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주몽, 유화, 하백, 압록강 (수정된 내용)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주몽, 유화, 하백, 압록강 (수정된 내용)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7. 7. 19:44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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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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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大白山南優㴾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渌邊室中私之, 即徃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褁之, 置於暖處, 有一男兒破殼而出, 骨表英竒. 年甫七歳,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戲,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䝉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减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乗,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隂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何徃而不可. 與其遟留而受辱, 不若逺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 魏書云, “至音述水.” ,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黙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黙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夲川 魏書云, “至紇升骨城.” .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를 만났다. 〔여자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나가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 인근의 방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謫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었는데, 해[日]가 비추어 〔유화가〕 몸을 끌어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따라와 비쳤다. 그로 인하여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升]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왕이〕 다시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나중에는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英奇].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음에도 영리함이 범상치 않아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善射]을 ‘주몽(朱蒙)’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며, 그 사람됨이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제거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줄여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들판에서 사냥하였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기 때문에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알려주며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지체하여 머물다가 욕을 당하는 것보다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해오는 병사들이 닥칠까 두려워 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外孫)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이후〕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해오던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세 명을 만났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삼베옷[麻衣]를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衲衣]를 입었으며, 한 명은 수초로 엮은 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姓)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초로 엮은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성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씨를 주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크나큰 명령[景命]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명의 현명한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 (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고려의 서경(西京)은 주몽이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에서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한 곳이라고 제왕운기에선 기재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주몽이 건국한 지역을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으로 보고 있으니,

제왕운기에서 밝힌 고려 서경(西京)은 지금 북한의 평양(平壤)이 아닌 중국 환인현의 오녀산(五女山) 아래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하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삼국사기 내용과 별개로 고려의 서경[西京]은 지금의 중국 환인만주족자치현일 것으로 나 역시 보고 있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 한반도보다 북쪽이라는 인식은 고려 당시에도 고려인들이 인식했었다고 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졸본[卒本]지역은 한반도보다 북쪽에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지금의 압록강[鴨綠江]보다 더 북쪽인 요하[遼河] 부근으로 해석 된다)

그러면 주몽은 왜 부여에서 탈출해서 압록강 부근에 위치한 비류수(沸流水) 주변에 와서 고구려를 세웠을까?

(삼국사기에선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는 내용 외에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물려 받았다고도 기술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또 다른 견해처럼,

기존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주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면 주몽을 어떻게 신임하고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을까?

위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면,

유화가 자신을 밝힐 때 하백의 딸(河伯之女)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백의 딸 유화는 자칭 천자의 아들인 해모수와 압록강 인근의 방에서 관계를 갖고(鴨渌邊室中私之) 주몽을 가진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압록[鴨渌]은 요하[遼河]로 추정된다)

주몽은 부여에서 태어났지만 부여국을 탈출하여 비류수(沸流水) 주변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거나 졸본부여(卒本扶餘)를 물려받았다.

(한국과 중국에선 비류수[沸流水]를 압록강[鴨綠江] 지류인 혼강[渾江]으로 추정하지만, 삼국사기를 해석해 보면 요하[遼河] 주변의 어느 하천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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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國史)≫ 「고려본기」에 이른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처음에 북부여왕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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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고구려(髙句麗)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問之, 云 “我是河伯之女名桞花, 與諸弟岀遊時有一男子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綠邉室中知之而徃不返. 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夫婁.” 今拠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이때에 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柳花)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던 중 때마침 한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사통(私通)하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재된 주몽의 어머니 유화의 스토리이다.

역시 하백의 딸(河伯之女)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없는 문장이 기재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가 직접 해설을 단 내용인데 '단군기'를 인용해, 단군이 하백(河伯)의 딸과 관계를 맺은 스토리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하백(河伯)을 소개할 때 서하하백(西河河伯)이라고 표현한다.

즉, 하백(河伯)은 서하(西河)라는 하천(河川) 세력의 지도자 아닐까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과 번역이다.

 

주제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고구려의 시조 신화인 주몽(朱蒙) 신화를 전하는 자료는 다양한 계통이 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고구려 당시에 작성된 자료인 고구려 금석문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이다. ‘광개토왕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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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과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罡, 履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字) 불명(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졸본(忽本) 서쪽 산 위[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졸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다.

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달리 주몽의 어머니 이름이 유화라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고 하백의 따님(母河伯女郞)이라는 내용만 등장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주몽 개인에겐 외할아버지 하백(河伯)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柳花)보다 더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이 문장을 통해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주몽은 부여(夫餘)를 장악하고 북부여(北夫餘)의 왕이 된 해모수와 압록강(or 요하) 부근의 하천을 기반으로 한 그 지역 지도자 하백의 딸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록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동부여(東夫餘)에서 어머니 유화와 함께 인질로 있었지만,

주몽에겐 항상 자신은 천자의 아들이라는 자의식과 하천(河川)세력의 지도자 하백의 외손자라는 자의식이 있었다.

주몽은 결국 동부여(東夫餘)를 탈출해서 엄사수(淹㴲水)를 건너,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가지게 된 압록강 인근의 방(鴨綠邉室)내지는 삼국사기 기준으론 요하 인근의 방(鴨渌邊室)에서 멀지않은 외할아버지의 하천(河川)영역으로 왔다고 본다.

주몽은 부여(夫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백(河伯)의 영역인 하천(河川)을 정확히 몰랐고,

대략 압록강 부근의 하천인 비류수(沸流水)와 졸본천(卒夲川)에 거주했다고 본다.

