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의 도호부(都護府), 등주(登州), 명주(溟州) 본문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 우리 역사넷의 당나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이다.
교과서 용어해설 | 우리역사넷
[내용] 도호부(都護部)는 당이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구이며, 도독부(都督府)나 주현(州縣) 같은 하위 행정 단위를 지휘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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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의 우리 역사넷의 당나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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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구려 멸망 후에 당(唐)이 옛 고구려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구.
[내용]
도호부(都護部)는 당이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구이며, 도독부(都督府)나 주현(州縣) 같은 하위 행정 단위를 지휘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안북(安北), 선우(單于), 안서(安西), 안남(安南), 북정(北庭) 등 모두 6개의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 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에 설치되었다. 당은 안동 도호부를 통해 고구려 영토에 설치하려고 했던 9도독부 42주 100현뿐만 아니라, 백제 지역에 설치했던 웅진 도독부까지 포함한 영역을 관할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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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부(都護部)는 당나라 때 등장한 행정구역이며 당나라가 주변 국가를 정복하고,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역사넷 사이트의 도호부(都護府) 설명 내용이다.
우리역사넷
원래 도호부는 중국에서 새로 정복한 변경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고려에서도 처음에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했으나, 점차 일반 행정 기구로 변화하였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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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우리 역사넷 사이트에서 설명한 도호부(都護府) 본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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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시기의 지방 행정 기구.
내용
원래 도호부는 중국에서 새로 정복한 변경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고려에서도 처음에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했으나, 점차 일반 행정 기구로 변화하였다. 태조(太祖, 재위 918∼943) 대에 평양(平壤)에 평양대도호부를,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전주(全州)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둔 바 있으나 곧 폐지되었다. 광종(光宗, 재위 949~975) 대에도 두 개의 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성종(成宗, 재위 981~997) 대에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폐지되었고, 새로이 안동(安東)⋅안서(安西)⋅안남(安南)⋅안북(安北)⋅안변(安邊)의 5도호부 체제가 수립되었다.
크기에 따라 대도호부(大都護府)와 중도호부(中都護府)로 나누었으며, 각 도호부에는 사(使, 3품 이상)⋅부사(副使, 4품) 등의 관속을 두었다.
성종 대에 완성된 5도호부 체제는 이후 계속 변화하였다. 11세기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대에는 도호부의 위치가 변경되었고 안남도호부와 안동도호부는 폐지되어 3개의 도호부만 남았다가, 12세기에 다시 설치되면서 5도호부 체제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부 도호부가 폐지되거나 신설되고 명칭이 변경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각 도호부의 위치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컸다. 안동도호부는 상주(尙州), 경주(慶州) 등에 설치된 적이 있었으나 12세기 말에 경상북도 안동에 설치되었다. 안서도호부는 풍주(豊州)에 설치되었다가 황해도 해주(海州)로 옮겨졌다. 안남도호부는 전주, 고부(古阜), 영암(靈岩) 등지에 잠시 둔 적이 있으나, 12세기 중반에 수주(樹州)에 설치된 이후 대체로 이곳에 있었다. 안북도호부는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안변도호부는 함경남도 영흥(永興)에 설치되었다가 11세기 초 함경남도 안변으로 옮겼다.
의의
중국에서는 변경 지역에 설치한 행정 기구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고려에서는 행정 기구로서 기능하였고, 조선에서는 1000호 이상 규모의 군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도호부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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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설명을 보면 당나라의 도호부(都護部)는 타국의 영토를 정복했을 때 그 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이지만 고려의 도호부(都護部)는 그냥 군사적 요충지나 일반행정구역의 성격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전주(全州)와 상주(尙州)에서 보듯 전주(全州)는 후백제 지역이었고 상주(尙州)는 신라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전주(全州)와 상주(尙州)에 고려가 도호부(都護部)를 설치했다는 것은 당나라의 선례에 따라 고려가 타국(후백제와 신라)의 영토를 얻은 후 설치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를 기술한 조선의 학자들이나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 학자들은
고려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그리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를 모두 한반도 중부와 중북부의 지역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해석되게 기술하거나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와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그리고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역시 고려가 타국의 영토를 얻은 후 그 정복지에 설치한 지역이라고 본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를 도표로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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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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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도호부 해주(海州)는 황해도 해주가 아니라 고려 서경(지금으로 환인만족자치현으로 추정된다)에서 멀지 않은 요동(遼東)의 어느 지역이라고 본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개경 부근의 해주(지금의 황해도 해주로 추정된다)와는 별개의 지역이다.
