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예맥(濊貊), 계림(雞林), 신라(新羅), 진한(辰韓) 본문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9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9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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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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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魏志
東沃沮在葢馬大山之東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按此與後漢書稍異〉漢武元封中以其地為元菟郡後徙郡句驪西北今所謂元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逺在單單大嶺之東分治東部都尉治不耐城别主嶺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光武六年省都尉以縣中渠帥為縣侯
濊南與辰韓北與髙句驪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
漢武帝分朝鮮為四郡自單單大嶺以西屬樂浪自嶺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為民後省都尉封其渠帥為侯今不耐濊皆其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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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위지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은 좁고, 서남쪽은 길어서 천 리 정도 된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후한서'와 조금 다르다.) 한 무제 원봉 연간에 그 땅은 현도군이 되었다. 뒤에 군을 구려(句驪) 서북쪽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른바 옛 현도군부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으며,
한(漢)은 토지가 넓고 멀다는 사유로 선선대령 이동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가 다스리도록 하고, 치소는 불내성에 두었으며, 별도로 영동 7현을 관할토록하였다. 이때에 옥저 또한 현이 되었다. 광무 6년(30)에 도위를 없애고 현의 거수를 현후로 삼았다.
예의 남쪽은 진한과, 북쪽은 고구려와 닿고, 동쪽 끝은 대해로서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한무제가 조선을 4군으로 나누고, 선선대령 서쪽은 낙랑에 속하게 하였으며, 영의 동쪽 7현은 도위가 관할토록 하였는데 주민들은 모두 예의 사람들이다. 뒤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들로 후를 삼았다. 지금의 불내와 예는 모두 그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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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삼국지 위지(三國魏志)에 기재된 내용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보라색 글씨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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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이전의 옥저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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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이후의 옥저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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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위지에서는 후한서처럼 동옥저와 옥저를 엄격히 구분해서 기재하질 않았다. 다만 동옥저와 옥저는 구분해서 기재했다.
한 무제 때(위만조선 멸망 후로 해석된다) 현도군이 되었다는 동옥저는, 정확히는 동옥저가 아니다. 원래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있던 위만조선의 속국인 옥저를 지칭한다고 해석된다.
옥저는 현도군이었다가 낙랑군에 속했다가 다시 영동 7현에 속하게 된다.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선선대령이라는 산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그 산의 동쪽엔 영동7현이 있었고 옥저는 그 현에 속했다.
선선대령 동쪽의 영동 7현 주민들은 대다수가 예족(예맥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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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후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옥저는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을 동옥저로 칭했다고 본다.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후한서에서는 예의 남쪽은 진한,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라고 기재하고 있다. 후한서의 이 문장에서 지칭하는 옥저는 남옥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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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위지(三國魏志)에 보면,
예...... 동쪽 끝은 대해로서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濊.....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라고 기술되어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낙랑(樂浪)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창려의 동쪽인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두만강 일대 함경북도, 러시아 하산스키 군까지는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거주하던 영토였다고 해석된다.
또한 부여 역시 예(濊)의 땅이고 고구려도 예맥(濊貊) 계통이라고 추정되므로 부여와 고구려 영토도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주류였다고 보며, 한반도의 남부 일부지역 외의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도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주류였다고 본다.
아마도 삼한(三韓) 이전의 한국(韓國)은 예맥(濊貊)이 주 구성원이었고 진국(辰國)은 예맥(濊貊)으로 구성된 한국(韓國)에 진나라(秦) 유민이 유입된 후 중국에서 한국(韓國)을 부르던 명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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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東沃沮在髙句驪葢馬大山之東〈按原注葢馬縣名屬元莬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即王險城也〉東濱大海北與挹婁夫餘南與濊接其地東西狹南北長可折方千里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元菟郡後徙於髙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罷都尉官封其帥為沃沮侯
又有北沃沮去南沃沮八百餘里南接挹婁
濊北與髙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
元朔元年濊君南閭等率二十八萬口詣遼東内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菟真畨〈原注畨音潘〉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畨以并樂浪元菟元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嶺已東沃沮濊悉屬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嶺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建武六年省都尉官遂棄嶺東地悉封其帥為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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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범엽[398~445]이 편찬한 역사서)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원주를 살펴보건대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했다.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은 곧 왕험성이다.) 동쪽은 대해의 바닷가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와 닿아 있다. 그곳은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다. 대략 사방 천 리이다.
