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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동호(東胡), 오환(烏桓), 말갈(靺鞨) 본문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후한서 권90 오환선비열전 제80 오환에 대한 내용이다.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한국 고대 사료 DB
○ 烏桓者, 本東胡也. 漢初, 匈奴 冒頓滅其國, 餘類保烏桓山, 因以爲號焉. 俗善騎射, 弋獵禽獸爲事. 隨水草放牧, 居無常處. 以穹廬爲舍, 東開向日. 食肉飮酪, 以毛毳爲衣. 鄭玄注周禮曰:「毛之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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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후한서 권90 오환선비열전 제80 오환에 대한 원문과 번역 일부이다.
...及武帝遣驃騎將軍霍去病擊破匈奴左地, 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 爲漢偵察匈奴動靜. 偵, 覘也, 音丑政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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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을 보내 흉노의 동쪽 지역[左地]을 공격하여 [흉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이때 [이전에 흉노에 복속했던] 오환을 상곡[군](上谷郡)과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郡)의 새외(塞外)로 옮기고, 한(漢)나라를 위해 흉노의 동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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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은 B.C. 283에 연나라(燕)가 기자조선(箕子朝鮮), 진번(真畨,眞番), 동호(東胡)를 물리치고 얻어낸 땅이며 요새(塞)를 지었던 곳이다.
이 5개의 군(郡)들 중에서 연나라(燕)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을 점령하고 설치한 요동군(遼東郡)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진번(真畨,眞番)과 동호(東胡)의 영토에 속했던 지역이었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대략 B.C. 117년 쯤 5개의 군(郡) 외곽에 동호(東胡)의 후예인 오환(烏桓)이 거주하게 된 것이다.
아래는 연나라(燕) 상곡군(上谷郡) 치소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지금의 하북성 회려현(怀来县) 구글지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 주변이 상곡군(上谷郡) 이었다고 추정된다.
화이라이 현 · 중국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중국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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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진나라(秦) 어양군(漁陽郡) 치소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지금의 리원장(梨园庄) 구글지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 주변이 어양군(漁陽郡)이었다고 추정된다.
梨园庄 · 중국 베이징 시 화이러우 구 邮政编码: 101400
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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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연나라(燕) 때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지금의 보저구(宝坻区) 구글지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 주변이 우북평군(右北平郡)이었다고 추정된다.
바오디 구 · 중국 톈진 시
중국 톈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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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란남현(滦南县) 구글지도이다. 란남현(滦南县)은 연나라(燕) 때 요동군(遼東郡)에 포함된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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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풍남구(丰南区) 구글지도이다. 풍남구(丰南区)는 연나라(燕) 때 요서군(遼西郡)에 포함된 지역일 것으로 생각된다.
펑난 구 ·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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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의 지역들의 외곽인 북쪽에 오환(烏桓)이 거주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내용이다.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HOI sg_023r_0020_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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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본문과 번역이다.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况今妖祥屢見, 國母弃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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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B.C. 6)〕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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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보면,
백제(百濟)의 온조왕은 기원전 6년 우리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라고 발언한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여기의 낙랑(樂浪)은 한반도 내에 위치한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이 아니다.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군(樂浪郡, 위만조선의 왕험성)이라고 해석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내용이다.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HOI sg_023r_0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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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에 대한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温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猒丗,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欝欝如疣贅, 不如奉母氏南遊卜地, 别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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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주몽)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유리왕)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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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기재된 주석의 내용을 보면,
백제(百濟)의 시조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넜다(渡浿·帶二水)고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북사(北史) 열전 백제의 내용이다.
중국정사조선전 < 한국 고대 사료 DB
HOI jo_012r_0010_002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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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북사(北史) 열전 백제의 원문과 번역이다.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 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 濟校勘, 因號百濟.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北接高句麗 諸本脫 「北接高」 三字, 據周書卷四九百濟傳補. 隋書作 「北拒高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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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帶方에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漢의 遼東太守 公孫度(150년 ~ 204년)는 딸을 [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東夷 중에서 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百濟라고 불렀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新羅에 닿고 북쪽으로는 高句麗와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모두 大海로 경계지어져 있고 小海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동서의 거리는 450리이며 남북의 거리는 900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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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북사(北史)에 보면,
백제(百濟)는 구태(仇台)에 의해 대방(帶方)에서 시작했다(...仇台... 始立國于帶方故地)고 기록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론,
북사(北史)에 기록된 구태(仇台)는 삼국사기에서 백제(百濟)의 시조로 기록한 온조(温祚)보다 후대의 인물이다.