서로 구별하기 위해 안서부(安西府)나 고죽(孤竹) 등으로 불렸다고 추정된다.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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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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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도호부 안주(安州)는 고려 서경에 속하며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 오녀산 부근의 어느 지역이라고 본다.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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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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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변도호부 등주(登州)는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크레이(Лебединое) 주변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옛 예나 예맥의 땅이었다고 추정되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가 서로 분쟁하며 소유하던 지역이었고 이후에는 발해의 영토였다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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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 주장에 대해서는 이 지역들을 다룰 때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천성군(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556)에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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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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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邊都護府登州本高句麗比列忽郡【一云淺城郡】, 新羅眞興王十七年, 爲比列州, 置軍主, 景德王, 改朔庭郡. 高麗初, 稱登州. 成宗十四年, 置團練使. 顯宗九年, 更今名. 高宗時, 定·平以南諸城, 被蒙兵侵擾, 移寓江陵道襄州, 再移杆城, 幾四十年. 忠烈王二十四年, 各還本城. 別號朔方【成廟所定】. 有國島. 屬縣七. 領防禦郡九, 鎭十【使三, 將七】, 縣令官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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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천성군(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556)에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재위 기간은 742~765) 때에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당나라 정원 연간[785~805]에 발해왕 대흠무가 동남쪽으로 동경을 옮겼다). 고려 초에 등주(登州)라고 불렀다. 성종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1018년부터 고려 말까지 등주는 안변도호부로 불렸다고 해석된다). 고종 때에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城)이 몽고(蒙兵)의 침입을 받자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에 임시로 머물렀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겨 거의 40년을 지냈다. 충렬왕 24년(1298)에 각자 본성(本城)으로 돌아갔다. 별호(別號)는 삭방(朔方)이다【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국도(國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7개, 관할하는 방어군(防禦郡)이 9개, 진(鎭)이 10개【사(使)가 3개, 장(將)이 7개이다.】, 현령관(縣令官)이 8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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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는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천성군(淺城郡)이라고도 한다.】으로(安邊都護府登州本高句麗比列忽郡【一云淺城郡】)라고 기재되어 있다.
즉, 고려 등주(登州)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내용이다. 1372년 06월 10일 (음)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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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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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安邊咸州. 以安邊府使張伯顔不能備禦, 杖八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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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안변(安邊) 함주(咸州)를 노략질하였다. 안변부사(安邊府使) 장백안(張伯顔)이 방비를 소홀히 했으므로 장형[杖] 87대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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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함주(咸州)의 방비는 안변부사(安邊府使)의 소임인 것을 볼 수 있다.
함주(咸州)의 방비는 안변부사(安邊府使) 관할이며 안변(安邊)과 함주(원나라 합란부)는 거리상 멀지 않다고 추정된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원일통지(元一統志)를 보면,
남경(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의 남쪽을 해란부(원나라의 합란부, 고려 함주)라 하고, 또 그 남쪽을 쌍성(쌍성총관부, 고려 화주)이라 하는데, 곧바로 고려의 왕경(고려 동경으로 해석된다)과 닿는다(自南京而南曰海蘭府又南曰雙城直抵於髙麗之王京)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려 함주(咸州: 원나라 합란부)는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남쪽이라고 말씀드렸었다.
따라서 고려 안변(安邊) 역시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남쪽 지역에서 크게 멀지 않다고 본다.
즉,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장처럼 지금의 강원도 안변이 고려 등주(登州)는 아니라고 본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조돈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처음에 우리 환조(桓祖, 이자춘)께서 쌍성(雙城) 등지의 천호(千戶)들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니 왕이 영접하며 말하기를, “어리석은 민(民)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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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조돈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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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是, 按地圖, 收復和·登·定·長·預·高·文·宜州, 及宣德·元興·寧仁·耀德·靜邊等鎭. 盖咸州以北, 哈闌·洪獻·三撒之地, 本爲我疆, 自暉等叛, 沒于元, 凡九十九年, 今皆復之. 臣桂領兵過伊板, 與女眞戰大捷, 斬其魁帖木兒, 傳首于京.
