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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양, 고려 평양, 압록강, 강남과 강북 (수정된 내용) 본문

태조왕건과 삼한

고구려 평양, 고려 평양, 압록강, 강남과 강북 (수정된 내용)

박지원( baghatur khan) 2023. 7. 24. 12:14
아래는 중국 길림성 통화시 금창진약진촌 구글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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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글지도에 빨간색 표시는 중국 통화시 금창진약진촌이며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송양의 비류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지도를 확대하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으로 추정되는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과 하천(河川)으로 연결된다.

 

내가 예상했던 비류국 위치보다는 더 동쪽에 위치해있고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 오녀산(五女山) 부근에서 통화시 금창진약진촌까지는 대략 63km 거리이다.

지나치게 멀어서 실제 송양의 비류국이 이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주몽은 졸본부여 주변을 흐르던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도 사람들이 거주한다고 생각해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송양의 비류국을 발견했다.

따라서 63km의 먼 거리일진 모르겠다

 

나는 부이강 근처로 봤는데 내가 추정한 부이강 근처에서 오녀산(五女山) 아래까지의 거리는 대략 18~19 km이다.

실제 송양의 비류국이 중국 통화시 금창진약진촌에 있었다고 해도 고려인들은 이 지역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 송양의 비류국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고려인들은 옛 송양의 비류국이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 북쪽에 있었다고 인식했다 본다.

 

아래는 중국유기백과의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에 대한 내용이다.

 

万发拨子遗址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zh.wikipedia.org

래는 위의 중국유기백과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에 대한 내용 일부와 번역이다. 중국어를 하지 못해 구글번역과 내가 아는 한문으로 번역했다. 번역이 잘못될 수 있으니 감안하시기 바란다. ( )안의 파란색 글씨는 내가 개인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春秋戰國
萬發撥子春秋戰國時期的文化遺存最為分布,分布面積大、遺蹟遺物豐富,文化堆積層最厚。從出土的動物骨骼來看,從春秋戰國到西漢,再到魏晉時期,野生動物的種類和數量都有減少的趨勢,而家養的牲畜則明顯增加,狗的數量具有相對穩定性。可以看出在這一階段聚落人口迅速增加,生產力水平快速提高,周圍林地資源和野生動物資源被過度消耗。
西漢
萬發撥子西漢時期(包括高句麗初期)的遺存面積較大,但文化堆積層相對較薄。這時期的聚落遺址周圍出現了構築的環壕,證明遺址已屬於組織較嚴密的大型村落。
魏晉
萬發撥子魏晉時期的遺存分布面積大大小於前兩時期,居址僅見於西部圓丘頂部,這可能與這時期的戰亂導致人口減少有關。
춘추전국시대
만발발자에선 춘추전국시대 문화유물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분포 면적이 넓고 유물이 풍부하며 문화 축적 층이 가장 두껍다. 출토된 동물의 뼈를 보면 춘추시대부터 서한시대, 위진시대에 이르러 야생동물의 종류와 개체수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가축은 크게 늘었고 개의 개체수는 비교적 고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부락(촌락)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하며 주변 삼림자원과 야생동물자원이 과도하게 소비(소모)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한 왕조
서한(고구려 초기 포함)시기에 만발발자의 유적은 면적이 비교적 넓지만 문화축적층은 상대적으로 얇다. 이 시기에 부락(촌락) 주변에는 둥그런 참호(구덩이)가 나타났는데, 이는 이미 상대적으로 엄격하고 조직화된 대규모 촌락(부락)에 속했음을 증명한다.
위진
위진(魏晉, 위진남북조) 시대의 만발발자 유적의 분포면적은 이전 두 시기에 비해 훨씬 적고, 정착지는 서부 원구 정상부분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는 이 시기에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에서 발굴되는 시대별 유물들을 통해 신석기 때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발견된 유물과 유적층을 분석해보면 주로 춘추전국시대와 서한(전한) 때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위진남북조 때는 발견된 유물이 많지 않아 그 시기부터는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았다고 본다.

 

서한(전한) 때이면 송양의 비류국이 존재하던 시기이다.

이때 비약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지만 문화축적층이 얇다고 한다.

('얇다'는 표현이 '기간'을 뜻하는 표현이라면, 서한 때는 이 지역에 사람들이 오래 거주하지 않았다고 해석된다)

송양은 선인(仙人)의 후예로 제왕운기에선 소개하고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는 선인(仙人)을 단군으로 해석해서 송양을 단군의 후손일 거라고 추측하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론 선인(仙人)은 기자(箕子)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만발발자유지(萬發撥子遺址)와 지금의 집안시(集安市) 북부는 위만조선 유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며,

이 중에 지금의 집안시(集安市) 북부는 삼국유사에 기재된 단군조선의 평양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은 위만조선 멸망 후위만조선 유민이 이곳에 몰렸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들이 이 지역에 오래 거주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247년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과 송양의 비류국이 합쳐진 곳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과 통화시 만발발자유지(通化市 萬發撥子遺址)의 거리가 먼 것을 볼 때,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과 가까운 길림성 집안시(集安市)가 기존의 졸본(환인만주족자치현)과 통합되어 동천왕 때의 평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위진남북조(265~581) 때부터 이 통화시 만발발자 유적지에 거주하던 위만조선 유민들은,

고구려가 247년 천도한 평양으로 대거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기존의 주몽이 도읍한 졸본은 새로운 도읍인 평양 내부에 속한 지역이 된다.