따라서 백제(百濟)가 나라로서 중국에게 그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온조(温祚) 때보다는 약 200년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온조(温祚)가 건넌 패수(浿水)는 옛 조선(朝鮮)과 연나라(燕)의 국경이었던 패수(浿水)를 지칭한다고 해석된다.
패수(浿水)를 건너 대수(帶水)를 건넜고 백제(百濟)가 대방(帶方)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대수(帶水)를 건너면 그 지역은 대방(帶方)이었다고 추정된다.
아래는 중국 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3 내용이다.
欽定滿洲源流考 (四庫全書本)/卷03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欽定四庫全書 欽定滿洲源流考卷三 部族〈三〉 百濟〈一作伯濟〉 漢 後漢書三韓〈另條見前〉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三國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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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의 중국유기문고에서 제공하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3의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은 만주원류고(남주성 역, 글모아)의 남주성 박사님의 번역을 따른다.
<通考>百濟即後漢末夫餘(另條見前)王仇台之後馬韓五十四國百濟是其一也初以百家濟因號百濟後漸强大兼諸小國晉時句麗既畧有遼東百濟亦畧有遼西晉平(唐栁城北平之間)
自晉以後吞併諸國據有馬韓故地南接新羅(另條詳後)北拒髙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自晉代受藩爵自置百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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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고> 백제는 곧 후한 말 부여(앞의 다른 조 참조) 왕 구태의 후예이다. 마한 54개 국 중 백제는 그 하나이다. 초기에 백가가 [바다를] 건너서 [나라를 세웠기에]백제라고 불렀다. 백제는 뒤에 점차 강대해져서 여러 소국을 합쳤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였고,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 사이)을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후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남쪽으로 신라와 닿고(다른 조에서 상세하게 후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은 대해를 한계로 하고, 소해의 남쪽에 있다. 진나라 이후 대대로 번국으로서의 작위를 받아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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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원류고에서 인용한 통고(通考)의 내용이다. 백제(百濟)에 대한 내용인데 중국 진나라 때(晉時)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진평(晉平)이 등장(百濟亦畧有...晉平)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를 주석한 청나라 학자들은 '진평(晉平)이 당나라 때의 북평(北平)과 유성(栁城) 사이이다(唐栁城北平之間)'라고 해석하고 있다.
아래는 북평(北平)에 대한 중국유기백과의 설명이다.
北平市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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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유기백과의 설명내용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구글번역기와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틀릴 수 있으니 참작하시기 바란다.
明代以前,“北平”一词从未用于今北京附近地区,而是保定、天津蓟州区所拥有的名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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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이전에는 '북평'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의 북경 근처 지역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지금의 보정과 천진 계주구에 해당되는 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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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보면 진나라 때(晉時) 백제(百濟)의 영토는 지금의 중국 천진 계주구(天津蓟州区)를 포함하고 있다.
아래는 계주구(蓟州区)에 대한 구글지도이다. 진나라 때(晉時) 백제(百濟)의 영토로 추정되는 곳이다.
Jizhou · 중국 톈진 시
중국 톈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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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도(公孫度, 150년 ~ 204년)가 활동하던 때에 백제(百濟)는 대방(帶方)에서 나라를 시작했고 진나라 때(晉時)는 백제(百濟)가 이 계주구(蓟州区)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란남현(滦南县) 구글지도이다. 연나라(燕) 때 패수(浿水)로 추정되는 란하(灤河)의 서쪽이니 이 곳은 한나라(漢) 요동군(遼東郡)에 포함된 지역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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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北史)에 의하면,
백제(百濟)의 시조 구태(仇台)는 요동태수 공손도(遼東太守 公孫度)의 사위라고 한다.