그리고 비류수(沸流水)와 졸본천(卒夲川)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에게 인정을 받고 사위가 되어 졸본부여(卒本扶餘)를 물려받은 거라고 본다.

아마도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은 주몽의 외할아버지인 하백(河伯)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주몽을 신뢰해서 사위로 삼고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권17 제5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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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 247년 02월(음) )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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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7 제5의 원문과 번역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의 내용은 247년 동천왕 때 평양(平壤)으로 천도한 내용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장수왕(長壽王)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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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다 ( 427년 (음) )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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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장수왕(長壽王)에 대한 본문과 번역이다.

十五年, 移都平壤.
15년(427)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위의 내용은 427년 장수왕 때 평양(平壤)으로 천도한 내용이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평양(平壤)은 바로 동천왕 때 천도한 평양(平壤)이 아닌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平壤)이다.

그러면 동천왕 때 천도한 평양(平壤)과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平壤)은 같은 평양(平壤)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선 동천왕 때의 평양(平壤)과 장수왕 때의 평양(平壤)은 같은 평양(平壤)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계신다.

나 역시도 두 개의 평양(平壤)은 같은 평양(平壤)이 아닐 거라고 본다.

고려사를 보면 서경(西京)과 평양(平壤)이 함께 기재된 내용들이 등장한다.

또한 앞의 글에서 나는 고려 서경(西京)과 고려 평양(平壤)은 다른 곳이라 말씀드렸다.

나는 고려 서경(西京)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지역인 졸본(卒本)이고,

고구려 평양(平壤)은 졸본(卒本)과 비류국(沸流國) 그리고 비류국(沸流國) 남쪽의 압록강에 접한 지역이며,

고려 평양(平壤)은 옛 비류국(沸流國)이 있었던 고려 성주(成州)의 남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과 접한 지금의 집안시(集安市) 남부라고 본다.

그런데 고려에서 서경(西京)이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인들에겐 성지와 같다고 본다)

고려에서 평양(平壤)이라는 의미는,

고구려가 여러번 천도를 했듯이 옛 고구려의 여러 도읍들 중 하나라는 의미로 인식했다고 본다.

(상징성에서 단 한곳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과 고구려 때 여러 번 이전한 수도들은 그 비중이 다르다.

그리고 고려의 서경[西京]은 단 하나이며 압록강[鴨綠江] 북쪽에 있지만 고려의 평양[平壤]은 압록강[鴨綠江]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있다고 본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정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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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禮曹判書申商啓曰: "三國始祖立廟, 須於其所都 新羅則慶州, 百濟則全州, 高句麗則未知其所都也" 上曰: "考之則不難知也。 雖不立於所都, 各於其國則可也。" 吏曹判書許稠啓曰: "祭者, 報功也。 我朝典章文物, 增損新羅之制, 只祀新羅始祖, 何如?" 上曰: "三國鼎峙, 不相上下, 不可捨此而取彼也。"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위의 내용을 조선 세종 때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신하들이 세종에게 삼국의 도읍에 시조의 묘를 세우자고 건의하면서 신라는 경주이고 백제는 전주이겠으나 고구려의 도읍은 알지 못한다(新羅則慶州, 百濟則全州, 高句麗則未知其所都也)고 한다.

(복기대 고고학 박사께서 현재의 북한 평양[平壤]이 실제 고구려 평양[平壤]인지 의구심을 가지시며 이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시청했었다)

그런데 위의 대화내용이 시조가 세운 첫도읍인지 아니면 삼국시대 때 각국의 도읍 중 하나를 가르키는 것인지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위의 조선 세종과 신하들의 대화 내용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전주(全州)는 백제의 시조(始祖)가 건국한 첫 도읍이나 백제의 도읍이 아니다.

전주(全州)는 후삼국시대 때 후백제(견훤백제)의 도읍이다.

백제는 시조(始祖)인 온조(温祚)가 하남 위례(河南慰禮)에 첫 도읍을 세웠다고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다(温祚都河南慰禮城).

백제의 시조 온조가 첫 도읍을 정한 곳을 조선이 정확히는 몰랐더라도,

전주(全州)가 백제의 첫 도읍도 아니고 이후의 도읍도 아니라는 것은 삼국사기만 읽어 봐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세종 때면 고려 서경(西京)이 있을 때에서 멀지 않은 기간이다.

(1388년도에도 고려 서경[西京]과 평양[平壤]이 존재했었고 이때는 1427년 때이다. 39년 전의 일이고 당시 조선에서 50대 초중반이면 대부분 기억할 수 있다)

조선 세종과 세종의 신하들이 몰랐다고 볼 수 없다.

이 당시는 조선이 지금의 함경북도도 완전히 장악하진 못했을 때다

조선 세종 당시 조선의 힘이 옛 고려 서경(西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 세종과 세종의 신하들은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첫 도읍인 고려 서경(西京,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 고구려의 졸본[卒本])을 서로 언급하지 않은 거라 본다. (조선 세종과 신하 모두 언급하고 곤란하니 언급을 피한 거라고 본다)

또한 위의 내용을 보면 현재 북한의 평양(平壤)은 조선 세종 때에도 주몽이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은 고사하고,

고구려 동천왕 때나 장수왕 때의 평양(平壤)으로도 생각하지 않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지금의 경상도 경주(慶州)가 신라를 건국한 곳이라고 조선 세종과 신하들이 생각했는데 이 내용도 논란이 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 23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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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 제 23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温祚都河南慰禮城....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위례에 도읍을 정했다(温祚都河南慰禮城)고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溫祚王)에 기재되어 있다.

즉, 조선 세종과 신하의 대화처럼 전주(全州)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