문제가 조선을 없애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으며,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다시 옥저를 현으로 만들어 낙랑 동부도위 관할 아래 두었다. 광무제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그 우두머리를 옥저후에 봉하였다.
또 북옥저는 남옥저에서 8백여 리 거리이며 남쪽으로 읍루와 닿았다.
예는 북으로 고구려(髙句驪) 옥저(沃沮)와 닿고, 남쪽은 진한과 닿아 있다(이렇게 보면 옥저에서 시작한 신라는 진한 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 것이 된다. 하지만 진한이 지도자의 명칭이고 진한을 받드는 나라가 신라라면 신라는 건국 후 진한에 속한다). 동쪽 끝은 대해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원삭 원년(B.C.128)에 예의 군장인 남려 등이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복속을 청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가 수년만에 없앴다. 원봉 3년(B.C.108)에 이르러 조선을 쳐서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원주는 번의 발음은 반이라고 하였다)의 4군을 설치하였다.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합쳤으며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선선대령 이동의 옥저와 예는 모두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뒤에 지역이 넓고 멀어서 다시 '낙랑동부도위'를 두고, 영동 7현을 떼어서 그 관할 아래에 두었다. 건무 6년(30)에 도위 관직을 없애고 마침내 영동의 땅을 포기하여 그 지역의 수를 후로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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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후한서(後漢書)에 기재된 내용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보라색 글씨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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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이전의 옥저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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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이후의 옥저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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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옥저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선선대령이라는 산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그 산의 동쪽에 옥저와 예가 있었다.
선선대령 동쪽에 위치한 옥저는 현도군이 되었고 후에 낙랑군에 속했으며 낙랑동부도위의 관할 안에 옥저와 예를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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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멸망 후 하북성 창려와 요녕성 조양시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옥저는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을 동옥저로 칭했다고 본다.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후한서는 이 개마대산 동쪽에 거주하는 옥저를 동옥저로도 칭했다.
동옥저는 남옥저로도 칭한 것으로 추정되며 남옥저에서 북쪽으로 8백리에 북옥저가 있었다.
그리고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 읍루가 있었다고 해석된다.
옥저 남쪽에 예가 있었다. 예의 북쪽에 있는 옥저는 동옥저 즉, 남옥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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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後漢書)에 보면,
예는 .... 동쪽 끝은 대해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濊....接東窮大海西至樂浪)고 기재되어 있으며,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라고 기재되어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낙랑(樂浪)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창려의 동쪽인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두만강 일대 함경북도, 러시아 하산스키 군까지는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거주하던 영토였다고 해석된다.
또한 부여 역시 예(濊)의 땅이고 고구려도 예맥(濊貊) 계통이라고 추정되므로 부여와 고구려 영토도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주류였다고 보며, 한반도의 남부 일부지역 외의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도 예(濊) 내지는 예맥(濊貊)이 주류였다고 본다.
아마도 삼한(三韓) 이전의 한국(韓國)은 예맥(濊貊)이 주 구성원이었고 진국(辰國)은 예맥(濊貊)으로 구성된 한국(韓國)에 진나라(秦) 유민이 유입된 후 중국에서 한국(韓國)을 부르던 명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북성 창려에서 요하(遼河)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高句驪: 주몽의 고구려 이전에 존재한 고구려)와 예, 옥저는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의 속국이거나 속한 세력이어서 광의로는 조선으로 칭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창려현(昌黎县)을 나타낸 구글지도이다.
창리 현 ·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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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창려현(昌黎县)은 위만조선의 왕험성이자 낙랑(樂浪)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아래는 조양시(朝阳市)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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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 조양시(朝阳市)는 현도군 고구려(髙句驪)가 있던 지역이라고 본다.
