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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중국무술의 명칭 '십팔기'와 '십팔계' 본문
아래는 태권도 도장 다물원 사이트에서 올린 내용이다.
예전에도 이 글을 다른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다.
무도 사이트에 올라온 글로 보인다.
위의 태권도 원로 박철희 선생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박철희 선생님이 본인의 스승인 윤병인님을 회고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아래는 인터뷰 원문 내용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당시 윤병인 선생님의 별명은 ‘경농 18기’였는데, 선생이 경성농업학교에 재직하면서 권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
이 내용을 보면 만주에서 팔극권, 장권(소림권) 등 중국무술을 배우신 윤병인 님을,
1940년대 당시 서울사람들은 '중국무술을 가르치시는 윤병인.'이라는 의미로
윤병인 님의 별명을 '경농 십팔기'라고 칭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미 먼저 올려드린 글과 대한뉴스에서 보듯
자유중국대사관은 1957년과 1959년에 중국무술의 명칭을
'십팔기'로 사용하고 있었 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철희 선생님의 인터뷰에서도 보듯 그 보다 이전인 1940년 대에도
서울에서 중국무술은 '십팔기'로 칭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당시는 한반도 내의 일반적인 조선,
한국인들은 중국무술을 배울 수도 없을 때였고
당연히 해방 전후 조선인, 한국인 중에 중국무술 관장이나
사범 역시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는 데도
해방 후 윤병인 님이 자신이 만주에서 배운 중국무술을 서울에서 가르치자,
한국인들은 윤병인님의 중국무술을 '십팔기'라고 칭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보면 중국무술을 뜻하는 '십팔기'라는 명칭은
1960년대 한국인 중국무술가인 황주환 회장님에 의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는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황주환 회장님은 당시 자유중국대사관(당시 대만)에서
중국무술 '십팔기'를 수련하신 분이었으니
황주환 회장님이 중국무술과 협회를 '십팔기'로 칭하신 것은 당연했고 정확했다고 본다.
아래는 포탈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고사성어대사전' 내용이다.
중국무술을 뜻하는 명칭 중 하나인 '십팔반무예'가 등장한 근거와 사용된 예를 설명한다.
'십팔반무예'가 등장한 근거와 사용된 예를 설명한다.
아래는 위의 고사성어대사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대로 올려드린다.
‘십팔반무예’라는 말은 남송(南宋)의 화악(華岳)이 지은 《취미북정록(翠微北征錄)》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신은 십팔반무예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다. .........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병기는 다음과 같다. 「모(矛), 추(錘), 궁(弓), 노(弩), 총(銃), 편(鞭), 간(鐗), 검(劍), 연(鏈), 과(撾), 부(斧), 월(鉞),과(戈), 극(戟), 패(牌), 봉(棒), 창(槍), 배(扒).」 |
즉, '십팔반무예'라는 명칭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남송 시대의 '취미북정록'이며,
이후 중국의 사대기서인 '수호전'에서도 '십팔반무예'라는 명칭이 등장하며
'십팔반무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 내용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래는 연합뉴스 기사 내용이다.
위의 기사 내용을 아래에 그대로 올려드린다.
능종은 추신에서 숙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호전(水滸傳)은 그 사이에 충분히 보셨을 터이니 아주 긴요한 사유가 없으면 인편(人便)으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한마디를 통해 4대 기서(奇書)라 일컬었으나, 양반은 읽어서는 아니 될 금서(禁書)처럼 취급된 수호전이 당시 사대부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음을 엿볼 수 있다. |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조선에서 '수호전'은
읽어서는 안될 금서처럼 취급했음을 볼 수 있다.
'수호전' 자체가 허균의 '홍길동전'처럼 반란소설이니
유교사회이고 신분질서가 엄격한 조선에선 금서처럼 취급했다 본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볼 때 금서에 가까운 반란 소설인 '수호전'에 등장하는
'십팔반무예'라는 용어 역시 조선에선 잘 사용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에서 '십팔기'가 중국무술을 칭하는 명칭이 된 것의
배경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라고 내 개인적으론 본다.
즉, '십팔반무예'라는 명칭을 피해 변칭과 약칭으로
중국무술을 '십팔기'로 사용했다고 본다.
또한 '자유중국대사관(당시 대만)'이
중국무술 명칭을 '십팔기'로 사용한 것을 볼 때
중국에서도 '십팔반무예'는 '십팔기'라는 약칭으로 사용했다고 본다.
아래는 중국의 병법서인 '삼십육계'를 설명하는 위키백과 내용이다.
삼십육계는 손자병법과 더불어 매우 유명한 병법서이고
병법서라는 특성에서도 볼 수 있듯
이는 어떠한 병장기나 맨손무술을 설명하는 책은 아니다.
군인이 반드시 알고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세상의 지혜이고 싸움의 지혜'인 것이다.
김산 교수 저작 '한국 십팔기 연구(한국학술정보 출판)'의 페이지 46에서 49를 보면
1941년 조선일보 자매지인 월간 '조광'에서 주최한 좌담회를 소개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좌담회의 주제와 명칭은 '조선무예와 경기에 관한 좌담회'인데,
좌담회의 참석자들이 '십팔게(1941년 당시의 한글표기이며
지금의 한글표기론 '십팔계'이다)'의 기원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에서 중국무술 명칭 중의 하나인 '십팔계'가 등장한 기원은
조선 말 임오군란 등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관리인 원세개가
조선의 청년들에게 중국무술을 가르칠 때 '십팔계'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원세개는 중국무술을 '삼십육계'라는 명칭으로 칭했었고,
자신이 조선에서 중국무술 '삼십육계' 중 조선인들에겐
그 절반인 '십팔계'만 가르친다고 청나라 관리 원세개가 발언한 것이
'십팔계'라는 명칭이 조선에서 등장한 유래라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 개인적인 견해인데
청나라 관리가 병법서의 명칭을 중국무술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당시는 청나라 시기였고 당시 중국무술은
원칙적으로 군인들만 수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무술 명칭 역시 병법서 명칭인 '삼십육계'로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즉, 청나라에선 무술이라는 개념을
군대의 병법 틀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무술은 군대의 병법인 '삼십육계'안에 포함되는 작은 단위이고
병법을 실현하는 수단의 일부인 것이라고 인식했었다고 본다.
원세개는 청나라 관리이니 그의 이러한 태도나 용어 사용은
청나라 관리라는 직분에 맞는 올바른 표현이었다고 본다.
명나라나 청나라는 민간인의 무술수련을 원칙적으로 금지 시켰기 때문에
민간의 무술용어인 당랑권, 팔극권 등의 명칭은 사용할 수 없었다고 본다.
또한 청나라 이후 민국시대 때인 1929년도에 남경에 '중앙국술관'이 설립되면서
'중앙국술관 '관장인 장지강 장군에 의해 중국무술을 '국술'로 칭하기 시작했지만
이는 청나라 이후의 이야기이므로 여기엔 해당되지도 않고 등장할 수 없는 명칭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국내에서 중국무술을 칭하는 명칭인
'십팔기'와 '십팔계'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가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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