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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3 (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 중 원문의 일부와 이를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해서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正因如此,他與「吾者野人」結下深仇大恨,在「吾者野人」強大的攻勢下,其子率部遷至圖們江外居住,洪武五年(1372年),宿敵兀狄哈達乙麻赤再次進襲,迫使斡朵里部部眾逃到圖們江南岸的阿木河地區。
1388年,明太祖與原元代遼陽行省五個女真萬戶府中的三部(胡里改部、托溫部、斡朵里部)取得聯繫,建立對付蒙古(北元)的同盟。 三部女真從今黑龍江依蘭縣沿松花江和牡丹江遷居到圖們江流域,即琿春一帶到朝鮮慶源、鏡城一帶。這地方元代屬奚關總管府。 |
이로 인해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와 오자야인(吾者野人)과는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강력한 공세 아래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의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 밖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372년 숙적인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부족인 달을마적(達乙麻赤)이 다시 공격하자 알타리(斡朵里)부족은 두만강 남쪽 기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 지역으로 도망쳤다.
1388년 명태조(太祖)가 원나라(년대로 볼 때 북원 시기로 보인다) 때 요양행성의 5개 만호 중 3개 만호(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托溫部], 알타리[斡朵里部])와 교섭하여 동맹을 맺었다. 몽골(북원)에 대항하기 위하여. 3부 여진(三部女真, 이 백과사전에선 '3부 여진[三部女真]'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들은 여진인이 아닌 옛 오국성과 오국부 세력의 후예들이다)은 지금의 이란현 흑룡강성에서 송화강과 무단강을 따라 두만강 유역으로, 즉 훈춘에서 조선의 경원(慶源)과 경성(鏡城)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원나라 때 혜관총관부에 속해 있었다. |
三部女真從今黑龍江依蘭縣沿松花江和牡丹江遷居到圖們江流域, 即琿春一帶到朝鮮慶源、鏡城一帶。這地方元代屬奚關總管府(3부 여진은 지금의 이란현 흑룡강성에서 송화강과 무단강을 따라 두만강 유역으로, 즉 훈춘에서 조선의 경원[慶源]과 경성[鏡城]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원나라 때 혜관총관부에 속해 있었다)。
이 중국유기백과에선 3부 여진(三部女真) 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완안부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여진과는 구별된 부족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거주하던 세력이었다.
즉, 유기백과에선 3부 여진이라고 기재하고 있지만 이들은 여진족이 아니다.
알타리부(斡朵里部)와 후르카부(胡里改部)는 옛 오국부(五国部)의 수도인 오국성(五國城)이 있었던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 출신 부족이고,
탁온부(托溫部)는 오국부(五国部)의 구성원인 분노리(盆奴裏)가 있었던 지금의 흑룡강성 가목사시 탕원현(汤原县)출신 부족이다.
이 백과사전을 보면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공격을 받고 송화강과 무단강을 따라 두만강 유역으로,
즉, 지금의 훈춘과 함경북도 경원(慶源), 경성(鏡城)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타리부(斡朵里部), 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부(托溫部)가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공격을 피해 무단강을 따라 지금의 길림성 훈춘과 함경북도 회령, 경원, 경성으로 이주해 왔다면
이 길림성 훈춘과 함경북도 회령, 경원, 경성은 바로 오자야인(吾者野人)과 같은 계통인 올적합(兀狄哈)이 거주하던 곳과 인근 지역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알타리부(斡朵里部), 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부(托溫部)는 자신들의 남쪽에 거주하던 오자야인(吾者野人) 계통의 올적합(兀狄哈)에게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옛 해동청 구매나 응로와 관련된 동쪽 지역의 수달달(水達達)인과 그 주변의 오자야인(吾者野人)에게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조선 태조 이성계 때의 일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위의 조선왕조실록 내용 중 함경도와 두만강 건너편에서 거주하던 여진어 사용부족 지도자들이 조선태조 이성계에 인사를 온 내용이 등장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번역한 내용 그대로 올린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 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맹안 (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阿木刺)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피발(被髮)하는 풍속을 모두 관대(冠帶)를 띠게 하고,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고쳐 예의의 교화를 익히게 하여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혼인을 하도록 하고, 복역(服役)과 납부(納賦)를 편호(編戶)와 다름이 없게 하였다. |
위의 내용을 보면 여진(女眞)과 올적합(兀狄哈) 그리고 오국성(五國城), 오국부(五国部), 오랑캐(兀郞哈) 등 다양한 출신들이어서 이들을 통틀어 야인(野人)으로 칭하다가 세부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여진(女眞), 올량합(兀郞哈) 그리고 올적합(兀狄哈)으로 나눈다. 하지만 이 역시 표기를 명확히 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선 여진(女眞)으로 포함했지만 두만(豆漫)과 다루가치(達魯花赤)는 옛 원나라 관리 출신이기에 이들은 여진(女眞)족으로 볼 수 없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리고 여진으로 분류한 맹안(猛安)들의 지역들은 두만강 주변 지역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두만강 북쪽에서 연해주 남쪽엔 남하한 흑수말갈(黑水靺鞨), 발해(渤海), 여진(女眞)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해(渤海)가 여진(女眞)은 아니다. 여진(女眞)은 발해(渤海)의 종속민이며 발흥지도 다르다. 여진(女眞)의 본 거주지는 두만강과 가깝지만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이지 한반도 안은 아니다.
