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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의 조상과 측미(側微) 본문

태조 왕건의 조상

태조 왕건의 조상과 측미(側微)

박지원( baghatur khan) 2021. 4. 17. 17:19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원문 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又詔曰, “人臣運佐時之奇略, 樹盖世之高勳者, 錫之以分茅胙土, 褒之以峻秩崇班, 是百代之常典, 千古之宏規也. 朕出自側微, 才識庸下, 誠資群望, 克踐洪基, 當其廢暴主之時, 竭忠臣之節者, 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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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한 '고려사'원문을 번역한 내용이다.

 

내용은 고려태조 원년으로 왕건이 즉위한 해에 있었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왕건은 지도자로 추대된 후 공신을 논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아래는 위의 고려사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朕出自側微, 才識庸下, 誠資群望, 克踐洪基, 當其廢暴主之時, 竭忠臣之節者, 宜行賞賚, 以獎勳勞.

짐은 미천한 신분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함에도
진실로 여러 사람들의 소망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으니
폭군을 폐위시켰던 당시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다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상을 주어 그 공로를 기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짐은 미천한 신분으로 재주와 식견이 용렬함에도"로 번역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朕出自側微, 才識庸下"

 

이 중에 재주와 식견은 주관적인 평가영역이며 왕건의 겸손함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미천한 신분은 객관적인 평가영역이므로 사실에 대한 판단 영역이다.

그러면 실제로 왕건이 혁명 당시에 미천한 신분이었을까?

 

위의 원문에서 "짐은 미천한 신분으로"를 번역한 원문은 아래 내용이다.

 

"朕出自側微"

 

한문을 그대로 읽으면 "짐출자측미"이다.

즉, "짐은 출신이 '측미'하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면 이 측미(側微)라는 단어가 '한미하다'내지는 '미천하다'라는 뜻일까?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장화왕후 오씨에 대한 내용이다.

조 왕건의 제2황후인 장화왕후 오씨에 대한 내용이다.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은 사서엔 많이 알려져있진 않다.

따라서 현재 그 지역에 전해진 구전된 이야기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측미(側微)한 출신이여서 태조 왕건이 부인으로 맞으려는데 주저(?)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래는 고려사 열전 '장화왕후 오씨'에 기재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太祖召幸之, 以側微

그러나 왕후의 집안이 미천하므로

글에 대한 원문은 아래와 같다.

太祖召幸之, 以側微

 

그런데 당시 장화왕후집안은 골품제의 통일신라 사회에서도 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어느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직급으로나 재력으로도 왕건의 다른 부인들에 비해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예전 드라마에선 장화왕후의 집안을 통일신라 때 멀지않은 지역 완도에서 활동하던 장보고의 측근세력 출신으로 묘사했었다.

 

장보고의 영역인 완도와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인 목포, 나주가 서로 인접지역이고 '측미(側微)'하다는 기록 등 유사점이 있으므로 작가의 상상을 가미한 내용인데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진 않다.

 

장화왕후의 나주 오씨집안은 스스로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집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다.

 

지역적으론 백제나 통일신라 때 백제와 신라에 정복당한 피정복 지역이며 혈통적으로는 중국에서 온 이방인 출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측미(側微)는 바로 이러한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의 궁파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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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 중 궁파(장보고)의 신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아래는 삼국유사 원문과 번역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巴側微, 上以其女爲妃則不可.”

궁파는 미천한 출신이니 왕께서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

사편찬위원회에서도 측미(側微)를 '미천한'으로 번역하지만 궁파(장보고)는 골품제가 엄격한 통일신라 사회에서도 이미 자신의 딸을 왕비에 삼게 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의 열전 장보고 편이다.

아래는 위의 삼국사기 원문과 번역이다. 그대로 올린다.

張保臯 (羅紀作弓福)·鄭年 (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에서는 궁복(弓福)이라 하였다.)
정년(鄭年)(연(年)은 혹 연(連)이라고도 하였다.)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고향이 어디인지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국사기에선 장보고의 고향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신라의 주류인 서라벌 출신이라면 신라 내에서 그에 대한 고향과 집안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므로 그가 신라의 중심인 서라벌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그가 당나라 군대 장교 출신이며 당나라와 청해진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지 서라벌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신라의 중심세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측미(側微)는 '미천하다'는 뜻이 아닌 '중심세력도 아니며 숫자도 미약한 세력'이라는 뉘앙스이다.

 

 

아래는 오마이뉴스의 기사이다.

려사는 고려 때를 기록한 사서이지만 이 사서를 기록한 시기는 조선 초기이다.

그러면 조선 중기 때 측미(側微)라는 단어를 어떠한 경우에 사용했는지 보겠다.

 

이 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을 다룬 '오마이 뉴스'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본문 내용을 그대로 옮기겠다.

"이때 고경명의 얼제(孽弟, 배다른 동생) 고경형(高敬兄)도 끝까지 고종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왜적과 싸우다가 끝내는 촉석루 아래 남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유독 고경형만이 측미(側微, 미천)한 사람이라 하여 상을 받지 못했다."

