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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고려 왕씨, 백두산, 청나라 황실, 장백산, 만주 본문
청나라는 부쿠리용숀의 전설을 여러 차례 자신들이 만든 사서에 기록으로 남긴다.
하지만 그 사서들에 등장하는 부쿠리용숀의 전설은 내용에서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기록할 때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른 부쿠리용숀 전설은 1777년 청나라 건륭제의 지시에 의해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제가 원하는 부쿠리용숀 전설이 되었다고 본다.
부쿠리용숀의 전설이 소개된 청나라 기록은 다음과 같다.
1635년 '구만주당'의 천총 9년 기록(청나라가 각색하지 않은 실제 부쿠리용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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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의 청실록 태조무황제실록에 기재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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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의 청태조고황제실록에 기재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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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의 만주원류고의 '부족', '만주'에 기재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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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년의 '만주실록'에 기재된 부쿠리용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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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1635년 구만주당에 기록된 내용은 청나라가 각색하지 않은 실제 부쿠리용숀의 전설이다.
이후로 청실록 태조무황제실록, 청태조고황제실록, 만주원류고 그리고 만주실록엔 실제의 부쿠리용숀 전설에 기존에 없던 새로운 내용들을 첨가해서 결국 원래 전설과는 차이가 있는 새로운 형태의 부쿠리용숀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새로운 형태의 부쿠리용손 전설엔,
부쿠리용숀이 하얼빈시 의란현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서로 다툼으로 일관하던 원주민들을 평정시키고
원주민들에 의해 지도자로 추대되어 만주국을 세웠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내 개인적인 견해론,
'의란현 출신 이주민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분오열되었던 건주세력을 평정하고 통합해서 이들의 지도자가 된 후 만주구룬(만주국)을 세운 누르하치를 연상시키기 위해 본래의 전설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그 외에 청나라는 원래의 부쿠리용숀 전설에 중요한 내용을 삽입했다.
그것은 바로 장백산을 원래의 전설에 삽입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가 편찬을 지시한 만주원류고에선
'만주(满洲)는 불교의 만주실리(Manjusri, 만주사리[曼珠师利], 문수사리[文殊師利])와 연관된 뜻이며 청나라 황제는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다.'라는 내용을 기재했다.
아래의 내용은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원래 부쿠리용숀의 전설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장백산을 새로운 책을 편찬할 때마다 조금씩 등장시키고
종래에는 '장백산(백두산)이 청나라 황제의 발상지'라고 확실하고 명백하게 규정을 한 것은
청나라 황제와 황실인 '아이신기오로'씨가 고려태조 왕건의 후예임을 밝힌 거라고 본다.
백두산(장백산)이 고려태조 왕건 조상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주원류고에서 만주(满洲)가 만주사리(曼珠师利, 문수사리[文殊師利])라는 뜻이고 청나라 황제가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라는 주장은
고려사에 기재된 내용처럼,
고려왕건의 조상은 백두산(장백산)에서 왔고 그 백두산(장백산)은 문수사리(文殊師利. 만주사리[曼珠师利])의 영역이라는 내용을 계승한 것이라고 본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고려세계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고려사의 고려세계 내용 일부이다.
金寬毅編年通錄云,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善射以獵爲事, 一日與同里九人, 捕鷹平那山.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이르기를,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았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에서 매를 잡았다. |
위의 고려세계의 내용을 보면 태조 왕건의 조부(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쪽 집안인 신천강씨의 인물인 호경이 등장한다.
고려사에선 호경을 왕건의 6대조 조상이라고 하지만, 사실 호경은 신천강씨의 인물이지 고려 왕건의 친가쪽
조상이거나 인물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懿祖, 作帝建) 때 작제건(作帝建)이 하얼빈시 의란현에서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을 거쳐 개성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원래 개성 지역의 실력자인 신천 강씨와 무력충돌을 피하며 개성을 작제건(作帝建)의 영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신천강씨와 정치적 타협의 결과가
'개성은 작제건의(作帝建) 영역이 되고 대신 신천강씨 인물인 호경은 작제건(作帝建) 외가이다'라는 왕건 집안의 조상설을 만든 것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왕건의 후손인 우리집안에선 신천강씨인 호경을 우리 집안의 시조라고 기재하질 않는다.
우리 집안은 고려 왕씨의 당나라 황제 후손설을 따른다.
여기에 대해선 기회가 된다면 말씀드리겠다.
고려사의 고려세계에선 편년통록을 인용해서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을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과 연관시킨다.
내 개인적인 견해지만 고려태조 왕건의 집안은 조상 때부터 산악신앙이 있었다고 본다.
여기에 대해선 후에 말씀드리겠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내용이다.
아래는 위의 고려사 내용의 일부이다.