仁雨之初至也, 端州以北千數百里, 靡然南向, 仁雨貪財殺戮. 及都赤來見, 王授護軍, 賜金符爲東北面千戶, 使往撫女眞, 仁雨忌而殺之. 天翮隷仁雨麾下, 濫殺無辜, 掠牛馬財産, 奪人妻妾凡九人. 遂沮北人歸附之心, 暾深以爲恨. 暾還, 王大喜, 超授禮賓卿, 賜第于京.
六年, 遷太僕卿. 小生·都卿竄女眞境, 勢窮欲降, 見都赤降而被害, 欲見璽書乃降.
八年, 王遣暾賫璽書往諭, 暾至登州浮海, 舟行半月至海陽, 賜璽書. 小生等欲從暾入朝, 復懷異志, 衷甲而待, 暾卽登舟而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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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지도(地圖)를 살펴보았더니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을 수복하였다. 대개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闌)·홍헌(洪獻)·삼살(三撒) 지역은 본래 우리 강토(疆土)였는데, 조휘(趙暉) 등이 반역하여 원(元)에 몰수된 지 무릇 99년 만에 이제 모두 수복한 것이다. 정신계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판령을 지나다가 여진(女眞)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그 괴수 첩목아(帖木兒, 테무르)를 참수하여 머리를 개경(開京)으로 보냈다.
유인우가 처음 이르자 단주(端州) 이북 천 수백 리(里)가 순순히 고려(高麗)로 향하였는데, 유인우는 재물을 탐하여 살육을 자행하였다. 조도적(趙都赤, 조도치)이 와서 알현하자 왕이 호군(護軍)에 임명하였고 금부(金符)를 하사하여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로 임명하였으며 가서 여진을 어루만지게 하였는데, 유인우가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장천핵(張天翮)은 유인우의 휘하에 있으면서 죄 없는 이를 함부로 죽이고 우마(牛馬)와 재산(財産)을 노략질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처첩(妻妾)을 빼앗은 것이 무려 9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북쪽 사람들의 귀부할 마음을 막았으니, 조돈(趙暾)이 깊이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조돈이 돌아오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예빈경(禮賓卿)으로 올려 임명하였고 개경에 집을 하사하였다.
〈조돈은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태복경(太僕卿)으로 옮겼다. 조소생과 탁도경은 여진 땅에 숨었다가 형세가 궁해져 항복하고자 했지만, 조도적이 항복하여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옥새(玉璽)가 찍혀 있는 문서[璽書]를 보고서야 항복하려고 하였다. 〈공민왕〉 8년(1359)에 왕이 조돈을 보내어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가지고 효유(曉諭)하도록 하였는데, 조돈이 등주(登州)에 이르러 바닷길에 올라 배로 반 달 만에 해양(海陽)(할라지역의 궁한촌이며 동북9성 때의 길주를 지칭한다)에 이르러 옥새가 찍혀 있는 문서를 내려주었다. 조소생 등이 조돈을 따라 입조(入朝)하려고 했다가 다시 다른 마음을 품고 갑옷을 입고 기다렸더니 조돈이 곧 배를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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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돈이 등주(登州)에 이르러 바닷길에 올라 배로 반 달 만에 해양(海陽)에 이르러(暾至登州浮海, 舟行半月至海陽)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내용을 보면 등주(登州)는 바닷가에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조돈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처음에 조휘(趙暉)가 쌍성(雙城) 등지로 반란을 일으켜 원(元)에 들어갔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옛 땅을 수복하려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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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열전 조돈에 대한 원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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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雨率兵, 過鐵嶺, 次登州, 去雙城二百餘里, 留十餘日不進,.....
暾喜, 與弟天柱挺身馳出, 至三岐江. 乘舟已中流, 追騎百餘及岸而返. 暾至龍津, 謂家人曰, “從夫人浮海, 會我于登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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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鐵嶺)을 지나 등주(登州)에 이르자 쌍성(고려 화주)과의 거리가 200여 리(里)(79 km)였는데, 그곳에서 10여 일이나 머물면서 전진하지 않았다.......
