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진한(辰韓)의 북쪽 경계와 골암성(鶻巖城), 계림부(雞林府)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996년 3월 미상(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병신〉15년(996) 봄 3월 거란(契丹)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장간(張幹)과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 소숙갈(蕭熟葛)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며 말하기를, “한(漢)은 호한(呼韓)을 중히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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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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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䟽王爵, 益表國恩, 冊爾爲開府儀同三司尙書令高麗國王. 於戱! 海岱之表, 汝惟獨尊, 辰卞之區, 汝惟全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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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국왕의 작위를 주어 더욱 나라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그대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는다.
아아!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바깥 지역에서는 오직 그대만이 홀로 존귀하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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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황제가 고려국왕에게 책봉하는 내용이다.
책봉은 양국의 서열과 양국의 영토를 서로 합의한 국제조약과 같은 성격이다.
서열과 상대의 영토를 양쪽 중 하나가 침범하면 이 조약은 깨진다.
"나도 네 지위와 영역 건들지 않을 테니 너도 내 지위와 영역 건들지 마라!"이다.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辰卞之區, 汝惟全有)라고 거란의 황제가 고려국왕에게 밝히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당시 요동(遼東)은 고려와 거란이 서로 양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옛 마한(馬韓)지역은 언급하지 않고 옛 진한(辰韓)과 변한(卞韓)만 거란에선 고려국왕의 영토로 인정했다고 해석된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진한(辰韓)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이고 변한(卞韓)은 가야로 해석해 경남 김해와 그 주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진한(辰韓)은 북쪽으론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와 접한 지역이고 동쪽으론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남부로 대략 블라디보스톡에 미치는 영역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내용이다.(음력 1088년 9월 미상)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9월 요(遼)에 태복소경(太僕少卿) 김선석(金先錫)을 보내 각장(榷場) 설치계획을 중지하기를 요청하였다.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세 번이나 하소연하였으니 비록 번거로움을 무릅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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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에 대한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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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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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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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천황학주(天皇鶴柱)의 성(城)으로부터 서쪽의 언덕까지 거두고 일자별교(日子鼈橋)의 물(水)로 한정하여 동쪽을 우리의 강토로 할애하였습니다(自天皇鶴柱之城, 西收彼岸, 限日子鼈橋之水, 東割我疆)라는 고려국왕이 거란황제에게 보낸 서신 내용이 등장한다.
일자별교의 물(日子鼈橋之水)은 한문(韩文) 그대로 '태양의 아들(日子)이 자라(鼈)가 놓아준 다리(橋)를 통해 건넌 강(水)'을 뜻한다.
즉, 동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동부여 추격군을 피해서 건넌 강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이 지역이 옛 부여에 있다고 기재(路由夫餘奄利大水)되어 있고,
삼국사기 저자는 이 지역이 압록강에서 동북쪽에 위치해있다(在今鴨綠東北)고 주석하고 있다.
즉, 일자별교의 물(日子鼈橋之水)은 한반도(韓半島)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주몽이 추격군을 피해 건넌 강의 지점'이 고려와 거란이 합의한 동쪽 국경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 권100 열전 제 88 내용이다.
魏書 (四庫全書本)/卷10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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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 기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 권100 열전 제 88 내용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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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蒙乃與烏引烏違等二人棄夫餘東南走中道遇一大水欲濟無梁夫餘人追之甚急朱蒙告水曰我是日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兵垂及如何得濟於是魚鼈並浮為之成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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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에 기재된 내용은,
일자별교의 물(日子鼈橋之水)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된 근거가 되는 문장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097년의 기사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12월 계사 요(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와 이상(李湘)을 파견하여 옥책(玉冊), 규(圭), 인(印), 관면(冠冕), 차로(車輅), 장복(章服), 안마(鞍馬), 필단(匹叚) 등의 물건을 보냈다. 책문(冊文)에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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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원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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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而海隅立社, 北抵龍泉, 西極鴨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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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록(鴨綠)에 닿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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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황제가 고려국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공개한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국왕이 거란황제에게 보낸 서신과 고려사 기사들을 교차해서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서해에서 의주까진 압록강, 의주에서 지금의 요양시 화표주(고려국왕이 거란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선 천황학주의 성이라고 기재했다)까지는 고려와 거란이 합의한 서쪽과 서북쪽의 국경선이다.