현도군 고구려(髙句驪)는 주몽이 고구려(髙句麗)를 세우기 이전에 존재한 고구려(髙句驪)이다.
아래는 중국 랴오닝성 진시시 소황지촌(小荒地村) 구글지도이다.
Xiaohuangdicun · 중국 랴오닝 성 후루다오 시 난퍄오 구 邮政编码: 12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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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서 1994년도에 임둔군태수(臨屯郡太守)의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한사군(漢四郡) 중 임둔군(臨屯郡)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10 본문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10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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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흠정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본문 일부와 번역이다. 흠정만주원류고(글모아)의 역자이신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그대로 올린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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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龍原府
新唐書: 濊故地為東京曰龍原府亦曰栅城府領慶鹽穆賀四州
新唐書: 龍原東南瀕海日本道也
通考: 唐貞元時渤海王大欽茂東南徙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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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용원부
신당서: 옛 예의 지역(濊故地)을 동경으로 삼아 용원부 또는 책성부라 불렀다. 경, 염, 목, 하 네 주 주를 관할하였다.
신당서: 용원 동남쪽은 바다와 닿는다. 일본도이다.
통고: 당나라 정원 연간(785~805)에 발해왕 대흠무가 동남쪽으로 동경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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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新唐書)에서는 발해의 동경이 옛 예의 지역(濊故地為東京)이라고 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내용이다.
중국사서 고려·발해유민 기사 < 고려시대 사료 DB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다. 고구려[高麗]가 경주(慶州)로 하였고, 발해는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하였다. 궁전이 있었다. 경주(慶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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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요사(遼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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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州, 鎭國軍. 節度. 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鹽·穆·賀四州事. … 太祖平渤海, 徙其民于大部落, 城遂廢. 聖宗伐高麗還, 周覽城基, 復加完葺. 開泰三年, 遷雙·韓二州千餘戶實之, 號開封府開遠軍, 節度, 更名鎭國軍. 隸東京留守, 兵事屬東京統軍司. 統州三·縣一.
開遠縣. 本柵城地, 高麗爲龍原縣, 渤海因之, 遼初廢. 聖宗東討, 復置以軍額. 民戶一千.
鹽州. 本渤海龍河郡, 故縣四, 海陽·接海·格川·龍河, 皆廢. 戶三百. 隸開州. 相去一百四十里.
穆州, 保和軍, 刺史. 本渤海會農郡. …
賀州, 刺史. 本渤海吉理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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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다. 고구려[高麗]가 경주(慶州)로 하였고(아마도 고구려가 예 땅의 계림을 병합한 후 경주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 때 신라가 다시 탈환한 것으로 해석된다. 태조왕건이 신라를 병합한 후 경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구려가 계림을 병합한 것에 기인해서 경주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발해는 동경(東京) 용원부(龍原府)로 하였다. 궁전이 있었다. 경주(慶州)·염주(鹽州)·목주(穆州)·가주(賀州) 4주의 일을 도독(都督)하였다. … 태조(太祖)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백성을 대부락(大部落)으로 옮기고 그 성은 마침내 폐하였다.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고 돌아와서 그 성의 기초를 두루 살펴보고는 다시 완전하게 수축하였다. 개태(開泰) 3년(1014)에 쌍주(雙州)·한주(韓州)의 1천여 호를 옮겨서 이곳을 채우고 개봉부(開封府) 개원군(開遠軍)이라 부르고 절도사를 두었다. 다시 진국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동경유수(東京留守)에 예속되고, 병사(兵事)는 동경통군사(東京統軍司)에 속한다. 주(州) 3개, 현(縣) 1곳을 통할한다.
개원현(開遠縣). 본래 책성(柵城)의 땅인데, 고구려가 용원현(龍原縣)으로 삼았고 발해가 그대로 이었다가, 요(遼) 초기에 폐하였다. 성종이 동쪽을 정벌하게 되자 다시 군액(軍額)으로 〈조달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민호(民戶)는 1,000이다.
