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옥저(沃沮)와 예(濊)의 위치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9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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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선 옥저와 예에 대해 논하면서 삼국지위지(三國魏志), 후한서(後漢書), 요사(遼史)의 내용을 인용했다.
대상이 옥저(沃沮)와 예(濊) 두 나라이다 보니 산만하게 배열했는데 각 사서에 기재된 옥저(沃沮)와 예(濊)에 대해서 다시 구성을 나눠서 말씀드리겠다.
삼국지 위지(三國魏志: 진수[233~297], 배송지[372~451])를 인용한 옥저와 예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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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魏志
東沃沮在葢馬大山之東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按此與後漢書稍異〉漢武元封中以其地為元菟郡後徙郡句驪西北今所謂元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逺在單單大嶺之東分治東部都尉治不耐城别主嶺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光武六年省都尉以縣中渠帥為縣侯
濊南與辰韓北與髙句驪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漢武帝分朝鮮為四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為民後省都尉封其渠帥為侯今不耐濊皆其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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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위지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은 좁고, 서남쪽은 길어서 천 리 정도 된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후한서'와 조금 다르다.) 한 무제 원봉 연간에 그 땅은 현도군이 되었다. 뒤에 군을 구려(句驪) 서북쪽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른바 옛 현도군부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으며,
한(漢)은 토지가 넓고 멀다는 사유로 선선대령 이동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가 다스리도록 하고, 치소는 불내성에 두었으며, 별도로 영동 7현을 관할토록하였다. 이때에 옥저 또한 현이 되었다. 광무 6년(30)에 도위를 없애고 현의 거수를 현후로 삼았다(옥저는 선선대령 이동에 있었으며 영동 7현에 속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의 남쪽은 진한과, 북쪽은 고구려와 닿고, 동쪽 끝은 대해로서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한무제가 조선을 4군으로 나누고, 선선대령 서쪽은 낙랑에 속하게 하였으며, 영의 동쪽 7현은 도위가 관할토록 하였는데 주민들은 모두 예의 사람들이다. 뒤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들로 후를 삼았다. 지금의 불내와 예는 모두 그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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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三國魏志)를 보면,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그 땅은 현도군이 되었다....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으며....한(漢)은 토지가 넓고 멀다는 사유로 선선대령 이동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가 다스리도록 하고, 치소는 불내성에 두었으며, 별도로 영동 7현을 관할토록하였다. 이때에 옥저 또한 현이 되었다(東沃沮在葢馬大山之東....其地為元菟郡....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逺在單單大嶺之東分治東部都尉治不耐城别主嶺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光武六年省都尉以縣中渠帥為縣侯)라고 기재하고 있다.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東沃沮在葢馬大山之東)'는 삼국지위지(三國魏志)의 내용은 고려의 여진 정벌 때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女眞, 本勾高麗之部落, 聚居于盖馬山東)"라는 고려사(高麗史) 내용과 개마산 동쪽에 있다는 데에선 같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동옥저는 개마대산(葢馬大山) 동쪽에 거하면서 고려 때 여진으로 불리던 세력과 서로 인접하며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서 개마대산(葢馬大山)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어느 산으로 해석된다.
그 이유는 개마산(葢馬山) 동쪽에 기거한 여진은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스크나 우스리스크에 거하던 세력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며,
옥저에서 신라가 세워졌다고 통고(通考)와 통전(通典)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고구려 동천왕이 남옥저로 도피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그 지역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안의 동쪽 지역 내지는 동녕현 남쪽에 해당된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위의 삼국지위지(三國魏志)에선 옥저와 동옥저 두 개의 다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원래 옥저는 지금의 하북성 창려 주변에서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있었다고 해석된다.
옥저는 위만조선의 속국 내지는 부속된 세력이었지만 위만조선 멸망 후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주해서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동쪽 부분과 동녕현 보다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주해 거주했고 이들을 후에 동옥저 내지는 남옥저로 칭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둘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칭하진 않는다. 다만 후한서(後漢書)의 내용을 보면 하북성과 요녕성 사이에 있었던 원래의 옥저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옥저로 나뉘어 있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위의 선선대령(單單大嶺)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위치한 어느 산이고,
개마대산(葢馬大山)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어느 산으로 해석된다.
선선대령(單單大嶺)과 개마대산(葢馬大山)은 같은 산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는 선선대령(單單大嶺)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長白山)이 아니며, 개마대산(葢馬大山)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長白山)일 수도 있지만,
내 개인적으론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長白山)이 아닌 백두산(白頭山, 長白山)의 동쪽이나 동북쪽에 위치하는 산이라고 추정된다.
삼국지 위지(三國魏志)를 보면,
예의 남쪽은 진한과,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닿고, 동쪽 끝은 대해로서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濊南與辰韓北與髙句驪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라고 기재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위의 문장에서 고구려(髙句驪)는 주몽의 고구려가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한 고구려(髙句驪)와 주몽고구려(髙句麗)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위의 문장에서 옥저는 동옥저 내지는 남옥저로 해석된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장은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에 종속된 고구려(髙句驪: 주몽이 세운 고구려 이전의 고구려), 옥저, 예를 통칭해서 조선으로 칭했다고 해석된다.
