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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世安民 bagtur khan
시험과 대응 본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복음서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의 순서가 조금 다르며
마귀가 하는 말의 묘사가 조금 다르고
마태복음에서는 사탄의 시험이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이후에
진행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선 금식이 진행 중인
사십일 동안에
마귀는 다른 시험도 이미 진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대해서 말씀드리니
마태복음이 아닌 누가복음을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이 기간동안 마귀는 다른 시험도 하였고
예수님이 금식 후 주리시자
마태복음에도 등장하는
최종적인 시험을 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마귀는 예수님에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이 떡(빵)이 되도록 해보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당연히 가능하다는 어투로
유혹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예전에 읽던 불교 관련 서적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대승경전이 아닌
소승경전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기억되는데
붓다 즉, 고다마 싯다르타는
어느날 명상 중 마라(불교에서 미혹하는 자)에게
유혹을 당합니다.
붓다는 세상의 중생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이 정치를 하면 어떨까 라며
잠깐 생각에 잠깁니다.
그때 마라는 붓다에게
당신이 히말라야 산을 황금으로 만들어
저 중생들을 만족시켜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자세한 기억은 아닙니다. ^^ ;)
그러자 붓다는 마라에게
내가 저 히말라야 산을 황금으로 만들고
다시 그 황금을 두개로 만들어도
한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제가 해석하기엔
여러 중생은 고사하고
한 사람의 욕심도 채워주지 못하며
자신의 가르침은 욕심을 채워줌에 있지 않고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모든 욕심과 집착을 버림에 있다라는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시험 내용은 외형적으로 보면
앞의 붓다의 시험내용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른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예고
그리고 그 당사자의 등장과
하나님의 구원의 실현 예고가
등장합니다.
즉, 복음서에는 구원을 위한
어떤 특정인물의 등장이 예고되어 있으며
이는 즉,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내용이 기술된 후
예수님의 등장과 세례
그리고 성령의 이끌림과
예수님의 시험이라는 사건의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등장하심과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받는 시험은 그냥 우연히가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을 때
성령에 이끌리시어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긋나도록
예수님의 능력과 힘을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내지는
세상의 권세를 지향하도록
누가복음에서는 세상의 권세는
사탄의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니
사탄에게 결국 굴복하도록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희곡이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향하는 자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대신
세상에 어필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내용은
아마도 이 내용에서 모티브를 받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오직 하나님을 기준에 두고
즉,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와 장소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예수님
당신이 등장하신 역사를 중심에 두어!
아마도 이 내용이
기독교와 불교가 차별화된 세상관
내지는 가치관 아닐 까 생각합니다.
다음 말씀은 다음 주
토요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