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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맹가첩목아의 고려(高麗) 이주 2(수정된 내용) 본문
아래는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이다.
아래는 위의 맹가첩목아에 대한 중국 유기백과의 내용 중 원문의 일부와 이를 번역한 내용이다. 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해서 번역이 서투르다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正因如此,他與「吾者野人」結下深仇大恨,在「吾者野人」強大的攻勢下,其子率部遷至圖們江外居住,洪武五年(1372年),宿敵兀狄哈達乙麻赤再次進襲,迫使斡朵里部部眾逃到圖們江南岸的阿木河地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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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와 오자야인(吾者野人)과는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오자야인(吾者野人)의 강력한 공세 아래 그(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의 아들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 밖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372년 숙적인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부족인 달을마적(達乙麻赤)이 다시 공격하자 알타리(斡朵里)부족은 두만강 남쪽 기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 지역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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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유기백과에 보면 1372년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그의 부족인 알타리(斡朵里部)가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의 명칭은 아목하[阿木河]이고 후에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 사후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지역 명칭을 회령[會寧]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내용이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해서 유기백과에 기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알타리(斡朵里)가 알도리(斡都里)라는 표기로 고려사에 등장한 것은 1392년으로 유기백과에 기재된 것 보다 20년이 지난 후이다.
고려사에는 이들이 1392년도에 어디에서 거주하고 있었는지 기재되어 있진 않다.
하지만 위의 중국 유기백과의 설명처럼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알타리(斡朵里)가 1372년 아목하(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이다)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그 이후 1392년도에도 이 지역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거주하던 알타리부(斡朵里部)의 만호(萬戶)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아목하(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이다)로 왔고(이 지역은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원나라 수천호 겸 다루가치로 있었던 지금의 연변 경신진 지역과 거리가 멀지 않다)
알타리(斡朵里)와 오랑캐(兀良哈)가 고려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이미 이성계가 고려를 장악했을 때 고려사 기록에 기재된 것이다.
아래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알타리부(斡朵里部)가 이주한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 구글지도이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원나라 다루가치로 있었다는 지역은 원나라 개원로 남경(연길 도원향 지역)의 오동이다. 아래는 원나라 개원로 남경으로 추정되는 연길 도원향 지역 구글지도이다.
아래는 원나라 개원로 남경의 오동지역으로 추정되는 훈춘시 연변 조선족 자치주 경신진 지역의 구글지도이다. (이성계 고조부는 이곳에서 몽골의 관리인 다루가치였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지금의 중국 훈춘시 연변 경신진 부근에서 원나라 관리로 지냈었고 이후 조부 이행리가 활동할 당시엔 지금의 중국 연변을 떠나 함주로 이주 후 정착했다.
따라서 지금의 연변 경신진에서 함주까지는 이성계와 올적합(兀狄哈) 그리고 여러 이민족들 간에
서로 안면이 있거나 친분관계가 있던 지역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고조부가 거주했었던 연변 경신진 지역이나 우리나라에서 이성계가 태어났다고 하는 지역인 함경남도 금야는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족들이 발흥한 지역은 아니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의 발흥지는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이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론 이성계가 함경남도 금야에서 태어났는지도 의문이다.
이성계의 고향이 함경남도라는 것은 실제 사실이라기 보단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그에 따른 정치적 제스쳐라고 본다.
퉁두란의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조선 초기 중국 연변 경신진 지역은 우데개(兀狄哈, 올자야인[吾者野人] 계통)가 활동하던 지역에서 가까운 곳이다. (완안부 여진을 세운 금나라인들이 올자야인[吾者野人]을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차별해서 부르던 명칭이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라는 단어이다)
아래는 흥개호(興凱湖)의 구글지도이다. 무단장시(牡丹江市)아래와 흥개호(興凱湖) 아래에서 남쪽 두만강까지가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들이 활동하던 지역이다.
제1 송화강과 제2 송화강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 달로고, 철륵, 오국부나 그보다 남쪽에서 활동하던 우데개(兀狄哈 올적합)와 달리
이성계의 측근이라고 알려진 여진족들은 사실 그들의 출신 계통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본다.
칭기즈칸의 동생인 테무게 오치긴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 옛 금나라 출신의 병사들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바로 옛 금나라 출신들로 구성된 원나라 병사들 후손이 여진족으로 불리며 이성계와 가까운 관계였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금나라는 완안부 여진족이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합병해서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원나라에 합병되어 원나라에서 활동하던 금나라 출신 병사들이 모두 여진족인 것은 아니다.
아마도 후에 원나라에 합병된 후 테무게 오치긴 세력 안에서 천호(千戶)에 해당되는 맹안(猛安)으로 불린 인물이라면 원나라에 합병된 후 테무게 오치긴 세력에 포함된 옛 금나라 여진족 출신의 후예일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 경우 이 여진족들은 원나라에 부역한 친원세력이 된다)
드라마에서 이지란 내지 퉁두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삼산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는 조선실록에서 맹안(猛安)이라는 옛 금나라 관리로 소개된 것을 볼 때,
"원나라 지역에 거주하면서 다른 이민족을 관리했던 옛 금나라 관리 집안 출신이자 여진인 아닐까?" 추정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퉁두란은 흑수말갈 지역에 거주하던 옛 여진인이고 퉁두란 등에게 옛 금나라 관리 명칭인 맹안(猛安)을 수여한 나라는 원나라가 아니라 공민왕 때 이 지역을 탈환한 고려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즉, 옛 야라(耶懒)나 야라(耶懒) 주변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두만강 부근으로 이주했고 고려가 이 지역에서 원나라를 몰아낸 후 그 지역 여진족의 수장들에게 옛 금나라의 전례를 따라 맹안(猛安)이라는 관직을 수여한 것이라고 본다.