묘청이 또 왕을 설득하여 임원궁(林原宮)에 성(城)을 쌓고
궁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였는데, 팔성(八聖) 중 첫째는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문수사리보살 (護國 白頭嶽 太白仙人 實德文殊師利菩薩), 둘째는 용위악 육통존자 실덕석가불(龍圍嶽 六通尊者 實德釋迦佛), 셋째는 월성악 천선 실덕대변천신(月城嶽 天仙 實德大辨天神), 넷째는 구려 평양선인 실덕연등불(駒麗 平壤仙人 實德燃燈佛), 다섯째는 구려 목멱선인 실덕비파시불(駒麗木覓仙人 實德毗婆尸佛), 여섯째는 송악 진주거사 실덕금강색보살(松嶽 震主居士 實德金剛索菩薩), 일곱째는 증성악 신인 실덕늑차천왕(甑城嶽 神人 實德勒叉天王), 여덟째는 두악 천녀 실덕불동우파이(頭嶽 天女 實德不動優婆夷)이며, 모두 화상을 그렸다. |
묘청이 서경에 설치한 팔성당에 모신 팔선은 대부분 산에서 거주하는 선인들인데 여덟개의 장소 중 여섯개의 장소가 '악(嶽)'자가 들어가는 큰 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악(嶽)'들 중에 고려 왕씨와 고려왕의 조상과 관련된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 즉, 백두악(白頭嶽)이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의 신령한 존재가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만주사리[曼珠师利])인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부쿠리용숀의 전설을 기록한 구만주당(舊滿洲檔, 満文原檔) 천총 9년(1635년) 5월 6일자 기록이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대로 부쿠리산 아래 불후리 호수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지방에는 글과 문서가 없고 옛날에 살았던 것을 차례대로 말하여 전해온 것에 의하면 그 불후리 호수에 하늘의 세 처녀 엉굴런, 정굴런, 퍼쿨런이 목욕하러 왔는데, 까치가 준 붉은 과일을 막내 처녀 퍼쿨런이 얻어 입에 머금자 목구멍으로 들어가서 임신하여 부쿠리 용숀을 낳았습니다. 그 일족이 만주 나라 사람입니다. 그 불후리 호수의 둘레는 100리, 사햘리얀 울라(흑룡강)로부터 120~130리입니다. 나에게 두 아들이 태어난 후, 그 불후리 호수로부터 이주하여 가서 사할리얀 울라의 나르훈이라는 곳에서 살았었습니다." (원래 후르카 부족의 노인 묵시커의 증언 '만주족이야기,이훈 저, 너머북스' 페이지 194의 내용에서 발췌) |
위의 후르카 부족에게서 전해지는 실제 부쿠리용숀(布庫哩雍順 포고리옹순)의 전설에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쿠리용숀(布庫哩雍順 포고리옹순)이 태어나고 거주했다는 부쿠리산(布庫里山 포고리산)과 불후리(布兒湖裡 포아호리)호수만 등장한다.
아래는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청나라 태조무황제실록이다. 이 책은 1636년(숭덕 1년)에 편찬되어 여러 번 개수를 거쳐 1655년(순치 12년)에 정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위의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청나라 태조무황제실록 일부이다.
長白山,高約二百里,週圍約千里。此山之上有一潭,名他們,
週圍約八十里,鴨綠、混同、愛滹三江俱從此山流出。 鴨綠江自山南瀉出,向西流,直入遼東之南海。混同江自山北瀉出, 向北流,直入北海。愛滹江向東流,直入東海。 此三江中,每出珠寶。長白山山高地寒,風勁不休,夏日, 環山之獸俱投憩此山中,此山盡是浮石,及東北一名山也。 滿洲源流:滿洲原起於長白山之東北布庫里山下一泊,名布兒湖裡。 初,天降三仙女浴於泊,長名恩古倫,次名正古倫,三名佛古倫。 浴畢上岸,有神鵲啣一朱果置佛古倫衣上,色甚鮮妍,佛古倫愛之不忍釋手, 遂啣口中,甫着衣,其果入腹中,即感而成孕。 告二姊曰:「吾覺腹重,不能同昇,奈何?」二姊曰: 「吾等曾服丹藥,諒無死理,此乃天意,俟爾身輕上昇未晚。」遂別去。 佛古倫後生一男,生而能言,倏爾長成。 母告子曰:「天生汝,實令汝爲夷國主,可往彼處。」 將所生緣由一一詳說,乃與一舟:「順水去即其地也。」言訖,忽不見。 其子乘舟順流而下,至於人居之處登岸,折柳條爲坐具,似椅形,獨踞其上。 彼時長白山東南鰲莫惠〈地名〉鰲朵里〈城名〉內,有三姓夷酋爭長,終日互相殺傷,適一人來取水, 見其子舉止奇異,相貌非常,回至爭斗之處,告眾曰:「汝等無爭,我於取水處遇一奇男子,非凡人也。 想天不虛生此人,盍往觀之?」本酋長聞言罷戰,同眾往觀。 及見,果非常人,異而詰之,答曰:「我乃天女佛古倫所生, 姓愛新華言金也覺羅姓也,名布庫里英雄,天降我定汝等之亂。」因將母所囑之言詳告之。 眾皆驚異曰:「此人不可使之徒行。」遂相插手爲輿,擁捧而回。三酋長息爭, 共奉布庫里英雄爲主,以百里女妻之,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南朝誤名建州。 |
위의 '태조무황제실록'은 구전되던 부쿠리용숀의 전설을 20년 후인 1655년에 다시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기록한 내용이다.