그리고 거란황제가 고려국왕에게 언급한 북쪽의 용천(龍泉)은 고려국왕이 거란황제에게 언급한 일자별교의 물(日子鼈橋之水)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즉, 아래의 등식이라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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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별교의 물(日子鼈橋之水) = 용천(龍泉) = 발해 상경용천부 =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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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龍泉)은 발해의 상경용천부로 해석되며 이 지역엔 모단강이 흐르고 있으니 모단강은 옛 동부여를 흐르는 강이며 고려에선 주몽이 동부여의 추격군을 피해 건넌 강으로 인식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의 구글지도이다.
Bohaizhen · 중국 헤이룽장 성 무단장 시 닝안 시 邮政编码: 157431
중국 헤이룽장 성 무단장 시 닝안 시 邮政编码: 157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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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는 현재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고려의 북쪽 영토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다.
그런데 거란 황제는 고려국왕을 책봉할 때,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辰卞之區, 汝惟全有)라고 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의 남쪽 경계가 거란과 고려의 국경이며 이 지역이 진한(辰韓)의 최북단에 해당된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4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本作品在全世界都属于公有领域,因为作者逝世已经超过100年,并且于1930年1月1日之前出版。 Public domainPublic domainfalsefalse <!-- NewPP limit report Parsed by mw‐web.eqiad.main‐595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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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4의 구당서(舊唐書)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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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為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為雞林州都督府〈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是時(때)新羅既兼有百濟髙麗之地里與靺鞨故(까닭, 이유)設都督府于此俾王領之以重其鎮耳〉授法敏為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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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삭 원년(661)에 춘추가 죽었다. 조칙을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칙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말갈과 이웃하였다. 그래서 도독부를 설치하여 신라왕이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그 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었다.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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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한 한림원 학자들은,
살펴보건대, 계림과 현 길림은 발음과 지리가 모두 부합한다(按雞林與今吉林音譯地里俱符)라고 주석함으로서
흑룡강성 영안시 서쪽에 있는 길림성 길림시를 진한(辰韓)의 계림(鷄林)으로 본다.
고려사(高麗史)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기재된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의 주석한 내용을 검토한 내 개인적인 견해론,
길림시 일부가 진한(辰韓)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남쪽이 진한(辰韓)의 최북단이고
진한(辰韓)에 속한 계림(鷄林)은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가 아닌 지금의 훈춘시 팔련성 일대이며 러시아 하산스키 군의 많은 지역이 계림의 영역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918년 3월 미상(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정명(貞明) 4년(918) 3월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어느 날 우연히 시장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용모가 훤칠하고 수염과 머리털이 희고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쓰고 거사(居士)의 옷을 입고 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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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원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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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水中四維下, 上宰降子於辰馬’者, 辰韓馬韓也. .....
先操雞, 後搏鴨者, 王侍中御國之後, 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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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가운데 사유 아래로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낸다.’는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이다. ......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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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고려 황제가 되기 전에 고려에 등장한 예언을 풀이한 내용이다.
왕건이 먼저 계림(鷄林)인 진한(辰韓)을 얻고 이후 압록강(鴨綠江)으로 상징되는 마한(馬韓)을 얻는다고 풀이된 예언이다.
이 예언이 실현되었으니 고려사(高麗史)에 등장했다고 본다.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으면 고려사(高麗史)에 실리지는 않았다고 본다.
고려사(高麗史)에 서경이 등장하는 것은 왕건이 등극한 918년 이후인 921년이다.
고려의 서경은 압록강(鴨綠江)의 지류인 지금의 혼강이 흐르는 환인만족자치현이다.