염주(鹽州). 본래 발해 용하군(龍河郡)이며, 옛 현(縣)인 해양현(海陽縣)·접해현(接海縣)·격천현(格川縣)·용하현(龍河縣) 4개는 모두 폐지되었다. 호수는 300이다. 개주(開州)에 예속되어 있으며, 거리는 140리이다.
목주(穆州) 보화군(保和軍). 자사(刺史)를 두었다. 본래 발해 회농군(會農郡)이다. …
가주(賀州).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길리군(吉理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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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기재된 발해 동경은 요나라의 개봉부 개원군(開封府 開遠軍)이라고 한다.
요나라 개봉부 개원군(開封府 開遠軍)은 지금의 요녕성 봉성시(凤城市)로 중국의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러시아 학자들이 발해의 동경으로 보고 있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팔련성(珲春市 八連城)과는 지역이 크게 차이가 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요사(遼史)의 기록과 달리 요나라는 발해의 동경을 자국의 영토로 갖지를 못했서 왜곡을 했다고 본다.
아래는 요녕성 봉성시(凤城市) 구글지도이다.
펑청 시 · 중국 랴오닝 성 단둥 시
중국 랴오닝 성 단둥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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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遼史)에 기재된 발해의 동경은 이 지역 어디에 있다고 한다.
고려와 거란은 제 2차 전쟁이전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요양 화표주까지를 고려의 서북경계로 하고는 서북경계의 동쪽은 고려의 영토였고 서북경계의 서쪽은 고려와 거란의 완충지대인 요동반도 여진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정했다고 본다.
고려와 거란은 제 1차 전쟁 때 거란과의 합의에 따라 고려는 이 서북경계의 서쪽 지역인 요동반도 여진이 활동하던 지역에 몇몇 개의 진을 구축했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고려와 거란의 제2차 전쟁 이후 몇 지역은 거란에게 빼았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거란은 고려와의 제2차 전쟁 때 실제 발해의 옛 동경을 고려로부터 탈환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탈환한 지역인 지금의 요녕성 봉성시(凤城市)를 발해의 동경으로 주장했다고 본다.
그리고 거란이 고려로부터 발해의 동경을 탈환해서 개척했다고 사서에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훈춘시 팔련성(珲春市 八連城)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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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 러시아 학자들은 이 지역에 발해의 동경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발해의 동경이 옛 예의 지역(濊故地為東京)이라고 한다.
요사(遼史)에서는 발해의 동경은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本濊貊地...渤海爲東京龍原府)고 한다.
삼국지위지(三國魏志)에서는 예의 남쪽은 진한(濊南與辰韓)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의 남쪽에 진한(濊.....南與辰韓接)이고 예의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濊北與髙句驪沃沮)라고 기재하고 있다.
즉, 이 지역이 예(濊) 내지 예맥(濊貊)이니 이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남옥저(南沃沮)와 진한(辰韓)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역이 예(濊) 내지 예맥(濊貊)이면 남옥저(南沃沮)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안에서 동쪽지역이며, 진한(辰韓)은 지금의 함경북도와 그 남쪽지역인 한반도 안에서 동쪽지역에 해당된다.
다만 한반도의 동쪽 전체가 진한(辰韓)의 영토는 아니었다고 본다.
또한
통전(通典)에서는 고구려 왕은 옥저로 달아났다. 그 후에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옥저에] 남은 사람들은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髙麗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라고 한다.
통고(通考)에서는 관구검이 고려(고구려)를 쳐부수자 [왕이] 옥저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옥저에] 남은 사람들은 신라가 되었다(魏毌丘儉破髙麗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라고 한다.
따라서
삼국지위지(三國魏志), 후한서(後漢書), 통전(通典), 통고(通考), 신당서(新唐書), 요사(遼史), 고려사(高麗史)의 내용을 종합해서 검토하면,
내 개인적인 견해론,
예(濊) 내지 예맥(濊貊)과 남옥저(南沃沮)는 계림(雞林)과 신라(新羅)가 되면서 진한(辰韓)에 속하게 되었다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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