산(鮮卑山)의 이름을 따와 선비족(鮮卑族)이라고 불렸다.
대선비산(大鮮卑山)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것이 대흥안령(大興安嶺)의 북쪽을 가리킨다고 인식한다.
중화민국의 학자 여사면(呂思勉)은 동호(東胡)가 스스로 자신을 선비(鮮卑)라고 불렀고 동호(東胡)라는 명칭은 한나라사람(漢人)이 칭하던 명칭이었다고 주장한다.
선비(鮮卑)의 원래 의미는 길상(吉祥)과 영묘한 짐승(神獸 신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학자들은 현재 순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한다.
"Siberia(西伯利亞 Xībólìyà)"라는 이름은 "鮮卑利亞(xiānbēilìyà)"에서 유래할 수도 있다.
역사
전설
선비(鮮卑)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대 기록은 동호(東胡)에서 유래했다.기원전 206년에 동호(東胡)는 흉노(匈奴)의 묵돌선우(冒頓單于)에게 패배하고 흉노제국(匈奴帝國)에 합병되었다.
'초가(楚辭)'에서 '가는 허리의 여인을 칭송'할 때 '선비(鮮卑)'와 같은 의미였다. 서한 시대에 한족은 이미 '선비(鮮卑)'라는 이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선비(鮮卑)는 수계혼과 신부를 강탈해서 결혼하는 흉노(匈奴)의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는 이러한 종류와 가까운 풍습이 여전히 존재한다.
동한과 삼국 시대
동한(東漢) 초기 선비(鮮卑)와 오환(烏桓) 부족은 원래 흉노(匈奴)에 복속되었었다.
두헌(竇憲)은 북쪽의 유목 민족을 통합하여 북흉노(北匈奴)를 물리쳤고 북흉노(北匈奴)는 서북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선비(鮮卑)부족은 몽골 고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흉노(匈奴)의 잔여세력은 대략 10여 만 부족이었고 이후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선비(鮮卑)라고 칭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이후 선비(鮮卑)는 세력이 강대해지고 방대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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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선비(鮮卑)에 대한 설명 내용이다. 흉노(匈奴)에 패한 동호(東胡)가 선비(鮮卑)와 오환(烏桓) 으로 불렸는데, '후한서(後漢書)'라는 책에 의하면 동호(東胡)가 선비(鮮卑)로 불리게 된 원인은 이들이 선비산(鮮卑山)에 거주했기 때문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다.
현재 선비산(鮮卑山)이 어딘지는 모르며 학자들은 대흥안령(大興安嶺) 북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 선비(鮮卑)는 현재 중국의 적봉시 내몽골 동부(赤峰市內蒙古東部) 아로과이심기합고륵하(阿魯科爾沁旗哈古勒河)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본다.
아래는 대흥안령(大興安嶺) 북쪽에 거주한 선비(鮮卑) 외에 다른 선비(鮮卑)가 거주하던 적봉시 내몽골 동부(赤峰市內蒙古東部) 아로과이심기합고륵하 (阿魯科爾沁旗哈古勒河)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영문위키페디아에서 설명하는 탁발선비(拓跋鮮卑 Tuoba Xianbei)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영문위키페디아에서 설명하는 탁발선비(拓跋鮮卑 Tuoba Xianbei)에 대한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영어실력이 부족하다. 구글번역기까지 사용했지만 번역이 틀릴 수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The Tuoba (reconstructed Middle Chinese pronunciation: *tʰak-bɛt), also known as the Taugast or Tabgach (Old Turkic: 𐱃𐰉𐰍𐰲 Tabγač), was a Xianbei clan in Imperial China.
During the Sixteen Kingdoms period in northern China, the Tuoba clan established and ruled the dynastic state of Dai from 310 to 376. In 386, the Tuoba clan restored Dai, only to rename the dynasty "Wei" (known retroactively in Chinese historiography as the "Northern Wei") in the same year.
The Northern Wei was a powerful dynasty that unified northern China after the Sixteen Kingdoms period and became increasingly sinicized. As a result, from 496, the name "Tuoba" disappeared by an edict of the Emperor Xiaowen of Northern Wei, who adopted the Han surname of Yuan (元). After the Northern Wei split into the Eastern Wei and Western Wei in 535, the Western Wei briefly restored the Tuoba name in 554.
A branch of the Tanguts originally bore the surname Tuoba, but their chieftains were subsequently bestowed the Chinese surnames Li (李) and Zhao (趙) by the Tang dynasty and the Song dynasty respectively. The Tangut Tuoba clan later adopted the surname Weiming (嵬名) and eventually established the Western Xia dynasty in northwestern China.