그런데 왕건은 압록강(鴨綠江)보다 계림(鷄林)을 먼저 얻는다고 예언에 쓰여있다.
따라서 왕건이 등극한 918년에서 921년 사이에 진한(辰韓)에 속한 계림(鷄林)을 얻어야 예언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에 기재된 것을 볼 때 실제로 이 기간에 실현되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6 최승로의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당시 왕이 〈신하의〉 의견을 구하자[求言],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신은 초야(草野)에서 나고 자라서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도 부족합니다. 다행히 밝은 시절을 만나 오래 동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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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권제6 최승로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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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審我太祖神聖大王之御極也,...., 得秦韓之舊地, 十有九載, 統一寰瀛, 可謂功莫高矣, 德莫大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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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께서 왕위에 오르셨으니,....,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 공은 매우 높으시고 덕은 매우 크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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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寰瀛]를 통일하셨으니(得秦韓之舊地, 十有九載, 統一寰瀛)라고 기술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936년에 삼한(三韓)을 병탄했으니 19년 중 등극한 해를 일년을 치고 계산하면 918년 왕건이 등극한 해에 진한(秦韓)을 얻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신라는 935년에 고려에 귀부했으니 이 문장에 기재된 진한(秦韓)은 후삼국시대 때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신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진한(秦韓)은 진한(辰韓)의 초기명칭이니 왕건이 등극한 해에 얻은 진한(秦韓)은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으로 불리던 시기의 영토를 뜻한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2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二 部族〈二〉 挹婁〈一作□樓〉 漢 後漢書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條詳見前〉東北其邑落各有大人處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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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2의 위지(魏志)를 인용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번역은 '흠정만주원류고(남주성 역주, 글모아)'에 기재된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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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志
......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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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스스로 "진나라(秦) 노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왔다. 지금도 이를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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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고 진나라(秦)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에 왔으며 초기 명칭은 진한(秦韓)이어서 지금도 진한(秦韓)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辰韓在馬韓東自言避秦役來適韓國今有名之為秦韓者)고 기술하고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가 인용한 위지(魏志)의 내용을 본 내 개인적인 견해론,
왕건이 고려 황제로 등극한 해에 진한(秦韓)의 옛 땅은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으로 불렸던 시기,
즉, 삼국지위지(三國魏志)와 후한서(後漢書)가 편찬되기 전의 진한(辰韓)의 영토를 뜻한다고 해석된다.
즉, 왕건이 등극한 해에 얻은 진한의 옛 땅(秦韓之舊地)은 경상북도 경주의 신라가 아니라 과거 진한(秦韓)으로 불렸던 그 당시의 진한(辰韓) 옛 영토를 뜻하는 것이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이다.
제왕운기 < 고려시대 사료 DB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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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대한 내용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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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來欲渡蓋斯水(今大寧江也) 魚鼈化作橋梁橫. 漢元立昭二甲申(羅之□□一年也), 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 五代史曰, “高句麗扶餘別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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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왕이 개사수(蓋斯水)(지금의 대녕강(大寧江)이다)를 건너고자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었도다. 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BC.37) 갑신년(신라(新羅)가 건국한지 21년이 되던 해이다.)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구려현의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하였다.)에서 건국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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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주몽은 마한의 왕검성에서 고구려현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했다(開國馬韓王儉城,[今西京也. 以高句麗縣名立國])고 기재하고 있다.