1635년의 구만주당 기록에 등장하는 부쿠리용숀의 전설과 조금 다르다. 원래 부쿠리용숀 전설에 등장하지 않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등장한다.
하지만,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특별한 의미없이 주위에 압록강, 혼동강(송화강), 애호강(두만강)이 있다는 내용이나 타문(他們 백두산 천지이다)이라는 호수가 있다는 내용, 겨울에 춥다는 정도의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에 대한 소개만 등장한 후 부쿠리용숀의 전설이 등장한다.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의 의미가 무엇이라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또한 부쿠리용숀의 전설을 기술할 때도 '장백산 동북쪽 부쿠리산과 불후리호수(長白山之東北布庫里山下一泊, 名布兒湖裡)'라는 내용만 등장한다.
이 '청실록 태조무황제실록'에서부터 원래 전설에도 없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뜬금없이 등장한다고 한다.
아래는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청태조고황제실록의 내용이다. 이 책은 1682년(강희 21년)부터 편찬을 시작해서 1686년(강희 25년) 2월에 완성된 실록이다.
아래는 위의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청태조고황제실록의 내용 일부이다.
太祖承天广运圣德神功肇纪立极仁孝睿武端毅钦安弘文定业
高皇帝姓爱新觉罗氏讳先世发祥于长白山。 |
청나라 강희제 때부턴 장백산이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라고 기술한다(高皇帝姓爱新觉罗氏讳先世发祥于长白山).
앞의 청실록 태조무황제실록에선 단순히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등장만 했다.
하지만 청태조고황제실록에선 갑자기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청나라 황제 조상의 발상지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서를 작성한 청나라 강희제 때부터 청나라 황족의 발상지인 장백산(長白山)이 현재 북한의 백두산(白頭山)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만주원류고의 편찬을 지시하는데
만주원류고에선 만주(满洲)는 문수사리(文殊師利) 즉, 만주사리(曼珠师利)라는 뜻이라고 밝힌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의 만주원류고 권1 원문이다.
아래는 만주원류고의 원문의 일부이다. 그대로 올린다.
滿洲
按 滿洲本部族名恭考發祥世紀長白山之東有布庫哩山其下有池曰布勒瑚里 相傳三天女浴于池有神鵲銜朱果置季女衣季女含口中忽已入腹遂有身尋産一 男生而能言體貌竒異及長天女告以吞米果之故因錫之姓曰愛新覺羅名之曰布庫哩雍順 與之小舠且曰天生汝以定亂國其往治之天女遂凌空去于是乗舠順流至河歩折栁枝 及野蒿為坐具端坐以待時長白山東南鄂謨輝之地有三姓争為雄長日 搆兵相仇殺適一人取水河歩歸語衆曰 汝等勿争吾取水河歩見一男子察其貌非常人也天不虚生此人 衆皆趨問答曰我天女所生以定汝等之亂者且告以姓名衆曰此天生聖人也 不可使之徒行遂交手為舁迎至家 三姓者議推為主遂妻以女奉為貝勒居長白山東鄂多理城建號滿洲是為 |
만주
살펴보면, 만주는 본래 부족 이름이다. 이제 삼가 '발상세기'를 고찰해 보면, "장백산의 동쪽에 포고리산(부쿠리산)이 있고 그 아래에 포륵호리(불후리)라는 못(호수)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세 명의 선녀(천녀)가 그 못에서 목욕을 할 때에, 신령한 까치가 붉은 과일을 물어다 막내 선녀의 옷 위에 두었는데, 막내가 그 과일을 입에 넣자 문득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그 선녀(천녀)가 임신을 하게 되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였고 몸과 얼굴의 생김새가 기이하였다. 아이가 자라자 선녀(천녀)는 과일을 먹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고, 사내아이에게 애신각라(아이신기오로)라는 성과 포고리옹순(부쿠리용숀)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선녀는(천녀) 그에게 작은 거룻배를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어지러운 나라를 안정하게 함이니 그곳에 가서 난국을 다스려라'라고 하였다. 선녀(천녀)는 마침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사내는 거룻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 가서 강가에 도착하였다. 사내는 강가로 올라가 버드나무 가지와 들쑥을 꺽어 자리를 만들고, 단정히 앉아서 [때를] 기다렸다. 그 당시 장백산 동남쪽 악모휘(오음회)라고 부르는 땅에서는, 세 다른 성씨들이 우두머리의 자리를 다투었는데, 오랫동안 서로 원수가 되어 군사를 동원하여 상대를 죽였다. 때마침 한 사람이 강가에서 물을 기어서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하길, '여러분은 다투지 마시오. 내가 강가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랐소. 하늘이 허투루 이 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닐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물가의 사내에게 달려가] 다투어 물어 보았더니, 그 사내가 대답하되, '나는 선녀(천녀)의 아들이오. 