하얼빈시 아청구에 거주한 완안부여진(完顔部女眞)은 거란에 의해 요동반도로 이주 된 계요적여진(係遼籍女眞)만 같은 여진(女眞)으로 인정했고,
완안부여진(完顔部女眞)과 계요적여진(係遼籍女眞)의 동서남북에 둘러싼 세력은 여진(女眞)이라고 칭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명이나 나라명으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완안부여진도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연해주 해안가의 흑수말갈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의 파생 부족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 경우엔 일단 논외로 한다)
따라서 두만강 주변에 거주하는데 여진인 관리인 맹안(猛安)이라고 불리던 세력은 원나라 때 테무게 오치긴의 세력을 따라 두만강 바깥까지 이주한 옛 금나라 출신들로 구성된 테무게 오치긴 영지에 속하던 세력일 수 있다.
금나라 출신이라고 모두 여진(女眞)족은 아니겠지만 조선에서 두만강바깥내지 주변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이민족의 지도자를 천호(千戶)에 해당되는 맹안(猛安)으로 칭한 것을 볼 때 이들 천호(千戶)는 옛 여진(女眞)족 출신으로서 테무게 오치긴 영지에 배속되어 테무게 오치긴 세력 내에서도 맹안(猛安, 千戶)급의 지도자 출신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위의 내 견해와 또 다른 나의 견해로는,
지금의 러시아 파르티잔강 유역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야라(耶懒)와 그 주변 여진족이 두만강 주변으로 이주해서 고려 말기와 조선 초에 거주했을 수 있다.
그 경우엔 야라(耶懒) 출신의 여진족을 원나라에서 고위관리인 맹안(猛安, 千戶)으로 인정하진 않았다고 본다.
따라서 만일 이들이 러시아 연해주나 그 주변에서 건너온 야라(耶懒)나 그 주변 출신 여진족이라면 이들에게 옛 금나라 관리 명칭인 맹안(猛安, 千戶)을 부여한 것은 이 지역에서 원나라를 몰아낸 고려였다고 본다.
아래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올적합(兀狄哈) 세력들 중 대표적인 세력인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남눌올적합(南訥兀狄哈),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거주하던 지역들을 설명한 내용이다.
(세종 때의 상황이라서 태조 때와는 시간 간격이 있고 후대이지만 이들은 올적합[兀狄哈] 부족들의 분포지역이기 때문에 그 선대인 태조 때도 올적합[兀狄哈]의 거주지는 이와 비슷했을 거라 추정된다)
아래는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오자야인[吾者野人])이 거주하던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의 구글지도이다.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이 거주하던 흑룡강성 영안시 아래엔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이주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알타리부(斡朵里部)가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아래는 함경북도 회령시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남눌올적합(南訥兀狄哈)이 거주하던 중국 흑룡강성 수분하시의 구글지도이다.