기서 고경명과 그 집안이 모두 의병활동을 하였으나 고경명의 얼제(孽弟, 배다른 동생으로 서얼출신 동생 즉, 서자출신의 동생)인 고경형은 측미(側微)하다는 이유로 상을 받지 못했고 조선임금은 그러한 내용은 부당하다며 직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보면 孽(얼)을 보고 側微(측미)하다고 표현한다. (얼)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서자'를 뜻한다.

 

그런데 김부식이 고려때 기록한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얼)이라는 단어는 '발해'를 건국한 ‘속말말갈’을 칭할 때도 사용한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내용이다.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髙句麗殘孽類聚, 北依大白山下, 囯號爲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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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삼국사기의 원문과 번역내용이다.

髙句麗類聚, 北依大白山下, 囯號爲渤海.
고구려유민(遺民)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아래에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원문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번역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번역을 보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의역을 했다.

원문엔 髙句麗殘孽(고구려 잔얼)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번역엔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고구려의 남은 서자'로 번역해야 한다.

즉, 발해를 세운 속말말갈(말갈은 숙신의 지역적 후예이다)인을 (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의 입장으로 보면 피정복민이나 이방인이다.

신라의 최치원은 속말말갈(말갈은 숙신의 지역적 후예이다)을 얼(孽)이라고

즉, 고구려의 서자(髙句麗殘孽)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기사에 기재된 조선의 기록을 보면 얼(孽)을 '측미하다(側微)'고 표현했다.

 

따라서 고려초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태조왕건이 황제로 등극했을 당시 고려인들은 ‘말갈(숙신)’계인 이방인을 孽(얼)이란 개념으로 側微(측미)하다고 인식했다 본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왕건의 출신을 가리키는 표현인 측미(側微)를 '한미하다'라고 해석해서 고려 왕건이 한미한 집안의 송악지역 해상 무역상 내지는 재력가로 본다.

 

하지만 고려사에 기재된 朕出自側微(짐출자측미) 문장은 고려 왕건의 출신이 당시 고려의 기준으로 볼 때,

이방인이고 태봉이나 고려 내에서도 중심세력이 아닌 소수의 미약한 세력이라는 뜻이라 해석된다.

 

왕건은 자신의 출신이 측미(側微)하다고 발언했지만, 혁명 당시 왕건의 직책은 시중(현재의 국무총리)이었다.

 

또한 왕건을 추대한 세력들도 왕건보다 직급이 높지 않았고 그들의 집안 출신 역시 왕건 보다 귀했다고 볼 수 없었다.

 

이들(궁예의 태봉을 이은 고려 초기의 고려의 지배층들)은 통일신라 기준으로 보면 피정복민인 고구려 유민출신이거나 신라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세력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즉, 왕건이 언급한 측미(側微)는 왕건 집안이 이러한 고려 내에서도 측미한 이방인(외국인)이라는 뜻이지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 번역이나 통설의 견해인 '미천하다'는 뜻이 아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고려사에서도 태조 왕건의 조상은 당나라 황제의 후손으로도 기재하고 있다.

 

고려 왕건 집안을 고려사에선,

"원래 미천한 집안이지만 이를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인물이 왕건이다!"라는 취지로 기록하질 않고

 

고려사 앞부분의 '고려세계'에서도 정확한 계통은 모르며 일부 기록엔 '당나라 황실'과 연관된다고 소개하는 문장구조인데

 

'고려세계' 다음 장인 '고려 태조 원년' 기록에,

왕건 스스로 "나는 미천한 출신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고려사의 대략을 밝히는 '고려세계'와 앞뒤의 문장 구조상 맞지가 않다.

 

즉, 우리나라 통설처럼 측미(側微)를 '미천하다'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따라서 측미(側微)는 사전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側)자는 중심이 아닌 주변을 뜻하며 미(微)자는 미세함을 뜻한다.

 

측미(側微)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중심이 아닌 미약한'이니

고려 초기 고려 내에서 피정복민이거나 지방세력이거나 이방인에 해당된다고 본다.

왕건은 이 경우엔 고려내에서 이방인 출신으로 해석된다.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궁예대왕에게 밝힌 삼한의 구성원을 봐도,

용건의 삼한에 숙신(말갈의 지역적 선조이다)이 포함되는 것을 보면 왕건의 집안은 숙신(말갈의 지역적 선조이다)과 관련된 이방인 세력으로 봐야 한다.

 

아래는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궁예 대왕에게 이른(曰) 용건의 설(說)이다.

용건의 삼한 설(說)에 우리나라의 통설과 달리 숙신(말갈의 지역적 선조이다)이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고려사의 태조 총서내용이다.

 

고려시대 사료 DB

世祖時爲松嶽郡沙粲, 乾寧三年丙辰, 以郡歸于裔, 裔大喜, 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 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 使太祖築勃禦塹城, 仍爲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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