조돈이 기뻐하며 동생 조천주(趙天柱)와 함께 앞장서서 달려 나와 삼기강(三岐江)에 이르렀다. 배를 타고 강 중류에 이르자 기병 100여 명이 강가까지 추격해 왔다가 돌아갔다. 조돈이 용진에 이르러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인(夫人)을 따라 바다를 건너 나와 등주(登州)에서 만나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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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登州)에 이르자 쌍성(고려 화주)과의 거리가 200여 리(里)(79 km)였는데(次登州, 去雙城二百餘里)라고 기재되어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인용한 원일통지(元一統志)를 보면,
남경(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의 남쪽을 해란부(원나라의 합란부, 고려 함주)라 하고, 또 그 남쪽을 쌍성(쌍성총관부, 고려 화주)이라 하는데, 곧바로 고려의 왕경(고려 동경으로 해석된다)과 닿는다(自南京而南曰海蘭府又南曰雙城直抵於髙麗之王京)라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바로 아래 지역에서부터 동남쪽이나 남쪽으로 79km 거리의 바닷가 지역이 고려 등주(登州)라는 계산이 나온다.
위의 거리를 계산하면 고려 등주(登州)는 대략 지금의 러시아 하산스키군 프리모르스키 크레이(Лебединое)이거나 함경북도 라진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하산스키군 프리모르스키 크레이(Лебединое)나 그 주변이라고 본다.
러시아 하산스키군 프리모르스키 크레이(Лебединое)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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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 등주(登州)는 이 지역이거나 그 주변에 있었다고 본다.
아래는 러시아 크라스키노 토성(Краскинское городище) 구글지도이다.
크라스키노 토성 · Kraskino, Primorsky Krai, 러시아 692715
★★★★★ · 역사적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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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지역은 발해의 대외 무역항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내가 고려 등주(登州)로 추정하는 프리모르스키 크레이(Лебединое) 인근에 있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명주(溟州)의 내용이다.
고려사 < 고려시대 사료 DB
명주(溟州)는 본래 예국(濊國)으로【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장군을 보내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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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高麗史) 본문과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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溟州本濊國【一云鐵國, 一云蘂國】, 漢武帝遣將討右渠, 定四郡時, 爲臨屯. 高句麗, 稱河西良【一云何瑟羅州】, 新羅善德王, 爲小京, 置仕臣. 太宗王五年, 以地連靺鞨, 罷京爲州, 置都督, 以鎭之. 景德王十六年, 改今名, 惠恭王十二年, 復古. 太祖十九年, 號東原京. 二十三年, 又以爲溟州. 成宗二年, 稱河西府, 五年, 改溟州都督府, 十一年, 更爲牧. 十四年, 爲團練使, 後又改防禦使. 元宗元年, 以功臣金洪就鄕, 陞慶興都護府. 忠烈王三十四年, 改江陵府. 恭讓王元年, 陞爲大都護府. 別號臨瀛. 有五臺山【五峯環列, 大小均敵, 故名. 西臺之下, 有泉湧出, 卽漢水之源】. 有大嶺. 有鏡浦. 屬縣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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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溟州)는 본래 예국(濊國)으로【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장군을 보내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 때에 하서량(河西良)이라 불렀고【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왕 때에 소경(小京)으로 삼고 사신(仕臣)을 두었다. 태종왕 5년(658)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에 접한다 하여 경(京)을 없애고 주(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경덕왕 16년(757)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775)에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태조 19년(936)에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다. 〈태조〉23년(940)에 또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성종 2년(983)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고, 〈성종〉5년(986)에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고쳤다가, 〈성종〉11년(992)에 다시 목(牧)으로 바꾸었다. 〈성종〉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로 하였다가, 뒤에 또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원종 원년(1260)에 공신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34년(1308)에 강릉부(江陵府)로 고쳤다. 공양왕 원년(1389)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임영(臨瀛)이다. 오대산(五臺山)【다섯 개 봉우리가 둘러서 있는데 크기가 비슷하여 이름지었다. 서대(西臺)의 아래쪽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곧 한수(漢水)의 발원지이다.】이 있다. 대령(大嶺)이 있다. 경포(鏡浦)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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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溟州)는 1260년에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이름이 바뀌었고, 1308년에 강릉부(江陵府)가 되었으며, 다시 1389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되었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명주(溟州)는 지금의 러시아 하산스키 군 일대의 어느 지역이라 본다.