여러분이 서로 다투는 것을 평정하러 온 사람이오'라고 말하고 자기 성명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말하되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성인이니 걸어서 가게 할 수 없다'라 말하고 서로 손을 마주잡아 가마를 만들어 태우고 맞이하여 집에 이르렀다. 세 씨족은 상의하여 사내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또한 여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패륵(버일러, 여진어 사용 지역에선 부족장 내지는 추장의 뜻으로 사용된다)으로 받들었다. 장백산 동쪽 악다리성(알타리, 오도리)에 살면서 나라이름을 '만주'라고 하였다. |
1655년 청실록 태조무황제실록에선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의 지형과 기후만 밝히다가, 1686년 청태조고황제실록에선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이 청나라 황제와 황실인 아이신기오로씨의 발상지라고 선포한 후,
1777년 만주원류고에선 부쿠리용숀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와 공간을 가르키는 기준점이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인 것을 밝힌 것이다.
아래는 중국유기문고의 만주원류고 권1 원문이다.
아래는 만주원류고 원문 내용이다. 그대로 올린다.
是为国家开基之始以国书考之
满洲本作满珠二字皆平读 我朝光启东土每岁西藏献丹书皆称曼珠师利大皇帝 翻译名义曰曼珠华言妙吉祥也又作曼殊室利大教王 经云释迦牟尼师毗卢遮那如来而大圣曼殊室利为毗卢遮那 本师殊珠音同室师一音 |
이것이 바로 처음에 나라의 기틀을 연 것으로 국서를 고찰해 보면
만주(满洲)는 본래 만주(满珠)라고 했었고, 두 글자는 모두 평성으로 읽는다. 우리 왕조가 빛나는 동쪽 땅에서 새로 나라를 열자, 매년 서장(지금의 티벹이다)에서 단서를 보냈는데, 그 문서에서 우리 황제를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라고 불렀다. 그 이름의 뜻을 번역하면 만주(曼珠)인데, 중국말로 '묘하고 길하고 상서롭다'는 뜻이며, 또는 만주실리대교왕(曼殊室利大教王)이라고도 적었다. 경에는 "석가모니사(释迦牟尼师 석가모니의 스승)는 비로차나여래이다"라고 하였으니, 대성만주실리가 곧 비로차나이다. 본래 사(师), 수(殊), 주(珠)는 모두 발음이 같고 실(室)과 사(师) 또한 같은 것이다. |
부쿠리용숀의 만주나라(Manju nation) 외에 만주(Manju, 满洲)의 뜻에는 만주사리(曼珠师利, 文殊師利)라는 의미도 있으며
청나라 황제가 달라이라마로부터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 로 인정받았다고 밝힌다.
만주원류고 문장의 구성과 문맥을 보면,
부쿠리용숀의 전설과 아무 관련도 없는 만주사리(曼珠师利, 文殊師利)를 언급하면서 만주(Manju, 满洲)가 문수사리(文殊師利) 즉, 만주사리(曼珠师利)이고
청나라황제는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라고 이야기 할 이유는 없다.
아래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문수사리(文殊師利) 즉, 만주사리(曼珠师利)는 고려사에선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을 관장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고려사에선 고려왕건의 조상은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에서 왔다고 한다.
고려 왕건의 후손인 청나라 황제와 황실인 아이신기오로씨가 자신들의 조상과 관련된 백두산(白頭山, 청나라에선 장백산[長白山]으로 칭한다)을 강조하면서
원래 부쿠리용숀 전설엔 등장하지도 않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을 삽입하고 후에는 장백산(長白山,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이다)은 청나라 황제와 아이신기오로씨의 발상지라고 한 후
결국엔 청나라 황제는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라고 밝힌 것이다.
즉, 도식을 만들면 다음과 같다.
고려 왕건 조상의 발상지 = 청나라 황제 조상의 발상지 =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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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장백산)을 관할하는 신령한 존재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만주사리[曼珠师利], 만주슈리[Manjusri]) = 만주(Manju, 曼珠, 满珠, 满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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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리대황제(曼珠师利大皇帝) = 문수사리대황제(文殊師利大皇帝) = 고려왕씨 출신 청나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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