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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夫餘)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夫餘)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7. 17. 18:03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8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跳到导航 跳到搜索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八   疆域〈一〉   洪惟我   國家肇造大東覆育區宇輿圖之盛厯古所無   始祖建國鄂多理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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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 유기문고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청나라의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 중 일부와 번역이다.

吉林
謹按吉林周以前為肅慎地漢以後屬挹婁靺鞨
길림
조심스럽게 살펴보건대,
길림은 주나라 이전엔 숙신의 땅이었고
한나라 이후로는 읍루와 말갈의 땅이었다.

재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중국 길림시를 옛 부여국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 중국 길림시에 가면 부여국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청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선 숙신과 부여를 같은 목차인 권 1에 둘 정도로 비중이 높다. 그리고 길림시를 부여가 아닌 숙신의 땅으로 기술한다.

 

즉, 위의 만주원류고의 내용에서 보듯 길림은 옛 숙신의 영역이며 읍루의 영역으로 기술한다.

 

읍루는 후한(동한) 때에 등장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읍루는 옛 부여국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것은 기원전 37년이고 그 당시는 전한(서한) 때이니 읍루가 등장하기 전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주몽이 압록강 동북쪽의 엄사수라는 강을 건넌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髙句麗本紀) 동명성왕(東明聖王)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db.history.go.kr

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의 원문과 번역이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朱蒙乃與鳥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水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주몽이 이에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명과 친구가 되어 가다가 엄사수(淹㴲水)(일명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고려]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아래는 압록강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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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글지도를 보면 압록강이 보인다.

삼국사기의 저자는 주몽이 건넌 개사수의 위치를 압록강의 동북쪽이라고 기술했다.

압록강의 동북쪽이면 현재 길림시 방향보다 약간 아래 지역이다.

 

삼국사기에선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니 지금의 길림이나 길림의 남쪽 지역은 바로 금와가 왕으로 있던 동부여의 영역이거나 동부여의 인접 지역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의 내용처럼 주몽이 건넌 강이 압록강 동북쪽에 있으면 지금의 길림시 방향이고 길림시엔 제2송화강이 흐르고 있으니 주몽은 아마 길림시 남쪽의 제2송화강을 통과한 것 아닌가 추정된다(다만 내 견해와 달리 고려에선 영안시 남쪽의 모단강을 주몽이 통과한 강으로 본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선,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던 시기 길림 지역은 동부여나 부여가 아닌 숙신의 땅으로 기재하고 있다.

 

그러면 주몽은 동부여라는 명칭을 가진 숙신계의 나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과 번역이다.

 

주제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고구려의 시조 신화인 주몽(朱蒙) 신화를 전하는 자료는 다양한 계통이 있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 고구려 당시에 작성된 자료인 고구려 금석문에 전해지는 주몽 신화이다. ‘광개토왕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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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에 기재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字) 불명(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다.

 

따라서 고구려 당대의 고구려인들의 역사관을 알 수있는 자료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선 주몽이 건넌 강을 부여지역에 있는 엄리대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동부여라고 표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엄연히 부여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숙신이라고 표기하진 않는다.

 

삼국사기엔 주몽이 압록강 동북쪽의 엄사수를 건넜다 기재하고 있고 압록강 동북엔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부여의 중심지로 추정하는 길림이 있으니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의 내용은 대략 일치한다.

 

다만 위에서도 보듯 만주원류고에선 길림을 부여의 영역으로 기술하지 않고 숙신의 영역으로 기술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역사를 짧게 시적으로 언급하는 제왕운기에서는 부여국을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누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에선 부여국을 동, 서로 나누지 않고 단 하나의 명칭인 부여로 기재하고 있다.

 

나는 이전에 올린 글에서,

북부여와 동부여는 내부에서 서로 정권다툼이 생기면서 서로 상대방 세력을 구분하기 위해 칭한 명칭일 뿐이고 외부에서 볼 때 부여는 하나라고 말씀드렸었다.