즉, 마한의 왕검성(馬韓王儉城)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고 고려의 서경이라고 고려 때 인물인 이승휴가 자신의 저서인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은 지금의 요녕성 환인만주족자치현으로 추정되니,
진한(辰韓)은 요녕성의 동쪽인 지금의 함경북도 청진과 그 주변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후에 예(濊)와 남옥저(南沃沮) 땅도 진한(辰韓)에 속하게 되었다고 해석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지금의 길림성 길림시를 진한(辰韓)에 속한 지역인 계림(鷄林)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계림(鷄林)은 지금의 훈춘시 팔련성과 그 주변이라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윤선(尹瑄)은 염주(塩州)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맹하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韜鈐]을 잘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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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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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瑄, 塩州人. 爲人沉勇, 善韜鈐. 初以弓裔誅殺無厭, 慮禍及己, 遂率其黨, 走北邊. 聚衆至二千餘人, 居鶻巖城, 召黑水蕃衆, 久爲邊郡害. 及太祖卽位, 率衆來附, 北邊以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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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尹瑄)은 염주(塩州)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용맹하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韜鈐]을 잘했다. 과거에 궁예가 사람 죽이는 데 만족하지 못하자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였고, 마침내 그의 족당을 이끌고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2,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하여 흑수말갈[黑水蕃]의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시간이 흐르자 변방 군(郡)들에 해를 끼쳤다. 태조가 즉위하자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부하여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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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대왕 때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봐 윤선은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고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해서 흑수말갈(黑水蕃)의 무리를 모아 세력을 형성한 후 태봉의 변방을 공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건이 즉위하자 고려에 귀부했다고 한다.
즉, 윤선이 왕건이 등극하던 해에 고려에 귀부했으니 골암성(鶻巖城)은 918년에 고려의 영토가 된 것이다.
발해(渤海)가 존재하던 때이고 골암성(鶻巖城)에 주둔하던 윤선이 태봉의 변방에 해를 끼치었으니,
윤선의 골암성(鶻巖城)은 태봉의 영토 밖이며,
윤선은 골암성에서 흑수번(黑水蕃)을 불러 모았으니 골암성(鶻巖城)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주하던 지역과 인접한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당시 발해(渤海)는 지금의 영안시와 돈화시 등이 중심이었고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가 중심이었으니,
윤선이 불러 모은 흑수번(黑水蕃)은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거주하던 세력이고 골암성(鶻巖城)은 연해주 남부와 인접한 지역(한반도에서 러시아 우스리스크와 파르티잔스크로 연결되는 통로와 같은 지역)이라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성종(成宗) 때에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관원을〉 두기를 유수사(留守使) 1인은 3품 이상, 부유수(副留守) 1인은 4품 이상, 판관(判官) 1인은 6품 이상, 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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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의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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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留守官. ..... 忠烈王三十四年, 改雞林府, 置尹判官·司錄·法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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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계림부(雞林府)로 고치고, 윤(尹)·판관·사록·법조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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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동경이 충렬왕 때 계림부로 명칭을 바꿨다는 것은 고려 동경은 계림(鷄林)에 속한 지역이라고 고려 때 인식했다는 의미이다.
왕건이 시중 때 왕건이 황제가 된 후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취지의 예언이 있었고,
왕건이 등극한 해(918년)에 바로 왕건은 흑수번(黑水蕃)이 활동하던 지역의 인접지역인 골암성(鶻巖城)을 얻었으며,
왕건이 등극한 해(918년)에 진한의 옛 영토(秦韓之舊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동경은 후에 계림부(雞林府)로 고려에서 지역명을 바꾸었다.
아래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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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은 발해 동경으로 우리나라와 중국학자들은 추정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위의 훈춘시 팔련성은 발해의 동경이었으며 고려의 동경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발해의 남경은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 내에서 남쪽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역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윤선의 골암성(鶻巖城)은 이 훈춘시 팔련성에서 멀지 않은 훈춘시의 다른 지역이거나 러시아 하산스키 군의 어느 지역에 위치했었다고 추정된다.
골암성(鶻巖城)을 왕건이 등극한 해(918년)에 윤선이 고려에 귀부함으로 인해 얻음으로서,
왕건이 계림(鷄林)을 얻는다는 예언이 실현되었고, 왕건이 진한의 옛 땅(秦韓之舊地)을 얻었다는 고려사 내용은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즉, 고려가 생각하는 계림(鷄林)은 고려의 동경이며 골암성(鶻巖城)은 고려 동경의 인근이며 옛 계림(鷄林)에 속한 지역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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