이러한 위치이면 포선만노의 동진국 영토였고 원나라 옷치긴울루스 영토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는 동진국 멸망 이후 동진국에 빼앗긴 명주(溟州)를 탈환했다가 다시 원나라 옷치긴울루스에 빼앗겼고,
약 100 여 년 후 고려가 쌍성총관부(고려 화주: 지금의 도문시 남쪽 이라고 추정된다)를 탈환할 때 고려의 옛 명주(溟州) 땅도 다시 탈환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고려사에 보면,
고려 공민왕 시기에 쌍성총관부(고려 화주)를 탈환 할 때 고려가 원나라 옷치긴울루스로부터 탈환한 영토에 명주(溟州)는 없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의 명주(溟州)를 지금의 강원도 강릉으로 해석되게 고려사 지리지에 기재하면서 고려 명주(溟州)는 원나라 옷치긴울루스로부터 탈환한 영토라고 적시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고려 명주(溟州)가 지금의 강릉이라면 명주(溟州)는 고려 개경보다도 위도(緯度, Latitude)가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면 고려의 명주(溟州)가 원나라 옷치긴울루스 영토가 되었다가 쌍성총관부(고려 화주)를 탈환할 때 함께 탈환했다고 적시할 수 없게 된다.
또한 함께 탈환한 고려 화주(和州)와 함주(咸州)를 조선의 학자들이 모두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와 함흥 부근으로 해석되게 기술했는데 이들 지역과도 강원도 강릉은 멀리 떨어져있다.
이 경우엔 고려가 강원도 강릉과 함경남도 함흥 등 이 지역들과 함께 탈환했다는 것이 되므로 조선학자들의 주장에도 의구심이 들게 된다.
따라서 고려사를 집필한 조선의 학자들이 명주(溟州)를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려의 명주(溟州)가 포선만노의 동진국이나 원나라 옷치긴울루스로부터 탈환한 영토라는 단서가 되는 내용은 고려사에 보인다.
1260년과 1308년, 1389년 아래의 도표처럼 명주(溟州)는 세번이나 지역 명칭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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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원년(1260)에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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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34년(1308)에 강릉부(江陵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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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 원년(1389)에 대도호부(大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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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견해론,
원래 고려의 영토였던 명주(溟州)의 명칭을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라는 명칭까지 붙인 것은 기존의 고려 명주(溟州)가 두 번 타국에게 빼앗겼고 고려가 다시 타국의 영토가 된 명주(溟州)를 빼앗아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1260년 때는 동진국으로부터 명주(溟州)를 탈환해서 지명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정했고
1389년 때는 원나라 옷치긴울루스에게 명주(溟州)를 탈환해서 대도호부(大都護府: 아마도 강릉대도호부였다고 본다)로 정했다고 본다.
다만 1308년 등장한 강릉부(江陵府)는 명주(溟州)의 지명을 바꾼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명주(溟州)를 원나라 옷치긴울루스에 빼앗긴 상태에서 고려는 자국 내의 어느 다른 지역에 강릉부(江陵府)를 설치했었고(빼앗긴 명주[溟州]와 인근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56년 고려가 옷치긴울루스의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옛 명주(溟州) 땅도 함께 되찾게 되면서
되찾은 옛 명주(溟州) 땅은 다시 명주(溟州) 내지는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라는 이름으로 회복되지 않고 1308년 설치된 강릉부(江陵府)를 되찾은 옛 명주(溟州)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후 1389년 이 강릉부(江陵府)는 다시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되었다고 해석된다.
그렇지 않다면,
강릉부(江陵府)와 탈환한 옛 명주(溟州) 땅에 세워진 대도호부(大都護府)는 각각 따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
대도호부(大都護府) 지명이 1388년 이후인 1389년에 등장한 것을 볼 때,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데 공이 있는 이성계 집안의 공을 지명에다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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