나는 지금의 란남현(滦南县)은 연나라(燕) 때 요동군(遼東郡)으로 추정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지도를 보면 진나라 때(晉時) 백제(百濟)의 영토로 추정되는 계주구(蓟州区)와 연나라(燕) 때 요동군(遼東郡)으로 추정되는 란남현(滦南县)은 서로 인근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로 인근에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장인과 사위가 되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백제(百濟)는 지금의 계주구(蓟州区) 부근인 한나라(漢) 대방(帶方)에서 나라를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마한(馬韓)의 땅에도 진출했으며 결국엔 한반도로 완전히 이주했다고 해석된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내용이다.
삼국사기 < 한국 고대 사료 DB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왕 해부루(解夫婁) 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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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본문과 번역 일부이다.
觀其土壤肥羙,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宫室, 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髙句麗, 因以髙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 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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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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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저자는,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卒本扶餘)는 한나라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이고 그 지역은 요나라(遼國) 동경(東京) 서쪽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당나라의 관료 배구(裵矩)가 고려는 고죽국(孤竹國)의 후예(高麗本孤竹國)라고 발언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당나라 관료 배구가 지칭한 고려는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아닌 기자조선에 속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다).
삼국사기를 보면,
주몽이 왕이 된 지역인 졸본(卒本)은 말갈(靺鞨)과 서로 닿아 있었다(其地連靺鞨部落)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를 해석하면 주몽은 한나라(漢)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왕이 되었고 그 지역은 고려(高麗) 때 요나라(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은 옛 고죽국(孤竹國) 부근이라고 해석된다. 현재 하북성 조양시(朝阳市)이거나 그 부근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아래는 중국 조양시(朝阳市) 구글지도이다.
한나라(漢)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은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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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내용을 종합해 보면,
낙랑군(위만조선의 왕험성)의 서쪽에 위치한 백제(百濟)의 북쪽엔 말갈(靺鞨)이 있고 현도군 고구려현(玄菟郡 高句驪縣)에 위치한 주몽의 졸본부여(卒本扶餘)는 말갈(靺鞨)과 닿은 지역이라고 한다.
결국 그 지역들을 지도를 통해서 분석하면 지금의 중국 승덕시(承德市)에서 적봉시(赤峰市) 그리고 조양시(朝阳市) 서북쪽에 해당된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 지역이나 그 부근은 연나라(燕) 때부터 한나라(漢) 무제(武帝) 때까지 시대에 따라 동호(東胡), 진번(真畨,眞番), 오환(烏桓), 말갈(靺鞨)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도표이다.
기원전 283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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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郡) 중 요동군(遼東郡)을 제외한 4군에 동호(東胡)와 진번(真畨,眞番)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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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5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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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郡)의 경계 외곽에 오환(烏桓, 동호의 후예)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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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에서 6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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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군(郡)의 경계 내외곽에 말갈(靺鞨)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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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의 내용을 종합해서 평가한 내 개인적인 견해론,
진번(真畨,眞番)은 동호(東胡)에 속한 세력이었지만 사기(史記)에서도 서로 구별하듯이 진번(真畨,眞番)은 동호(東胡)와는 차별된 집단이었다.
진번(真畨,眞番)은 정치적으로 조선(朝鮮)에 의존하던 세력이고 동호(東胡)계통이지만 조선(朝鮮)에 가까운 세력이었다고 추정된다.
오환(烏桓)은 동호(東胡)의 후예이다. 그리고 163년 후에도 옛 동호(東胡)가 거주하던 지역 부근에서 거주한 것을 볼 때 항상 그 부근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80년 후 말갈(靺鞨)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삼국사기에서 기재한 것을 보면 말갈(靺鞨)은 오환(烏桓)의 한 일파(一派)내지는 분파(分派)였다고 추정된다.
또한 금사(金史)에서 여진(女真,女眞)은 말갈씨(靺鞨氏)라고 기록되어 있고 진번(真畨,眞番)과 말갈(靺鞨)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동호(東胡)가 역사적으로 인근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볼 때 진번(真畨,眞番)은 여진(女真,女眞)의 조상이라고 추정된다.
여진(女真,女眞)과 말갈(靺鞨)을 퉁구스(Tungus)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그 어원은 이들의 조상 동호(東胡, dōnghú)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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