 

또한 해모수가 등장하기 전에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는 외부에서 온 해모수에 밀려 동해안으로 도피해 망명정부의 왕을 자처하면서 계속 활동했었고

 

망명한 해부루를 지원하던 인물은 다른 지역의 정치세력이자 지역의 지도자인 금와(金蛙)라는 인물일 거라고 말씀드렸었다.

 

 

아래는 중국 길림시를 나타낸 구글지도이다.(내 개인적으론 이 지역 일대가 동부여라고 본다)

 

지린 시 · 중국 지린 성

중국 지린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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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강 동북쪽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길림시는 옛 부여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부여의 영역은 지금의 길림시에 한정되진 않는다. 길림시 외에 지금의 송원시 일대도 옛 부여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아래는 옛 부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송원시의 구글지도이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에 있다.(내 개인적으론 이 지역 일대가 북부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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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 고려태조 왕건 전후의 역사와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전후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동아시아나 몽골 지역의 고고학에 대해선 모른다.

 

그런데 고고학 학자들은 송원시 일대는 '백금보문화권'이라고 하고 길림지역 일대는 '서단산문화권'이라고 칭하면서

 

서로 다른 두 세력이 서로 각각 한 세력은 송원시와 그 북쪽 일대에서 또 다른 세력은 길림 일대 지역에서 기원전 300년 이전부터 거주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지금의 송원시와 그 북쪽의 '백금보문화권'은 부여국의 전신인 탁리국과 관련이 있으며

 

이전에 내가 말씀드렸듯이 부여의 동명왕 이전에도 탁리국 출신들이 이미 남쪽으로 이주해서 부여라는 명칭으로 활동했다고 보기 때문에

동명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쪽 부여지역과 북쪽의 탁리국은 같은 탁리국 출신이어서 동일한 문화권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에 반해 길림시 일대는 '서단산문화' 지역이라고 해서 송원시와 그 북쪽의 '백금보문화권'과는 처음부터 계통이 달랐던 사람들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본다. 또는 같은 계통의 사람들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전엔 길림 일대는 숙신 계통의 민족이 거주하던 것으로 보았으나 현재는 부여와 같은 계통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라고 한다.

 

다만, 기원전 300년 이후부터는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내 개인적으로 볼 때,

혈연으로나 문화로나 송원시 지역과 길림시 지역은 기원전 300년 이후로는 서로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로 동화되던 과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현재 송원시와 그 북쪽의 탁리국은 부여 계통의 민족이고 현재 길림시 부근은 숙신 계통의 민족이었지만 기원전 300년 이후로 길림시 부근은 숙신 계통의 민족이 부여화 되던 과정이었다고 본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현재 송원시 부근은 탁리국에서 남하했던 주민들과 후에 탁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왕 세력으로 구성된 북부여이고

 

해부루는 지금의 송원시 부근에서 부여의 왕으로 있다가 해모수에 밀려 동해안쪽으로 도피한 망명정부 지도자이며

 

길림시 주변의 세력이었던 금와(金蛙)가 해부루 망명정권의 후원자이자 해부루를 정치적으로 계승한 숙신계 세력의 지도자 아닐까 생각된다.

즉, 그는 해부루 사후 해부루를 계승해 그 역시 부여왕을 칭했다고 본다.

 

따라서 길림 주변을 영역으로 부여화된 숙신계 금와(金蛙)와 동해안으로 도피한 해부루 망명정권은 같은 지역에서 함께 거주하거나 공존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금와를 부여화된 숙신 계로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길림 일대의 세력으로 추정되는 것 외에 그의 이름인 금와(金蛙)의 와(蛙)가 '개구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蛙)는 양서류이며 땅과 하천에서 활동하는 동물이다.

숙신의 후예인 읍루는 하천을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주변을 공격하던 세력이었다고 한다.

 

해모수 계열의 북부여는 금와 계열의 동부여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본다.

 

결국, 외부에서 볼 땐 부여의 영역은 지금의 송원시 일대과 길림시 일대를 아우르는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