다만, 상징성 때문에 평양과는 별개로 불렸다고 본다.

 

 

아래는 길림성 집안시 구글지도이다.

 

지안 시 · 중국 지린 성 퉁화 시

중국 지린 성 퉁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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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는 고구려 도읍이었던 국내성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또 다른 수도인 환도성 역시 집안시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초기보다는 압록강에 가까이 도읍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산성자 지역의 구글지도이다.

성자 지역은 고구려 도읍이었던 환도성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내용을 보면 졸본, 환도, 국내성, 247년 때인 동천왕 때의 평양 등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 주변을 벗어나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도읍이 이동하고 바뀌어도 압록강에 의지해 한정됨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 볼 때,

247년 동천왕 때 천도한 평양뿐만 아니라 427년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 역시 압록강 주변으로 한정되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 서경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 지역인 지금의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이고,

고려 평양은 위의 고구려 수도의 이동과 변천이 있었으므로 고려의 평양은 위의 지역범위 중에 압록강 부근이었다고 본다.

(고려 서경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라는 상징성이 있지만,고려 평양은 고구려 때의 도읍 중 하나여서 비중이 약하다. 따라서 고려에선 서로 인접해 있지만 구분해서 칭했다고 본다)

 

 

아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고려사 권14 인종 4년에 대한 내용이다. (음력 1126년 12월 12일, 양력 1127년 1월 26일)

고려시대 사료 DB

癸酉 遣衛尉卿金子鏐, 刑部郞中柳德文, 如金謝宣諭. 表曰, “高伯淑至, 密傳聖旨, ‘保州城地許屬高麗, 更不收復.’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逮我祖宗, 値北國

db.history.go.kr

래는 원문 일부와 번역이다.

切以勾麗本地, 主彼遼山,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려[勾麗]의 본토는 저 요산(遼山)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였는데(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번역하면 고구려 평양은 압록강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해석된다. 한반도 내 압록강 주변에 고구려 평양이 있었던 것처럼 이해된다),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고려 인종이 금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의 일부이다.

두 지도자 간의 서신 내용이니 가장 정확한 내용이라고 본다.

고려 인종은 고구려의 평양 위치를 밝힌다.

 

平壤舊墟, 限於鴨綠, 累經遷變.

 

이 원문을 한국사데이터 베이스에선 뉘앙스가 다르게 번역했다.

마치 압록강 남쪽에 고구려 평양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평양(平壤)의 옛 터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였는데,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限於는 '~에 국한되어서' 내지는 '~에 의지해 한정되어서'로 한자사전이나 중국어사전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내용을 직역하면

'평양의 옛 위치는 압록강에 의지해 여러 번 이동하고 바뀌었지만 압록강에 한정되어 있었다'내지는

'평양의 옛 위치는 압록강에 국한되어 여러 번 이동하고 바뀌었다'로 번역된다.

 

즉, 일자리가 있는 서울시가 있고 서울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울시 주변의 위성도시가 있듯이,

위성도시는 서울시나 대도시에 의지하고 서울시나 대도시에 가까운 지역으로 한정된다.

 

옛 고구려 평양은 압록강에 의지한 도시이기 때문에,

위성도시가 대도시나 서울시 주변에 있듯이 평양이 이동하고 바뀌어도 압록강 주변에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현재 추정되는 고구려의 수도들인 환인만주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县), 집안시, 산성자는 고려 인종이 금나라 황제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처럼 모두 압록강 주변으로 한정내지는 국한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우왕은 바로 압록강 부근의 고려 평양으로 와서 압록강에 부교를 세우도록 지휘하고 압록강 근처 서경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도록 지휘한 것이다.

고려 우왕은 결코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 같은 제 정신이 아니거나 현실도 모르고 부하를 고생시킨 왕이 아니다.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서 함께 움직인 왕이다.

 

 

아래는 限於의 다음 중국어 사전 내용이다.

 

限于 – 다음 중국어사전 (Daum 汉语词典)

1.불과하다 2.한정되다 3.제한을 받다

dic.daum.net

설명에서 보듯 限於는 번체이며 限于는 간체라고 한다. 동사에 해당된다고 하며 문어로 사용된다고 한다.

번역은 '(…에) 한하다. 불과하다. (어떤 범위로) 한정되다. (조건이나 상황의) 제한을 받다.'로 번역된다고 한다.

 

아래는 서울특별시의 구글지도이다.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이 모두 서울특별시이다.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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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과 접한 산성자나 집안시 주변에 고구려 평양과 고려 평양이 있었다면 지금의 서울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이 있듯이 고구려 평양과 고려의 평양 역시 압록강 남쪽과 북쪽의 강남과 강북으로 형성된 도시였다고 본다.

아래는 북한 평양시의 구글지도이다. 대동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이 모두 평양시인 것을 볼 수 있다.

 

평양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직할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직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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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길림시의 구글지도이다. 제2송화강을 기준으로 강동과 강서가 모두 길림시인 것을 볼 수 있다.

 

지린 시 · 중국 지린 성

중국 지린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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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요양시의 구글지도이다. 태자하를 기준으로 강동과 강서가 모두 요양시인 것을 볼 수 있다.

 

랴오양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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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중국 심양시의 구글지도이다. 혼하를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이 모두 심양시인 것을 볼 수 있다.

 

선양 시 · 중국 랴오닝 성

중국 랴오닝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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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례를 볼 때 고구려 평양과 고려의 평양은 압록강에 접했을 경우 강남과 강북으로 형성된 도시였다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