위만조선과 위만조선 속국의 동쪽(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해석된다)이 모두 예의 땅이라면,
예는 지금의 요하 동쪽 일대 그리고 러시아 하산스키군 주변에 걸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들은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으로 불렸다고 본다.
이들 예(濊)나 예맥(濊貊)은 진나라(秦) 유민, 기자조선의 유민, 위만조선의 유민들과 합해져서 삼한을 이루었고 이들은 삼한으로 불렸다고 본다.
따라서 삼국지위지(三國魏志)나 후한서(後漢書)에서 지칭하는 예는 삼한에 포함되지 않은 예(濊)나 예맥(濊貊)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삼국지 위지(三國魏志)를 보면,
한무제가 조선을 4군으로 나누고, 선선대령 서쪽은 낙랑에 속하게 하였으며, 영의 동쪽 7현은 도위가 관할토록 하였는데 주민들은 모두 예의 사람들이다(漢武帝分朝鮮為四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為民)라고 기재하고 있다.
위의 문장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예는 요하 동쪽 외에 지금의 하북성과 요하의 서쪽에도 예가 있었고 이들은 위만조선의 속국이거나 귀속된 세력이었다.
이 위만조선의 귀속된 예도 옥저와 마찮가지로 선선대령(單單大嶺) 동쪽에 있었다는 내용이라고 해석된다.
후한서(범엽[398~445]이 편찬한 역사서)를 인용한 옥저와 예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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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東沃沮在髙句驪葢馬大山之東〈按原注葢馬縣名屬元莬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接其地東西狹南北長可折方千里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元菟郡後徙於髙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罷都尉官封其帥為沃沮侯
又有北沃沮去南沃沮八百餘里南接挹婁
濊北與髙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
元朔元年濊君南閭等率二十八萬口詣遼東内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菟真畨〈原注畨音潘〉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畨以并樂浪元菟元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嶺已東沃沮濊悉屬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嶺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嶺東地悉封其帥為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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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범엽[398~445]이 편찬한 역사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원주를 살펴보건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했다.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험성이다.) 동쪽은 대해의 바닷가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삼국사기, 삼국유사의 동부여로 해석된다), 남쪽은 예와 닿아 있다. 그곳은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다. 대략 사방 천 리이다.
문제가 조선을 없애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으며,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다시 옥저를 현으로 만들어 낙랑 동부도위 관할 아래 두었다. 광무제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그 우두머리를 옥저후에 봉하였다.
또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8백여 리 거리이며 남쪽으로 읍루와 닿았다(옥저는 원래 위만조선[낙랑군] 부근에 있었다고 해석된다. 위만조선 멸망 후 원래의 옥저에서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주한 후 동옥저로 불린 것 같다. 그리고 동옥저는 남옥저로도 불린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동옥저[남옥저] 북쪽에 읍루가 있고 북옥저가 있었다고 본다. 위치상 읍루가 동부여로 추정된다).
예는 북으로 고구려(髙句驪) 옥저(沃沮)와 닿고, 남쪽은 진한과 닿아 있다(이렇게 보면 옥저에서 시작한 신라는 진한 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진한이 지도자의 명칭이고 진한을 받드는 나라가 신라라면 신라는 건국 후 진한에 속한다). 동쪽 끝은 대해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하북성 창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위만조선의 속국이라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원삭 원년(B.C.128)에 예의 군장인 남려 등이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복속을 청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가 수년만에 없앴다.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을 쳐서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원주는 번의 발음은 반이라고 하였다)의 4군을 설치하였다.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합쳤으며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선선대령 이동의 옥저와 예는 모두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뒤에 지역이 넓고 멀어서 다시 '낙랑동부도위'를 두고, 영동 7현을 떼어서 그 관할 아래에 두었다(선선대령 동쪽에 옥저와 예가 있었고 이들이 모두 위만조선의 속국이었다. 이들은 위만조선 멸망 후 낙랑에 속했었지만 이후 선선대령 동쪽에 영동 7현을 만든 후 옥저와 예는 영동 7현에 속하게 된다). 건무 6년(30)에 도위 관직을 없애고 마침내 영동의 땅을 포기하여 그 지역의 수를 후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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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를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의 바닷가에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와 닿아 있다(東沃沮在髙句驪葢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接)고 기재하고 있다.
즉, 읍루는 동옥저보다 북쪽에 있다.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8백여 리 거리이며 남쪽으로 읍루와 닿았다(又有北沃沮去南沃沮八百餘里南接挹婁)고 기재하고 있다.