History
The distribution of the Xianbei people ranged from present day Northeast China to Mongolia, and the Tuoba were one of the largest clans among the western Xianbei, ranging from present day Shanxi province and westward and northwestward. They established the state of Dai from 310 to 376 AD[22] and ruled as the Northern Wei from 386 to 536.
The Tuoba states of Dai and Northern Wei also claimed to possess the quality of earth in the Chinese Wu Xing theory. All the chieftains of the Tuoba were revered as emperors in the Book of Wei and the History of the Northern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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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拓跋 Tuoba)(중간 중국어 발음 재구성: *tʰak-bɛt), Taugast 또는 Tabgach(고대 투르크어: 𐱃𐰉𐰍𐰲 Tabγač)는 중국제국의 선비족(鮮卑族)이다.
북중국의 16국 시대에 탁발(拓跋 Tuoba)씨족은 310년부터 376년까지 대국(代國)을 수립하고 통치했다. 386년 탁발(拓跋 Tuoba)씨족은 대국(代國)을 복원하고 같은 해에 왕조 이름을 위(魏)로 변경했다(중국역사에선 소급해서 북위[北魏]로 칭한다).
북위(北魏)는 16국시대 이후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로 점차 중국화되었다. 그 결과 496년부터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때부터 중국식 성씨인 원(元)씨로 삼는 칙령을 내려 선비족(鮮卑族) 성씨인 탁발(拓跋 Tuoba)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535년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진 후 서위(西魏)는 554년 잠시 탁발(拓跋 Tuoba)이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Tanguts(탕구트)의 한 지파는 원래 탁발(拓跋 Tuoba)이라는 성씨를 지녔지만 그들의 추장은 나중에 당나라와 송나라에 의해 각각 이(李)와 조(趙)라는 중국 성씨를 부여 받았다. Tangut(탕구트) 탁발(拓跋 Tuoba)씨 일족은 나중에 외명(嵬名)이라는 성씨를 채택하고 결국 중국 북서부에 서하(西夏) 왕조를 세웠다.
역사
선비족(鮮卑族)의 분포는 현재 중국 북동부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탁발(拓跋 Tuoba)은 현재 산서성에서 서쪽과 북서쪽에 이르는 서부 선비족(鮮卑族) 중에서 가장 큰 씨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서기 310년부터 376년까지 대국(代國)을 세웠고 386년부터 536년까지 북위(北魏)를 다스렸다.
대국(代國)과 북위(北魏)의 탁발(拓跋 Tuoba)씨 정권은 역시 중국의 오행설을 바탕으로 흙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탁발(拓跋 Tuoba)의 모든 지도자들은 위(魏)의 책과 북조(북중국의 왕조)의 역사에서 황제로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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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鮮卑)는 흉노(匈奴)가 멸망한 후 몽골지역으로 다시 돌아왔고 후엔 여러 선비(鮮卑)계열들이 북중국을 정복했다. 그 중에 매우 중요한 세력이 바로 탁발선비(拓跋鮮卑)이다.
탁발선비(拓跋鮮卑)는 대흥안령(拓跋鮮卑) 북동쪽에 거주했다 추정하며 그 지역은 어룬춘자치기(鄂伦春自治旗) 알선동(嘎仙洞)으로 보고있다.
아래는 탁발선비(拓跋鮮卑)의 기원지로 추정하는 대흥안령(拓跋鮮卑) 어루춘자치기(鄂伦春自治旗) 알선동(嘎仙洞)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옛 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흑룡강성 치치하얼시 부유현(富裕县)의 구글지도이다.
탁발선비(拓跋鮮卑)가 거주한 곳으로 추정되는 알선동(嘎仙洞)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치치하얼시 부유현(富裕县)이 보인다.
탁발선비(拓跋鮮卑)가 아니라고 해도 그 주변의 다른 선비(鮮卑)가 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의 상국(上國)이었을 것으로 개인적으론 추정한다.
'달걀같은 기운'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이라는 표현은 선비(鮮卑)계나 투르크(Turk)계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탁발선비(拓跋鮮卑)가 등장한 것은 기원 후이긴 하지만 동호(東胡)가 흉노(匈奴)에 밀려 몽골지역을 떠나 선비(鮮卑)족이 된 것은 기원 전 200년 전후라고 본다.
만일 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의 상국(上國)이 선비(鮮卑)족이 아니라고 해도 동명(東明)은 탁리국(橐離國, 고리국[高離國])의 상국(上國) 지도자 아들이라고 보는 내 개인적인 견해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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