남눌올적합(南訥兀狄哈)이 거주하던 중국 흑룡강성 수분하시 주변인 흑룡강성 동녕현엔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남하한 후르카부(胡里改部)가 거주한 것으로 중국에선 추정하고 있다(우리나라에선 백두산 서쪽에 거주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아래는 후르카부(胡里改部)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는 흑룡강성 동녕현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거주했을 것을 추정되는 두만강 하류지역의 두만강역 구글지도이다. 아마도 골간올적합은(骨看兀狄哈) 두만강역에서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러시아 지역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랑캐(兀郞哈)의 거주지는 두문(豆門)이라고 하며 현재 함경북도 온성에서 종성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탁온부(托溫部)는 그와 일치한 부족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기록에 다온(多溫)이라는 부족명으로 기록한 세력이 보이며, '만주족 이야기(너머북스)'의 저자 이훈 교수는 다온(多溫)이라는 부족이 흑룡강성 가목사시 탕온현에서 함경북도로 이주한 탁온(托溫)일 것으로 추정한다. (만주족 이야기 페이지 41.)
이들의 거주지 역시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이라고 한다. 아래는 함경북도 온성군의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함경북도 종성의 구글지도이다.
위의 여러 올적합(兀狄哈)의 거주지역과 알타리, 후르카부, 탁온부, 오랑캐의 거주지는 서로 인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이 두만강 이북과 두만강 주변인 것을 볼 수 있다.
앞의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성계와 유대감이 강한 세력은 알타리, 후르카, 오랑캐, 올적합(우데게)이 아닌 여진족이라고 불린 세력이었다.
후에 이징옥의 난이 두만강 주변인 알타리와 오랑캐의 거주지 지역에서 일어났고 이시애의 난은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에서 일어난 것을 볼 때,
두만강 주변은 물론이고 함경북도 역시 여러 이민족이 모두 조선 왕조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두만강 이북의 올적합 세력은 이성계와 가까운 여진족만큼 이성계와 유대감이 강한 세력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리고 하얼빈시 의란현과 가목사시 탕원현에서 함경북도와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한 알타리부, 후르카부, 탁온부, 오랑캐는,
자신들의 뒷 배경인 원나라(大元)가 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이 되면서 올자야인들(이들 외에 수달달인들도 포함될 거라고 본다)에게 보복을 당해 이 지역으로 도피해 온 것이지 처음부터 이성계와 유대감이 있던 세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옛 오국성(五國城)과 오국부(五国部) 출신으로 두만강 이북과 두만강 주변에서 함께 거주하게 된 여진(女眞)이나 올적합(兀狄哈)과는 좋은 관계가 아니던 세력이다.
또한 이때는 조선이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던 시기이고,
고려 왕씨였던 우리집안의 조상님이 조선초기 왕씨 학살을 피해 이곳 함경북도로 도피했다고 한다.
나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청나라 황제의 조상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고 청나라 황제는 우리집안과 같은 조상을 둔 고려왕씨 출신이라 계속 주장하는데,
청나라에서 자신들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도 이 당시 두만강 주변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알타리부(斡朵里部)의 만호(萬戶)로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세력분포는 후에 이 지역에서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 이만주(李滿住)가 조선과 충돌하고
조선초기 단종과 세조 때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지역 여진족들이 계유정난 때 대금(大金)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오국성(五國城)으로 정한 후 이징옥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고 하는데(국내 백과사전엔 이징옥이 대금을 세우고 오국성을 수도로 정한 후 대금의 황제가 되려했다고 하지만 이징옥은 복권된 인물로 단종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만일 이징옥이 황제를 칭했다면 이징옥은 조선에서 복권이 될 수 없다)
옛 완안부여진(完顔部女眞)의 나라인 금나라를 계승해 대금(大金)을 세우려면 하얼빈시 아청구에 수도를 정하지,
왜 여진족과 친하지 않은 오국부(五国部)의 수도인 오국성(五國城)에 수도를 정하겠는가?
즉, 대금(大金)을 세우고 오국성(五國城)에 수도를 정하겠다고 선동하며 여진(女眞)인의 호응을 바라던 당시의 이방인들은 여진(女眞)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함경북도 회령이 오국성(五國城)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그렇게 알려진 것을 근거로 하지만 잘못 알려진 거라고 본다.
또한 이징옥 역시 두만강 주변인 함경북도 회령이 오국성(五國城)이라고 인식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징옥은 함경북도 회령에 거주하고 두만강을 건너려다 함경북도 종성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부하들의 피습을 당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오국성(五國城)으로 이동하려고 두만강을 건너기 전에 부하들에게 피습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국성(五國城)은 조선에 알려진 것처럼 함경북도 회령이 아닌 하얼빈시 의란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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