이 문장은 북옥저 남쪽에 읍루가 있고 읍루 남쪽에 남옥저가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고,
북옥저와 남옥저 아래에 읍루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옥저와 남옥저 남쪽에 읍루가 있다고 해석하면 동옥저 북쪽에 읍루가 있었다는 내용과 서로 상충된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북옥저와 남옥저 남쪽에 읍루가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는 배제시켜야 하며 남은 한 가지 해석인
북옥저 남쪽에 읍루가 있고 읍루 남쪽에 남옥저가 있다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해 남옥저는 동옥저로 해석되며,
북옥저와 남옥저 사이에 읍루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후한서(後漢書) 읍루에 보면,
挹婁,古肅慎之國也。在夫餘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or 옛 숙신의 국토에 있다]. 부여의 동북 천여리 동쪽으로 대해에 있고, 남쪽으로 북옥저와 접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다른 후한서의 문장인 동옥저 북쪽에 읍루가 있다는 내용이나 북옥저와 남옥저 아래의 읍루 내지는 북옥저와 남옥저 사이의 읍루라는 내용과 모순이 된다.
후한서의 저자는 읍루와 숙신을 같은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문장이 나왔다고 본다.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28 관구검전이다.
三國志/卷28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王凌字彥雲,太原祁人也。叔父允,為漢司徒,誅董卓。卓將李傕、郭汜等為卓報仇,入長安,殺允,盡害其家。凌及兄晨,時年皆少,逾城得脫,亡命歸鄉里。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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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의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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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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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를 지나 1천여 리 숙신씨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돌에 공을 기록해서, 환도의 산에 새기고, 불내의 성에 명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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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28 관구검전를 보면,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옥저를 지나 1천여 리 숙신씨[肅愼氏]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읍루가 아닌 숙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중국의 사서들을 해석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숙신(肅慎)은 후에 읍루(挹婁)로 명칭이 바뀐 같은 나라나 세력으로 간주한다.
또한 숙신(肅慎)과 읍루(挹婁)가 서로 동일한 지역을 영토로 했으며 그들은 각 시대의 순서에 따라 이 지역을 영토로 두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숙신(肅慎)과 읍루(挹婁)는 서로 다른 세력이다.
또한 그들의 발흥지는 숙신(肅慎)은 제1송화강(동류송화강)보다 북쪽이며, 읍루(挹婁)는 제1송화강(동류송화강)보다 남쪽이라고 해석된다.
두 세력은 지금의 제1송화강(동류송화강)을 기준으로 남북에 걸친 이 지역 원주민이고 혈통적으로도 같은 계열이라고 생각되지만,
숙신(肅慎)의 땅에서도 제1송화강(동류송화강) 남쪽에 거주하던 읍루(挹婁)라는 세력이 후에 숙신(肅慎)을 제압하고 원래 숙신(肅慎)의 영토였던 제1송화강(동류송화강)의 남쪽지역을 장악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숙신(肅慎)과 읍루(挹婁)가 서로 대치할 때 숙신(肅慎)의 남쪽 경계는 대략 지금의 의란현(衣蘭縣)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위지(三國魏志), 통전(通考), 통고(通典)의 내용을 검토하면,
숙신의 남쪽에 북옥저, 북옥저의 남쪽에 읍루, 읍루의 남쪽에 남옥저(동옥저), 남옥저(동옥저)의 남쪽에 예(예맥), 예(예맥)의 남쪽에 진한이 있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칭안 현 · 중국 헤이룽장 성 쑤이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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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옛 숙신(肅慎)과 부여(扶餘)의 위치를 계산하면 숙신(肅慎)의 영역은 수화시(绥化市) 경안현(庆安县)에서 동쪽으론 러시아 연해주까지 미친다.
흑룡강성 하얼빈시 의란현(依兰县)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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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해당된다고 해석된다.
흑룡강성 칠태하시(七台河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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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북옥저는 이 지역을 포함한 이 일대로 추정된다.
흥개호(Ханка)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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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개호(Ханка) 서쪽과 남쪽, 동쪽 일대에 읍루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흑룡강성 동녕시(东宁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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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 남옥저가 있었다고 해석되며 남옥저가 이 지역이라면 신라는 이 지역에서 처음 등장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구글지도이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 · 중국 지린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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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옥저와 신라는 이 지역 안에서 서쪽을 제외한 동쪽 지역에 있었다고 본다.
다만, 훈춘시 전 지역이 남옥저나 초기 신라의 영역은 아니었다고 본다.
훈춘시(珲春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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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시는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의 영토였고 그 중에 훈춘시 팔련성이 계림(鷄林)이었다고 본다.
러시아 하산스키 군(Хасанский район)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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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하산스키 군도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의 영토였고 계림(鷄林)이거나 그 영향권이었다고 본다.
함경북도 청진시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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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청진시 일대는 진한의 중심지였고 지금의 라진시가 진한의 북쪽 경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예의 땅의 계림과 남옥저 땅의 신라도 진한에 포함되면서 진한의 넓이는 확장되었다고 본다.
고구려 전성기 때 남옥저 지역은 고구려에 병합되었지만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의 영토는 신라가 진흥황과 선덕여왕 때 탈환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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