퉁두란의 고향은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이라고 한다. 아래는 함경남도 북청의 구글지도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퉁두란의 고향인 삼산(參散)은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이 아니라고 본다.
아래는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함경남도 금야의 구글지도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이성계의 고향인 화주(和州)가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는 아닐 거라고 본다.
퉁두란의 고향이라는 함경남도 북청과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함경남도 금야는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의 발흥지인 지금의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거리가 매우 먼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완안부 여진인의 거주지가 아니다.
아래는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 여진인들이 발흥한 지역인 하얼빈시 아청구의 구글지도이다. 함경남도 금야나 북청과 거리가 매우 먼 것을 볼 수 있다. (하얼빈시 아청구에서 함경남도 금야나 북청과의 거리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본 규슈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완안부 여진은 자신들의 주변지역에 거주하던 세력들을 자신들과 구별해서 그들의 세력명을 칭한다. 지금의 중국 제1송화강과 제2송화강 지역의 세력들이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금사의 내용이다.
위의 금사의 내용은 금나라 태조 때 금나라가 주변 세력이나 부족국 들을 병합하는 내용이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한 위의 금사의 원문 일부와 번역 내용이다.
自今契丹·奚·漢·渤海·係遼籍女直·室韋·
達魯古·兀惹·鐵驪諸部官民,
지금부터 거란(契丹)·해(奚)·한(漢)· 발해(渤海)·계요적여진(係遼籍女直)·실위(室韋)·
달로고(達魯古)·올야(兀惹)·철려(鐵驪) 각 부(部)의 관민(官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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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부 여진이 주변의 부족들을 병합한 내용을 보면 같은 여진이지만 요나라의 기록에 올라간 여진부족은 계요적여진(係遼籍女直)이라고 기록하고 그 외의 부족은 여진이 아닌 그들의 부족 및 국가 명으로 표기한다. (이 금사의 기록에서도 보듯 완안부 여진은 주변의 계요적여진[係遼籍女直]만 자신들과 같은 여진이라고 인정했고 완안부 여진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세력들은 여진이라 칭하지 않고 그들의 부족명으로 칭한 것을 볼 수 있다)
완안부 여진의 동쪽엔 철려가 있으며,
서쪽엔 거란, 해, 달로고가 있고,
남쪽엔 발해(발해의 잔존세력?)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북쪽엔 올야(당시엔 북쪽에 있었다)와 실위가 있었다.
이 기록에 올야(兀惹)로 기록된 세력이 올적합(兀狄哈)의 선조인데 이때 올야(兀惹)는 지금의 하얼빈시 빈현에 거주하고 있었고 조선 초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에 거주했다.
함경도보다 북쪽인 두만강(豆滿江, Tumen Bira) 북쪽에서 중국 무단장시 남쪽과 러시아 흥개호 남쪽 사이는 주로 조선 초엔 올적합(兀狄哈)의 활동영역이었다. (물론 원나라 때 이곳에 이주한 여진족도 있었다고는 본다)
그리고 고려 말에 하얼빈시 의란현과 가목사시 탕원현에 거주하던 알타리부(斡朵里部)와 후르카부(胡里改部), 탁온부(托溫部) 그리고 이들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오랑캐(兀良哈)가 함께 그 지역을 떠나 두만강(豆滿江, Tumen Bira) 안팎과 지금의 흑룡강성 동녕현에 거주하게 되면서 인근의 올적합(兀狄哈)들, 여진인들과 지척에서 생활하게 된다.
아래는 두만강(豆滿江, Tumen Bira)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무단장시(牡丹江市) 남쪽 지역과 흥개호(興凱湖)의 남쪽 지역 그리고 두만강(豆滿江, Tumen Bira) 주변은 올적합(兀狄哈), 알타리(斡朵里), 탁온(托溫), 오랑캐(兀良哈 올량합),여진(女眞) 등 서로 출신 배경이 다른 제 각각의 세력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 우데개(兀狄哈 올적합)라면 지역적으로 이성계의 선조나 이성계에 대해 어느정도 안면이나 친밀감은 지니고 있었겠지만 이성계의 측근이라는 여진족만큼 이성계와 연대감이 있진 않았다고 본다.
그 외 알타리(斡朵里), 탁온(托溫), 후르카(胡里改), 오랑캐(兀良哈 올량합)는 고려 말기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 하얼빈 의란현과 그 부근에서 두만강(豆滿江, Tumen Bira) 주변과 흑룡강성 동녕현으로 이주한 세력이기에 처음부터 이성계나 여진족에게 연대감이나 동질감이 있던 세력은 아니었다.
즉, 알타리(斡朵里), 탁온(托溫), 후르카(胡里改), 오랑캐(兀良哈 올량합)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성계와 조선을 대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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